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    황 1 ======================================

아침에 학교가기 전에 일기예보를 살펴 보았습니다.

"@#$% 비는 안 오겠으나 흐리고 @#@$%"

’음... 다행이군.’

비는 안 오고 흐리기만 한다기에 우산은 놓고(전 날 비온다고 해서 우산을 들고 갔더니 비가 안 와서...)
신을 신은 후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헉...!

"뭥미!!!"

왜 놀랐냐면 비가 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_-;
물론 이슬비이긴 했지만 ’흐림’이라던 일기예보는
도대체 뭘까요? 제 눈이 이상해서 잘못 본 것일까요?

일기예보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비난은 그렇다 치
겠습니다. 미래의 일을 맞추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요. 그런데 지금 비오고 있는데 그것과 틀리게 예보하는 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 상    황 2 ======================================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천안 역 플랫폼에 대기 했습니다. 몇 분 후에 방송이 나오
길 가산디지털 역 부근에선가 신호기 고장(?) - 노래를 듣고 있어서 정확하게 못 들었습니다. - 으로 전
철 운행이 지연 된 까닭에 용산행 급행 열차가 조금 후에 온다더군요. 용산 급행이 15시 49분에 지나 갔
어야 했으나 제가 플랫폼에 도착한 시간은 16시 정도, 열차가 도착한 시간은 16시 10분이 조금 넘어...
원래 급행을 못 타는 거였으나 운 좋게 타고 올라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뻤죠.

그러나 기쁨도 잠시...

구로에서 동인천행 급행 열차를 탔는데 동암역에서 멈추더니 출발을 하지 않지 뭡니까. 이
윽고 방송이 
나왔습니다. 주안역 신호기 고장으로 열차 운행이 지연 되고 있어 죄송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요.
헉... 천안서도 그러더니 인천에서도! 그런 상황을 한번 겪는 것도 힘든데 연달아 두번이나 겪다니 정말
놀랍고, 기가막힐 따름이었습니다!

아무튼 천안에서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지... 싶어 - 물론 저야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나 다른 
분들은 오래 기다렸을테죠. - 기다렸습니다. 몇 분 지나서 방송이 또 나오더군요. 앞서의 문제로 열차 
운행이 지연 된다고요. 때문에 급하신 승객들은 요금을 환불해 줄테니 다른 이동수단으로 갈아 타시라
더군요. 저는 어차피 약속도 없고, 집에 일찍 들어가나 앉아서 기다리나, 어디서든 할 일은 같고, 할 거 
리를 가지고 있기에 여유있게 기다렸습니다.

한참 기다린 끝에 드디어 출발 했는데 시간을 보니 1시간 조금 넘게 대기 했지 뭡니까! 헐~ 저야 집에 
가는 길이니 괜찮았는데 급한 일이 있던 분들은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상하행선 모두 지연 됐으니 말
이죠.



===================================== 정    리 =======================================

아무튼 어제 희안한 일을 세번이나 겪은 정말 희안한 하루였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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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육 교수-학습론 - 교사교육시리즈 7
임영택 지음 / 종로서적성서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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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교육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각각 정의한다.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행위 또는 그 과정.” 혹은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 지식과 인격을 함양(涵養)시켜주는 행위.” 아니면 “한 사회의 올바른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 이상의 정의들은 사회 교육에 해당한다. 그러한 교육 외에 또 다른 교육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 교육이다. 그것의 범위를 축소시켜 기독교 교육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기독교 교육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여 그분의 실존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행위”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학습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게 하고, 그렇게 살도록 제안하는 데 있다.    

 교회에서의 교육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가장 먼저 주일학교 교사들에 대한 체계적인 기독교 교수-학습 교육이 부족하다. 그리고 날로 급변하는 세상의 물결에 그대로 노출되어 가치관의 충돌을 일으키는 학습자들에게 무엇이 바른 가치관인지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학습자들에게 바른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자질을 향상과 체계적인 교수-학습법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본 서는 기독교 교수-학습의 이론과 과정 등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 교수-학습의 이론과 과정을 제시하여 실제의 교수-학습 현장에서 그것들을 적용하고, 더 나은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돕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더불어 그 적용 과정을 통해 교사의 자질과 교육의 변화를 꽤한다.  

 내용 구성은 총 4장으로 되어 있다. 제 1 장은 ‘학습 이론의 유형’으로 몇 가지 학습 이론의 유형을 소개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기독교 교육 과정에 적용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제 2장의 제목은 ‘기독교 교수-학습론의 가능성’ 이다. 이 장에서는 신학과 학습론을 접근시켜 본다. 그 후 앞 장에서 소개한 몇 가지 학습 이론 중 ‘형태학설’과 ‘신학’의 융합을 통해 ‘기독교 교수-학습’이 가능한지 알아본다. 제 3 장 ‘교수-학습이 일어나는 클래스룸’에서는 1장과 2장에서 알아본 이론들이 실제 학습 현장인 ‘클래스룸’에서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와 클래스룸의 형태, 그리고 ‘만남의 클래스룸’에 대해 살핀다. 마지막 제 4장은 ‘교수-학습의 과정’으로써 교사가 ‘교수-학습‘을 위한 계획, 진행, 평가의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룬다.  

