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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 절망의 시대, 그래도 걸어야 하는 이유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세상은 다 불에 타버렸고, 남아있는 건 페허된 건물들 뿐이다.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나는 아빠와 어린 아이의 생존기가 이 책의 큰 줄거리이다. 경찰도 거래도 사라져버린 절망의 현실에서 쇼핑 카트와 배낭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 아이의 엄마는 노상에서 인신매매하는 강도들 등 자신에게 다가올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러 떠나버리고, 먹을것이 떨어져가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사내는 아이를 위해 공포탄 두 알을 꼭 지닌 채 계속에서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사람을 잡아먹는 노상 강도들과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수 없는 공포의 상태에서 사내와 아이는 계속해서 길을 떠난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을거 같은 절망의 시대, 먹을 걸 살 수도 없고,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공간도 없다. 간혹 편하게 쉴 수 있는 자연의 공간을 찾았다고 해도 오래 머물수가 없다. 내가 편한곳은 다른 이도 편한 곳이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다. 주(state), 통조림 등 모든 게 멈추기 이전의 문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낯선 사람들에게 호의적이다. 하지만 사내는 타인을 쉽게 믿을 수 없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겨우겨우 생을 이어가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계속해서 여행을 떠난다. 상상 그 이상의 절망의 시대를 보여주는 작가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 절망의 늪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실제 코맥 메카시는 인생의 많은 시기를 궁핍과 은둔의 생애에서 보냈다는 역자 후기를 보았다. 팔년 동안 헛간 같은 곳에 살며 목욕은 호수에 나가서 하곤 했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강연을 해 주면 상당한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 할 정도로 자기만의 고집이 있는 작가이다. 정말 굶어죽을 경지에 이르면 꼭 어딘가에서 살 방도가 나타났다는 말과 책을 쓰게 된 계기가 9살난 아들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다 산위에 불이 타오르고 모든게 다 타버린 세계를 생각한 후 집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절망인 아무것도 기댈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유년시절의 집터를 둘러보는 사내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 문명의 혜택과 화려했던 시기를 보았던 사내와 그 문명에 대한 기억없이 파괴된 세상을 자신의 세계로 인식하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아이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화려했던 시기를 머리속에 염두해 두고, 지금 세상 살기 힘들다는 언급이 얼마나 무의미하는지 모든게 파괴되어 버린 세상을 머리속으로 살아보며 역설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의 순간이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든지 나빠졌든지는 나의 인생에 관계가 없다. 풍요로운 황금빛 이삭이 보이는 논길 사이를 걷던지, 모든게 무너져버린 황폐한 광야를 걷던지 생존의 이유는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 또 그렇게 인간은 살아갈 것이다.
한때 산의 냇물에 송어가 있었다 송어가 호박빛 물속에 서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지느러미의 하얀 가장자리가 흐르는 물에 부드럽게 잔물결을 일으켰다. 손에 잡으면 이끼 냄새가 났다. 근육질에 윤기가 흘렀고 비트는 힘이 엄청났다. 등에는 벌레 먹은 자국 같은 문양이 있었다.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였다. 지도와 미로. 되돌릴 수 없는 것,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323p)
지구 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생물체가 인간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다른 종들은 그들 스스로 멸망하고 자연에 피해를 주지 않지만, 인간은 지구 자체의 생명체 모두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과 무기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고, 인간만이 남은 비극적인 상황. 하지만 다시 지구는 생성될 것이고, 또 그렇게 인간은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