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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회 추억
신영복 지음, 조병은 영역, 김세현 그림 / 돌베개 / 2008년 7월
평점 :
# 생의 마지막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 남은 추억은 무엇인가요?
1968년 이른 봄철, 숙명여대 교수였던 저자는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청을 받고, 서오릉으로 한나절의 답청놀이를 가던 중, 시골풍경과 소달구지의 바퀴자국을 닮은 여섯명의 아이들이 봄나들이에 나온 모습을 목격한다.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라는 첫 마디로 시작되는 그들의 대화, 그리고 씨름과 한나절의 즐거운 추억을 남긴 채,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전해듣지만 저자는 잊어버리고 만다. 15일 후, 문화동의 산기슭에서 사는 세 친구의 안부를 묻고 모임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며 사진을 받았으면 한다는 편지를 받는 순간, 반성의 마음을 갖게 된 저자는 "이번 주 토요일 오후 6시, 장충체육관에서 만나자"는 엽서를 보내고,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 저자와 여섯친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냥 만나는 것이 좋았던 그들의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스스로 번 10원과 저자의 40원을 보태 한 달의 백원을 저축하는 모임이 되었고, 모임 때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되었다. 여름에는 마라톤을 준비하고, 동네 주변을 쓸고, 동네 계단의 얼어있거나 젖어있던 부분을 걸어다니게 편하게 만든 그들의 봉사활동의 모습과 너무나 가난해서 중학교에 갈 형편이 어려웠던 그들이 고난과 그것을 지켜보는 저자의 마음, 담낭절제수술로 수도국군병원에 입원했을 때 소풍때도 가져오지 못한 삶은 달걀을 싸왔지만, 결국 돌아가야만 했던 그들의 마음들이, 저자의 추억으로 갈무리 되어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진다.
몸이 완쾌되어 백운대로 소풍을 가게 된 그들을 위해 육군사관학교 경제학부 교수이자 이화여대에 출강중이였던 저자는 육군사관생도와 이화여대 '청맥회' 학생들을 초대하여 즐거운 소풍을 떠난다. 1968년 7월, 군사정부에 의해 구속되기까지 이어졌던 그들의 만남은 사형을 언도받은 저자로 인해 한 순간의 추억으로 갈무리 되고 만다. 정치적 권력을 위해 개인을 빨갱이로 몰아부쳤던 검찰과 정보부는 '청구회'라는 모임을 심문하고 그들이 불렀던 노래의 '주먹쥐고'라는 부분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을 준비하는 단어가 아니냐며 저자를 몰아부친다. 군사재판에서 1심을 언도받고 사형을 선고받은 저자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이루지 못한 약속, 아쉬운 순간들을 떠올리다, 청구회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 옥중에서 쓴 추억의 편지.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그때의 풍경들.
하루에 두 장, 화장지 대용으로 나눠 준 재생종이 두 장에 쓴 청구회의 추억은, 다른 저자의 메모와 함께 공책처럼 묶여 있다가 대법원 판결에서 사형이 파기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면서 근무하는 헌병에게 전해진다. 헌병에게 집으로 보내달라는 부탁과 함께 여의치 않으면 없애도 괜찮다는 말로, 당부하며 적은 글은 오랜세월 잊혀지다가 1988년 출소즈음 집을 이사했을 때 아버지의 방에서 발견되어 1993년 영인본에 실리게 된다. 잊혀질 수도 있을 추억들이, 따스한 우연의 힘에 의해 다시 세상에 빛을 보는 순간이라고 할까. 출소 3년 후, 저자의 미술선생님이던 김영덕님의 <전장의 아이들>이란 사진을 보고 청구회의 추억을 다시 떠올린 저자는 청구회 멤버들을 수소문하고, 일부 학생을 만나기도 한다. 변해버린 시간동안 쌓여있던 그들의 삶의 무게만큼 다양한 삶들을 그들은 살고 있었고, 다시 한 편의 추억의 장면으로 남겨져 버린다.
저자의 아름다웠던 생의 한 순간의 풍경들을 지켜보다보면,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풍경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저자의 글 사이사이의 그림들은 풍경을 떠올리는 일을 도와준다. 초등학교 때 동물원에 가서, 소풍을 갔던 추억들, 그때는 디지털 카메라가 도입되지 않아 사진기 하나 사는데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던 때였다. 저자의 추억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추억이라, 그때의 실상을 떠올릴 수 없지만, 살다보면 잊어버리고 마는 추억의 순간들을 떠올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가난하지만, 서로 인정이 넘치였던 옛날은 낯선 사람들끼리 친해지는 일도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낯선 이와 대화하는 일은 서로에게 경계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자의 추억이 현재에 되살아날 수 없는 건, 그만큼 우리의 삶도 많은 부분 변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술이 고도화로 발달된 만큼,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도 발달되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12월, 한 해를 돌아보기 좋은 시기이다. 한 해만 돌아보지 말고, 조금 더 시간의 폭을 넓혀 어린 시절의 잊어가는 추억들도 생각하는 틈을 마련했으면 좋겠다. 추억을 되살림으로써, 지금의 삶이 나아지는데 실질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떠올리고 싶은 추억들은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자주 연락하지 않지만,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지인과 어제는 오랜 통화를 했다.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에 오랜 시간의 머뭇거림은 사라지고, 바로 옆에서 소곤소곤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가늘고 긴 추억도, 청구회의 추억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좋은 인연을 맺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청구회의 추억에서 추억이란 단어가 더 크고 마음에 가까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바쁘고 고되고, 삶의 여유가 없는 팍팍한 세상이다. 그럴수록 추억이 필요하다. 바로 당신을 위해.
P.S 영역본도 함께 덧붙여져 있다. 영역본을 보면 저자의 문체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학생들에게는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될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