  우리나라의 공교육은 주입식 교육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창의성 개발의 부족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교사 당 학생 수가 선진국에 비해 높은 우리나라의 교육 여건상 현재의 교육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힘들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시설확충 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교육, 다시 말해 주일학교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주일학교 또한 교사 당 학생 수가 많다. 물론 공교육과 비교하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 교육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어쨌든 학생 수의 많음은 개개의 이해력에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이해력이 다른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려하면 주입식 교육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교육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온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원하는 수준과 원하는 만큼의 교육을 할 수가 없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과 교수 및 학습자 사이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만나게 하는데 있다. 하지만 현재의 주일학교 교육 여건은 그것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 

 기독교 교수-학습의 질적 향상은 학습자의 기독교에 대한 지식의 증대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 했듯이 학습자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을 만나도록 한다. 그것은 곧 세상 가치관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고, 반대로 하나님 안에서의 바른 가치관의 확립을 뜻한다. 그렇기에 기독교 교수-학습, 다시 말해 주일학교 교사들의 자질 향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 한 권의 작은 책에 나타난 교수-학습론과 그 과정이 그와 관련된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한정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일반 학습론에서부터 그것과 신학의 만남의 가능성, 그리고 교수-학습의 과정 등을 살펴보는 데 상당히 유용한 정보와 도움을 준다. 그리고 내용이 상당히 알차고, 설명에 충실하다. 이론서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배경 지식 없이도 이해는 가능하지만 그것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책의 내용이 가장 좋은 답은 아닐 것이기에 관련된 다른 책과 비교하며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살피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각자의 몫일 것이다. 또한 분량의 한계만큼 깊이도 한정되어 있다는 게 아쉽다. 이는 이 책만으로는 관련된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관련 사항을 좀 더 깊게 숙고하기에는 제공된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한계이다. 따라서 더 나은 기독교 교수-학습을 위해 이 책을 기본 개론서로 삼고, 관련된 책으로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연구한 내용을 현장에 적용시켜 나간다면 교사와 기독교 교육의 질적 향상은 조금씩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일학교 교육의 목적과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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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예언서 이해
차준희 / 한국신학연구소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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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는 정체성을 잃은 설교가 설파되고 있다. 설교 본연의 목적과 역할을 무시한 채 물질을 많이 얻는 방법, 복을 많이 받는 방법 등 ‘잘 사는 법’에 관한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설교자에게 주신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는, 대언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한다 하더라도 성경 66권 중 한정된 본문만 설교에 인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몇 가지 본문을 통해서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말씀 하신다. 한정된 본문 인용은 편식이 몸의 성장 불균형을 일으키듯 성도들의 영의 성장 불균형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설교에서 특히 인용되지 않는 본문은 구약에서는 예언서, 그리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다. 그 본문들이 인용되지 않는 이유는 분석하기 까다롭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 해석하였을 경우 심각한 오해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인용을 꺼린다. 

 본 서는 인기 없는 설교 본문인 구약 예언서의 형성과 그 연구의 역사, 그리고 예언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총 세 명의 저자의 각기 다른 글이 실려 있다. 편자의 말을 빌리자면,  


   
  “형식적으로 보면 한 명의 저자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마치 한 사람의 저작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논지에 있어서는 일관성이 있다. 그 근본 이유는 세 사람이 학문적으로 같은 계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총 네 개의 글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제목은 ‘문서 예언서 이해’, ‘예언서 연구사’, ‘예언 선포의 의도’, ‘예언자들의 메시지’이다. 네 글은 모두 논문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리 길지 않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인의 지식이 미천하고, 학문적 분석 능력이 아직은 낮아서 본 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마추어 수준, 본인의 입장에서 비평 및 총평, 그리고 읽은 느낌을 정리 하고자 한다.

