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담긴 집, 그 곳에 다시 찾아갔을 때..
이학부 물리학과의 연구조교인 난 부모님께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부모님은 철거시간을 알려주며, 찾아와 주길 바랬지만, 그 시간 난 집에 웅크리고 앉아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2년 전 한 여인과 함께 갔던 집을 떠올리며 마음이 스산해짐을 느낀다.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대학교 4학년때까지 오랜 연인이었던 구라하시 사야키를, 헤어진 후 7년만에, 고등학교 2학년 동창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자기 소개를 통해 이제는 세살 된 딸이 있는 가정주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로 그녀와 만날 약속을 하게 되고, 그녀에게서 아버지가 혼자서 종종 외박을 하셨던 장소에 함께 가달라는 부탁을 받게된다.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그녀는 딸 아이와 잘 지내지 못하고, 열흘 전부터 아이는 시댁에서 기르고 있다.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알아야 할 것 같다는 그녀의 부탁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녀의 왼쪽 손목에 그어진 붉은 자국을 보고 함께 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지도를 따라 찾아간 그 곳에는 현관문은 닫혀있고, 반대편에 지하실이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이다. 흐린 날씨와 인적이 드문 공간인 스산한 집과 마주하게 되는데...
# '아동학대'라는 사회현상과 사건의 비밀을 찾아가는 서스펜스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책.
일본에서 1994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14년이 흘렀지만, 글의 긴장감은 여전히 팽팽하다. 집안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생으로 보이는 유스케의 일기장을 보면서, 소년의 기록과 사야키의 관련성을 찾기 위한 게임이 시작된다. 하나씩 사건의 비밀을 풀어가면서, 그녀가 지니고 있는 비밀, 그녀와 그의 관계, 그리고 그의 비밀, 그녀가 맞딱드려야 했던 사건들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전통추리소설의 복선이 잘 깔린 소설이다. 조금 특이하다고 한다면,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기 보다는, 기억속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찾는 과정이 독특하다고 할까. 살인보다 더 공포스러운 현대인의 병인 '아동학대'를 학대를 하는 당사자, 학대를 당하는 피해자의 양쪽의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한 점이 책의 장점이다. 그냥 범인과 트림을 밝혀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집중함으로써, 사회 현상에 더욱 고민을 하게 만든다.
'아, 이 애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심리, 그리고 아동학대를 받은 아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 다시 반복되는 폭력의 되물림, 부모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경멸당하는 것 가장 못 견대한다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 밝혀진다.
돌이켜보면, 유년시절은 성인이 되어서 좋지 않은 부분은 잊혀지면서, 아름답게 포장되는 경향이 강할 뿐이지, 누구나 감추고싶은 어두운 기억 하나는 존재하기 마련이라 생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이처럼 그 상처에서 도망치거나, 핑계되지 않고, 그러한 상처를 담담하게 인식하게 되는 마음크기가 자란 상태라 생각한다. 상황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는 마음이 되었을 때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걸 소설을 통해 재확인하게 되었다.
아이를 부모의 기대대로 키우려는 욕망이 아이와 어른 모두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군더더기가 전혀없는 묘사된 배경, 물건들 하나하나에 중의적인 복선들이 깔려있는 이 소설은 두 번 읽었을 때 그 진가가 더욱 잘 드러난다. 사건의 비밀을 몰랐을 때 한 번, 상상을 넘어서는 전개에 놀래고, 비밀을 알고나서, 저자가 짜놓은 촘촘한 논리의 그물망을 살펴보다 보면, 작가의 빼어난 역량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무의식에 전류가 닿은 듯 찌릿하면서 옛 추억속으로 잠시 빠져들게 한 소설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빠른 독서를 할 수도 있고, 숨겨진 비밀을 찾다 마지막 페이지에 닿을 수도 있다. 곰곰히 어두운 인간의 비밀과 사회현상에도 맞닥뜨릴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