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구 돔구장 투어 여행기 책이다. 일본 구단에 대한 내용도 풍부하다.

격동의 2004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2004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상 처음으로 프로야구 주말 경기가 선수회(JPBPA)의 스트라이크 결의에 따라 12경기 모두열리지 못했다. 결국, 일정에 잡혀 있던 경기가 취소되고 말았다. 9월 16일~17일 양일간열린 선수회와 NPB(일본야구기구) 간의 노사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이루어진 선수 파업으로 일본 프로야구 70년 사상 초유의 사태인 ‘공백의 2일‘을 맞은 것이다. 긴테쓰와 오릭스의 일방적 합병 발표에 반발해 이루어진 이번 파업에 따라 양일간 선수들은 구단별로팬 사인회 또는 자체 연습을 했다. 노사협상의 쟁점이었던 긴테쓰와 오릭스 문제는 결국합병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긴테쓰 팬들은 거리 시위에 나서기까지 했다. 1954년 전통의 긴테쓰가 막을 내리면서 팀명은 오릭스 버펄로즈가 되었다. 긴테쓰와 오릭스 합병에따라 라쿠텐이 라이브도아를 제치고 새로운 구단으로 NPB 참여가 결정되어 센다이시 미야기구장을 본거지로 창단했다. 이즈음 2004년 일본 챔피언 세이부에서도 회사 경영이어려움에 부닥치자 야구단 매각설이 흘러나오면서 한때 양대 리그가 단일 리그제로 간다.
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미 다이에 호크스는 소프트뱅크로 넘어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마쓰나가 타격 3관왕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마쓰나가의 타격 3관왕 등극은 1938년 나가지마(교진), 1965년 노무라(난카이), 1973~1974년 오(王 貞治, 교진), 1982년과 1985~1986년 오치아이(롯데), 1984년 부머(한큐), 1985~1986년 바스(한신)에 이은 사상 7번째이다. 마쓰나가의 최종 성적은 타율0 358 홈런 44 타점 1200이었다. 이해 히로시마 카프에서 무명 10년 차를 보내던 시마가타율 0,337로 센트럴리그 수위타자를 차지했는데, 그는 1995년 입단 당시 애초 투수였다.

가 1999년 야수로 전향한 지극히 평범한 선수였다. 연봉도 최저 수준이었다. 그러던 시마가 마쓰이 히데키처럼 되겠다고 백넘버를 55번으로 달더니 137경기에서 타율 0.337 홈런32 타점 84에 최다안타(189)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언론에선 그를 원조 고질라 마쓰이와 비교해 ‘붉은 고질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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