 이 책은 세 명의 저자에 의한 네 개의 글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외견으로 봤을 때는 글들의 통일성과 각각의 개연성이 낮아 보인다. 하지만 세 저자는 한 계보에 속해 있어서 학문적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연구된 예언 선포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함도, 단순히 잘못된 사회를 비판하기 위함도 아닌 다가 올 멸망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야웨의 정해진 심판임을 알리는 것이다. 야웨을 정당성을 변호하는 것이다. 이는 예언서에 대한 본인의 이해와는 달라서 새로움을 느꼈다. 본인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통한 변화를 촉구, 야웨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다르게 해석하니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아직은 모르나 나와는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은 참으로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마음을 배반하듯 본인을 계속 붙들었던 의문이 있다. 과연 이 책의 내용이 우리나라 신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주장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신학의 테두리를 우리나라로 한정짓는 것은 위험하고, 올바른 행동이 아니지만 언젠가 우리나라 신학계에 몸담을 본인으로서는 그 동향에 민감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본인의 입장에서는 신학을 접함에 있어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제 막 신학의 기초를 닦는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여 지식의 확장을 꽤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성도 갖는다. 기초를 올바로 닦아 놓지 않은 상태에서 다양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기초의 부실화, 잘못된 신학을 형성할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예연서와 관련된 다른 서적을 더 많이 읽고, 공부를 깊게 해봐야 해결될 것이다. 의문과 위험성은 남았지만 어쨌든 이 책의 내용이 본인의 지적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예언서는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꺼리는 본문인 것처럼 본인 또한 다른 성경들보다 특히 더 많은 거리를 두었다. 예언서에 대한 성경적 배경 지식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되었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학문적 지식이 전혀 없는 까닭에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어려운 내용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배경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적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더 나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참고 끝까지 읽으니 예언서 형성과 예언자 등에 대한 조금의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예언서와 관련된 다른 신학 서적을 읽을 때 - 어떠한 책이든 여전히 읽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이 책을 읽을 때보다는 그나마 - 조금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생소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배경 지식을 쌓고 읽으면 이해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그처럼 이 책이 배경 지식 역할을 하여 다른 책은 - 여전히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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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출판 - 북페뎀 09
강주헌 외 21명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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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이란 무엇일까? 한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로 된 글로 옮기는 작업? 맞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정의이다. 번역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번역이란, 좁게는 '의미'를, 조금 더 나아가면 한 나라의 '문화'를 옮기는 작업이다. 광의(廣義)적으로는 '창작'이라고 한다.

 각 나라마다, 민족마다 문화와 정서 등이 다르다. 그것을 나타내는 표현법은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 비가 내린다고 하자. 나는 그것을 보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라고 표현을 했다. 영어로 옮겨보자. It is raining. 그렇다면 '추적추적'은? 그것과 의미가 정확히 맞는 영어 단어는 없다. 따라서 그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영어 표현을 찾아야 한다. 의역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번역은 창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번역은 상당히 고된 작업이다. 위와 같은 일로 인해 과중한 지적 노동이 이루어지고, 종일 앉아서 해야 하기에 육체 노동까지 병행된다. 그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대접은 여전히 변변치 않다. 이웃 나라 일본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일본은 근대화와 함께 번역을 큰 과업으로 삼았다. 덕분에 오늘날 일본의 번역 수준은 상당히 높고, 번역작가들에 대한 대우와 인식도 좋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두 수준이 낮다. 그로 인해 번역에 대한 교육과 정보가 빈약하다. 물론 몇몇 대학과 학원 등을 통해 그것이 보충 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책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격주간 잡지, '기획회의'에 계간인 '번역출판'의 2008년 분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더불에 '북페뎀'이라는 '출판 전문 무크지'의 9호로 출간된 단행본이다. 물론 그렇다고 '번역출판'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고, 이 책의 기획에 맞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 구성을 보자.

 구성은 총 5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번역의 의의, 2부는 번역출판의 현재, 3부는 번역가의 출판기획 경험기, 4부는 번역, 나는 이렇게 한다, 마지막 5부는 번역은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글이 에세이 형식이라 딱딱하지 않다.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본인은 번역에 매우 관심이 있는지라 읽기 전에 많은 정보를 얻길 바랐고, 그럴 것이라 기대 했다. 하지만 막상 첫 장을 펼치니 내용 형식이 기대 했던 바와 달라서 - 설명문일 줄 알았다. - 과연 이 책을 통해 기대 했던 것들을 얻을 수 있을까? 의심과 실망이 들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속단은 금물! 그래서 끝까지 읽었고, 역시나 기대 했던 대로 많은 것을 얻고, 생각할 수 있었다.

 번역에 관심이 있는 이가 이 책을 집어 든다면, 그 이유는 아마 나와 같이 번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원하는 정보를 속시원히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번역가로 데뷔하는 방법, 번역가의 수입, 일감 구하는 법, 번역하는 노하우, 번역을 하기 위한 공부 등과 같은 실용적 정보는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할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책에 담긴 글들은 대부분 에세이 형식이기에 그러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다. 정보들이 각각의 글에 산발적으로 조금씩 녹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속시원히 얻지는 못할 것이다. 일부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보다 더 값진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번역작가들이 번역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나 애환 등 번역작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  어쩌면 위에서 말한 정보보다는 더 현실적이고, 유용한 정보 -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것들은 번역작가 지망생들이 원하는 실용 정보보다 더 값진 정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진다.

