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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 - 봉단편 ㅣ 홍명희의 임꺽정 1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방대한 양에 겁이 난다. '의적'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작가의 행간을 살피기 힘들다. 어려움에 주저하던 임꺽정, 그를 만나다.
'의적'이란 단어는 모순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도둑이 의로울 수 있을까? 현실이 각박하고, 세상이 살기 힘들어질수록 그런 말들이 더 힘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못 사는 세상은 모두가 힘들기에 더 견디기 쉽다. 하지만 눈 뜨고 땀흘려 일하지 않고, 날로 돈을 벌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을 보면, 참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조선 시대 3대 의적중의 하나로 불렸던 임꺽정이, 일제시대 '조선일보' 신문을 통해서 1120회의 연재본을 묶은 책이다. 남북 협상을 위해 월북한 뒤 되돌아오지 못해 한국에서 오랜시간 잊혀졌던 벽초 홍병희 선생의 혼이 담겨있다. 일제시대, 일본인과 조선인의 불평등한 세상, 착취받는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영웅의 갈망이 '임꺽정'이란 사내를 잊혀진 조선시대 사료에서 역동하는 모습으로 책에 담겨있다.
10권으로 되는 거대한 분량이 부담이 되기도 하였지만, 책을 읽는걸 미루어 왔던건 완간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끝이 없는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작가의 행간을 읽기도 벅찬데, 그 이후까지 꿈을 꿀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다음에... 내 마음이 조금 더 자라고 난 뒤에 도전해 보자.. 그렇게 미뤄놓은 지도 십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십년의 시간동안 깨달은 건 오늘 꿈꾸는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래어의 유입으로 섞여있는 한국어의 바다가 아닌 외래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고유어가 넘실거리는 숲이라며, 임꺽정을 읽으면 이미 사라져버린 옛말과 순수한 말결을 돌아볼 수 있다고 추천해 주었다. 망설이고 부담스러웠던 마음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누르고 꺼내들었다.
# 살아 숨쉬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 버린다.
좀더 예쁜 말을 찾아보고 싶은 불순한 마음에 꺼내들었는데, 읽다보니 이야기의 맛에 빠져버렸다. 1권에서 임꺽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홍문관 교리를 지냈던 이장곤이 연산군에 의해 쫓겨난 뒤, 함경도까지 도망가는 험난한 과정과 백정의 딸과 결혼해서 백정의 신분으로 온갖 고생과 장인, 장모까지 박대를 당하지만, 아내 봉선이와는 애틋하게 지낸다. 3년 뒤에 반정이 일어난 뒤 복권이 되어 힘들 때 서로 애틋했던 봉선이를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임금께 진언해서 숙부인에게 오르는 모습은 가난한 집의 아들이 고시에 패스한 것보다 더 감동적이였다. 장인의 아우인 양주팔의 술사 체험기, 봉선이와 어렸을 때 함께 지냈던 돌이와 양주팔 둘 모두 혼인을 하고, 돌이는 딸을, 양주팔은 아들을 얻는 과정까지 전개되어 있다.
진부하지 않고 짜임새 있고 구수한 우리말을 헤아려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상상플러스에서 나온 '외탁', 게으름뱅이라고 막대하다가 양반이 되어 나타나니 이전의 일이 생각나서 전전긍긍하던 장모의 모습과 갑자기 바꿔야 하는 말투에 어색해 하는 모습들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신분이 낮다고 사람을 업신여기던 풍조의 모습에서 예나 지금이나 차별은 늘 존재하는 쓰라린 모습도 느끼게 되었다. 시기, 질투, 원망, 투정 등 감정이 살아숨쉬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들을 보며, 웃고 안타까워하고, 한탄하고 빠지다 보니, 책이 끝나버렸다.
# 소장하고 싶고, 선물하고 싶은 책을 만나다.
개인적으로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책을 빨리 읽는다고 해도, 3권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다 믿는다. 아직 마음이 어려, 비움을 잘 하지 못하고 끙끙대며 가지고 있다. 좋은 책은 다른 사람들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쉽게 떠나보내게 된다. 내게 맞지 않았던 책은 즐겁게 읽어 줄 사람에게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보내버린다. 같은 책을 읽고나면, 대화할 주제가 늘어난다. '임꺽정'은 모순된 현실과 욕망의 모습도 잘 담겨있어, 더 이야기하기 편하다.
10권을 선물 할 수 있는 벗을 만나는 건 참 어렵다. 선물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10권을 받는 다는 건 10권을 다 읽어야 하기에 부담되는 일이다. 그래도, 그런 벗이 생긴다면, 한 달에 한 권씩 선물을 해 주고 싶은 책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내게 한 달에 하나씩 선물해야 겠다. 한 달 빨리 시작해서, 내가 읽은 느낌까지 함께 보내 준다면 그이도, 조금 더 용기를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책은 나를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만든다. 내게 소장의 욕망을 안겨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