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남다른 사유로 접근해 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은 소설이다. 실제 사랑을 할때 이런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을까? 짝사랑에 빠진 사람의 공상처럼, 실제의 경험보다는 사랑에 관한 많은 사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부딪치는 많은 경험들을 작가의 깊은 생각의 거름종이로 거른 후에 멋진 칵테일로 만들어 냈다.
실제 사랑 이야기보다는, 사랑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연인보다는 밤이 외롭지 않다고 항변하는!!! 솔로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연애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책읽는 재미에 빠져서일까. 버스에서 가볍게 읽어보려고 했던 책들이 너무 재밌어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버스에서 책을 보려고 해도 많은 제약들이 있어 음악을 듣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잠에 빠지게 된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몸이 조금은 불편한 좌석에도 불구하고, 버스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책 읽는 재미에 빠진 게 아니라, 재미있는 책을 만났다.
# 사랑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이어지는 많은 생각들..
보통과 기차여행을 하는 느낌이라 할까. 출발 역에서 '운명적 사랑'이란 이야기에서
헤어져야 하는 종착역에서는 '사랑의 교훈'까지 24개 역을 한 역에 5분씩 2시간 여행했다. 운명적 사랑이라 느끼기 위해, 같은 시간, 같은 비행기, 같은 좌석에 만나는 큰 수의 확률을 만들어 내고 그 만큼 우리가 운명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하게 될 운명이여서, 그녀를 만나 사랑을 빠지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클로이이므로, 클로이가 내 운명이라 착각하게 된다. 사랑이 필연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 사랑에 대한 약간의 환상을 가진 나에게 뜨끔한 이야기였다.
'야심만만'에서 모 여배우가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다는 느낌이라서 자주 하게되면 그 의미가 사라질까 하는 마음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널 사랑해'가 아니라, '널 마쉬멜로 해'한다는 이야기에 그 여배우의 새로운 면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말로는 사랑을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 일 수도 있고, 너무 의미가 깊어서 아직 정리하지 못했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힘들었다고 하며, 모든 사랑의 표현에는 다른 문화와 이제까지의 흔적이 묻어있었다고 이야기하며 '마쉬멜로' 한다고 표현해 내는 달콤한 상상력과 센스에 감탄했다.
이런 센스 있는 사람이라면, 남자던 여자던지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고 할까.. 24개 역 내내 가끔은 젠체하면서 이야기하는 그가 얄밉기도 했지만, 유익하고 즐겁고 깜짝깜짝 놀래게 하는 멋진 통찰력에 즐거움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 멋진 번역가를 만나는 즐거움까지.
1993년에 처음 책이 출간되었고, 95년에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었다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절판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 정영목님에 의해 다시 번역되었다.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읽어도 아직 유효한 이야기가 많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를 잘 풀어냈기 때문이다. 번역서의 난점은 원문을 읽었을 때의 그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작곡가가 혼신을 다해서 만들어낸 악보를 연주하는 연주자라고 할까. 뛰어난 연주가를 만나면, 원곡 이상의 느낌이 날 수도, 아무리 좋은 악보도 연주가를 잘 못 만나면 그 빛을 내기 힘들다.
우연히 번역가의 번역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짧지도 길기도 않은 시간동안 그는 현재 번역에 대해 나온 많은 논점들을 제시하면서, 그것들 중 하나를 택하는 건 자유지만, 어떤 논점들이 있고 장단점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하나의 틀을 정해서 확고한 지침을 주는 것이 아닌, 양쪽을 잘 살펴서 생각의 틀을 강요하지 않은 점이 멋졌다.
멋진 작품이 좋은 번역가를 만나는 건 원석이 보석의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세공하는 이가 자신의 스타일의 소중함과 함께 원석의 자체의 멋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라서 작품도 더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많은 생각과, 사유의 힘, 그리고 멋진 작가와 멋진 번역가까지... 많은 매력이 담긴 책을 만나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