 

 세상에 고충이 없고,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 어떠한 일이든 일 그 자체는 힘들다. 다만 그것을 자신이 즐기며 할 수 있느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냐에 따라 그 일을 하는 게 힘든지, 즐거운 지가 결정될 것이다. 번역 또한 마찬가지다. 원하는 만큼의 수입을 거두기 위해서는 다른 일과 마찬기지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수입의 유지가 아니라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도 노력은 필요하다. 일감을 얻는 게 때론 치사하고, 아니꼬우며 비굴하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일이 고되지만 번역작가들이 그것들을 감내하는 것은 번역 그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 이 책에 그 마음이 잘 드러난다. - 수입이 얼마나 되든 - 물론 기본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수입이 적으면 당장 그만 두겠지만 - 일이 얼마나 힘들든 그것을 계속 하는 것은 그 일을 어떻게 시작 했든 결국에는 일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번역작가가 되어 이 일이 즐겁기 때문에 하노라고 고백 하는 나를 머리 속으로 항상 그려본다.  훗날 언젠가 그 고백을 실제로 하는 나를 보게 될 것을 바라고, 그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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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전호태.장연희 지음 / 소와당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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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세계적 이슈가 되었다. 침공의 표면적인 이유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계속 테러 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테러 한 이유는 자신들 주위에 분리 장벽을 세우는 등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있는 데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그 문제의 근원은 이스라엘 건국에 있다. 

 2천년 가까이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던 이스라엘이 1948년, 지중해 동쪽에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 복판, 자신들의 조상들이 고대에 살던 땅에 나라를 세운다. 그 건국 과정이 상당히 어이가 없으나 어쨌든 마침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문제는 자신들이 그 땅에서 (로마에 의해) 살지 못하게 된 시간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정주민이 있었다는 데 있다. 팔레스타인 민족이 그들이다.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잘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한 쪽 구석으로 몰고, 급기야 분리 장벽까지 세운다. 하루 아침에 또 다른 떠돌이가 될 판에 팔레스타인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은 중동의 화약고라고 불린다. 중동의 정세를 잘 반영하는 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비롯한 중동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수천 년 역사를 더듬어 가야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골이 매우 깊게 패여 있다. 그 문제의 중심에는 현대에나 고대에나 이스라엘이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알면 오늘날 중동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문제의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를 잘 정리 해 주고 있다.

 

 중동 전문가가 아닌 이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정리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독특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대로 정리 했을까 염려가 되었다. 이 책은 두 저자(전호태, 장연희)가 교회에서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도 알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40회 분량으로 기획된 글이었다. 그런 것이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교회에서 사용하려던 글이기에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라 이야기가 진행 된다.

 이야기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하기 바로 전, 요한이 메시아 운동을 펼치는 시점에서 끝을 맺는다. 성경의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 되고, 그 사이사이에 매우 흥미로운 중근동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 이야기 등이 첨가 되어 있다. 역사의 기본적인 해석은 기독교 신학의 해석을 따르고 있으나 이따금 두 저자만의 시각으로 해석된 부분도 있다. 그것이 신학적 해석과 크게 어긋나지는 아니지만 조금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기에 신학적 해석에 대해 잘 모르는 이는 모든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 할 것을 당부한다. 단점은 그 정도이고, - 사실 그 단점이 기독교에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 그 외에는 문제될 부분이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분량의 한계와 저자의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해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하거나 생략된 역사가 상당 부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에 문제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책은 기독교 신자나 비신자가 고대 이스라엘과 중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전체적으로 보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무 하나하나는 볼 수 없지만 숲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많은 주석과 그림이 삽입되어 있어 읽는 동안 집중력만 잃지 않는다면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나라 못지 않게 방대하기에 그것을 한 눈에 다 들여다 보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때문에 나도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비록 이 책을 통해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볼 수 없었지만 숲을 봤기에 다른 책을 통해 나무를 들여다 보면 될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저자들의 조금은 다른 해석이 눈에 띄기도 하였고, 그들의 해석과 설명으로 역사를 넓게 보는 방법을 조금 익힐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은 것은 나에게는 큰 소득이다.

  

 이스라엘만큼 특이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수천 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닌 사실만으로도 전래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외에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똘똘 뭉쳤고, 나라가 없음에도 암암리아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 단번에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참으로 강하고, 무서운 민족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어이가 없는 민족이다. 2천년을 나라 없는 설움을 겪었기에 주권 없는 아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텐데 다른 민족을 자신들의 처지와 같게 만들려는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이 민족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들과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해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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