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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망망 대해에 구명보트 하나. 혼자서도 버티기 힘든데, 호랑이라니!!!
가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방이 둘러막힌 작은 섬에서, 며칠간 혼자서 지내고 싶다고 할까. 현실이 팍팍하고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상상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상상의 여행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죽을고생을 하면서 혼자서 여행을 하고 픈 이는 없을테니까.
<파이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났던 책은 <로빈슨 크루소>였다. 혼자서 섬에 표류해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든 로빈슨 크루소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이 책은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인간이 아닌, 부족한 식량과 식수에 구명보트안에서 벵골 호랑이와 함께 지내야 하는 생존의 위협이 가득한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77일간 그들이 생존을 위해 행했던 생존기는 눈물겹다 못해,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믿고 싶을 정도까지 이르게 한다.
# 1장을 주목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
책은 크게 3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파이가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표류되기 전,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에서 생활하던 이야기와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의 3가지 종교의 모든 신앙을 가지려 노력한 에피소드가 1장에,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캐나다로 동물원을 이주하려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동물들을 일본 소유의 파나마 국기를 단 배에 싣고 여행을 떠나던 중 배가 침몰해서, 15살에, 혼자서 구명보트에 남겨진 277일간의 표류기가 2부, 277일간의 긴 여행끝에 멕시코에 도착한 파이와 침몰한 배의 원인을 알고 싶어 찾아온 일본관리의 인터뷰가 3장이다.
가장 읽기 힘든 부분이 1장이라고 생각된다. 침몰과는 상관없는 파이의 유년시절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다. 하지만, 이 1장을 세심하게 읽어야, 2장에 등장하는 파이와 호랑이와의 사투와 힘겨운 상황에서도 매일 신에게 기도하는 파이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종교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의 사제, 이슬람교의 수피, 힌두교의 브라만의 주장에, 파이가 이야기 한 "간디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했다며 그저 신을 사랑하고 싶었다"며 3가지 모두의 종교를 가지려 애쓰고, 3개의 신자가 되었던 파이의 행동과 동물원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나게 해 주는 발언과 동물들은 자기영역과 먹이가 유지되면 절대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래도 동물은 동물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굶주린 호랑이가 염소를 잡아먹는 장면을 통해, 위기상황에서 언제든지 난폭해질 수 있는 동물의 성품을 경험한 에피소드는 전체 이야기의 큰 두 축을 지탱해 주는 복선이다. 동물원에서 오랜시간 동물의 습성을 관찰한 결과, 동물이 조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희망도 믿음도 기원할 수 없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파이가 스스로 삶을 멈추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계속 살아내는 이유의 복선은 1장에 다 담겨있다.
책은 두 번 사람을 놀라게 한다. 2장에서의 생생하고 치밀한 묘사는 정말 277일간 벵골호랑이와 함께 지낸 경험을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어떻게 호랑이와 사람이 살 수 있지? 에서 와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할만큼 호랑이와의 생존기의 묘사가 치밀하고 섬세하다. 독자를 배 한가운데로 옮겨놓고, 파이와 호랑이의 동거생활을 지켜보게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작가의 빼어난 상상력과 묘사는 책장을 다음으로 계속 넘기게 한다. 하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해초와 나무가 결합된 섬이라던지, 미어캣이 사는 독특한 섬에 대한 묘사와 우연처럼 다가오는 날치떼의 습격은 문명인들이 이해하기에 힘들어 보인다. 두 번째 놀람은 멕시코에 도착하고 난 후, 사고의 원인을 발견하려는 일본인과 파이의 이야기인 3장에서 나타난다.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일본인 관리에게 파이가 들려주는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는, 차라리 동물이 등장하는 파이의 이야기를 믿고 싶게 만든다.
#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날 수 있다는 신념!
위기와 아무것도 기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인간은 결국 생존하기 위해 동물보다 더 잔인해 질 수 있다는 사실과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신념이 있다면, 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경기도 힘들고, 삶이 더 나아질 것 같기도 않고, 세상은 벵골 호랑이가 보트 아래 방수포에서 사는 것처럼 팍팍하고 무섭기만 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바다'의 재발견으로 어렵사리 버텨낸 파이에 비하면, 내 삶은 아직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고, 희망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여정은 파이의 인생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에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동물원들의 동물을 관찰 할 만큼 생존을 보장받고 여유있게 생활하다가, 어느 한 순간 삶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고난을 통해,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날들이 온다. 그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에 대한 믿음, 아니면, 살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실의 삶은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어렵게 새로운 섬에 발길을 딛지만, 그 곳이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무서운 곳일수도 있다. 그렇게 헤매다가 자기만의 안식처를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삶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
의심을 인생철학으로 선택하는 것은 운송수단으로 '정지'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파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상상의 이야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을 믿는 종교를 가진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신앙'과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무신론자나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들은, 삶을 지탱해 주는 자기만의 '신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보면 우유에 빠진 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난다. 살아남기 위해 수없이 몸을 움직였기에 개구리가 우유를 치즈로 만든 것처럼, 신념을 가지고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힘겨운 삶을 버텨낼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만든 공간이 너무나 파격적이라서 그 상황에 빠져, 소설의 실화여부를 확인할 염두도 내지 못했다. 그만큼 흡입력이 강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