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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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외로울 때 제 만화를 보고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나도 어린 시절 은희와 같은 생각을 했다. 외로운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덜 외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얼마 전 읽었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라는 책에서 어린 루시도 그런 다짐을 한다. 자신은 앞으로 책을 쓸 것이고,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덜 외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모두 외롭고 어린 여자아이였던 우리는 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서 자신이알지도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고자 했을까.

영지 선생님도 은희를 그런 마음으로 마주했을 것이다. 은희가 덜외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영지 선생님이 눈빛으로, 함께 있어 주는시간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어 주는 방식으로 은희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그 빛을 받은 은희 또한 영지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위로받고 싶었던 사람들이 위로하는 것처럼, 외로웠던사람들이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소설 쓰기가 깊은 애도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처리하지 않았던 슬픔을 다시 한 번 깊이 느끼며 소화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마음이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 기억을 끌어내 어떤 애도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리라 희망했다. <벌새>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붕괴된 성수대교로 찾아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은희를 보며, 나는 은희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그때의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애도할 수 있는 영화를 비로소 만났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은희들에게 이 영화는 결코 잊힐 수 없는 애도의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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