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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토피아 - 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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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안정적인 상태와 불안정한 상태를 번갈아 오간다. 안정적인 상태가 지속되다가도 이내 불안정한 상태로 접어든다. 불안정한 상태가 길어지지만, 곧이어 안정적인 상태로 돌입한다. 세상은 한쪽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정적인 시기에는 사회가 점점 불안정해지면 부정적인 암흑세계가 도래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 안정적인 상태가 깨지고 디스토피아로 접어들까봐 불안해한다. 반대로 암흑 시대에는 이상향을 꿈꾼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길어지면 유토피아를 꿈꾼다. 어서 안정적인 상황이 찾아오길 염원한다. 세상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레트로토피아』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바우만이 흥미로운 책을 썼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뜻하는 『레트로토피아』에서 그는 현대 사회의 모든 단계에서 과거로의 회귀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 이 네 방향에서 과거로의 회귀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어렵게 느껴졌다. 사회학 분야에 관심은 있지만, 기초지식이 부족하여 읽다가 여러 번 방향을 잃었다. 어쨌든 과거를 유토피아로 삼으려 하는 사회현상에 대한 바우만의 분석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불안정한 미래를 그리기보다 안정적이었던 과거를 회상하길 더 좋아한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보다는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상하거나 돌아가는 게 더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국가 또한 과거로의 회귀를 은근히 바라곤 한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반감이 덜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브렉시트'가 가 단적인 예가 아닐까?

과거로의 회귀는 유토피아행이 아니라 디스토피아행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는 돌아가야 할 지점이 아니다. 그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것이다. 문화적으로야 레트로, 복고가 쓸모 있고 결국 다시 유행하지만, 사회적으로 복고는 결코 아름다운 노스텔지어가 될 수 없다. 법이 제구실을 하지 않으니 삼청교육대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혹자의 주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 식의 국가의 강력한 통제로 한편으로는 범죄의 최소화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 유린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도 발생하게 된다. 과거로의 회귀는 결코 좋은 사회적 대안이 아니다. 다양한 사회 문제를 보다 유익한 방향으로 해결하고 사회를 보다 진보시키려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유토피아를 꿈꾸고 만들어 가는 게 낫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꾸었을 때 진보했다. 

바우만은 세계적인 석학답게, 유작이라는 아쉽고 명예로운 타이틀이 걸린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해 준다. 다소 어렵게 느껴졌지만,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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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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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의 가치는 역사성에 있다. 시대가 변하여도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고전은 배경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으로 인해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 가치는 그것이 꼭 필요한 자만의 전유물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유명한 고전의 하나로 막스 베버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논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서구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기원을 찾는다. 그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소명의식과 노동을 연결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소명의식에 의한 노동이 자본주의 발달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흥미로운 역사 해석이 돋보이는 책이다.



 모든 사상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모든 사상은 시대의 변혁을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게 마련이다. 그 가치를 잃고, 더 이상 쓸모없는 퇴물이 된다. 자본주의의 시작을 프로테스탄트의 소명의식과 그로 인한 신성한 노동이라고 보는 베버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가 아니다. 작금의 자본주의의 목표는 노동, 곧 금욕적 직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를 지배하고 있는 돈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시초에서 많이 멀어졌다. 이제 자본주의의 최고 목표는 더 많은 돈의 획득이다. 돈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 돈은 권력이고, 황금률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돈에 의해 움직이고, 돈을 따라 형성된다. 한 사람의 성공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 받고 있고, 그것이 적은 사람은 실패자로 취급 받는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돈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그것은 창조주를 넘어서는 절대 우상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변질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단순히 시대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관점에서 봐야 할까? 아니면 또 다른 변혁을 추구해야 할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몰락을 가져오는 또 다른 사상(혹은 시스템)이 등장할지, 자본주의가 다른 옷을 입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현재에 충실 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단 돈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본래 정신이 무척 그리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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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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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의식과 사고 등 인간 본성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철학에서 말하는 영혼일까? 아니면 과학에서 이야기 하는 유전자일까?

 

 고대부터 근대까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고찰했다. 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신이 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철학에서는 영혼과 정신에서 인간 본성의 유래를 찾았다. 하지만 과학이 더 이상 신학의 시녀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현대에 첨단 과학의 시대를 구가하게 되면서부터 그러한 관점들은 낡고,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현미경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없는 원자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DNA 의 구조가 점점 밝혀짐에 따라 인간 존재를 과학적 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지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이 책에서 사회 생물학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적 분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의 근원을 찾는다. 기존의 철학 및 신학적 관점을 과학적 관점으로 대체하여 인간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유전적 진화, 유전자가 생물의 행동에 과 진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분석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공격성', '성', '종교', '희망' 이렇게 네 가지 관점에서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행동과 본성의 근원을 추적한다. 월슨은 생물의 행동 및 진화, 인간의 본성을 유전자에서 찾는다. 따라서 기존의 탐구 방식에 익숙한 이는 심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반면 새로운 방식을 갈망하던 이라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월슨의 탐구 방법은 아직은 낡은 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도에 불과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지금의 과학적 분석을 대체하는 또 다른 방법이 언젠가 등장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의 노력에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본성을 유전자에서 찾는 오늘날의 과학적 분석은 새 시대의 부산물이다. 이 시대의 유행하는 방식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시대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신 혹은 영혼과 정신에서 찾았다. 그것은 신학과 철학의 부산물이었다. 이렇듯 시대마다 지배하는 관념과 방식에 따라 인간을 다르게 정의 했고, 그 본성의 근원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배적 주장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단지 새 시대의 부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영혼? 유전자?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다. 영원히 밝혀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본성의 근원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시도는 계속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시작과 끝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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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 전쟁편
류펑 지음, 김문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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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인류는 왜 그렇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대개 권력, 민족, 영토, 종교 등이 그 주된 원인이다. 

 이 책은 인류의 운명을 바꾼 주요 전쟁들을 소개하고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기술하고 있다. 전쟁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그 각각의 발생 원인, 전개, 결말을 상술한다. 이 책의 장점은 전쟁들을 주제별로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원인은 한번에 파악할 수 있다. 반면 아쉬운 점은 책의 내용이 전쟁사에 대한 사실 진술로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 대한 저자만의 의견이나 다른 코멘트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전쟁은 왜 일어난다는 종합적 결론이나, 전쟁은 왜 일어나면 안 된다는 등의 저자만의 의견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책에 담긴 전쟁에 대한 사실들은 인터넷에서도 얻을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앞서도 말했지만 전쟁의 원인은 권력, 민족, 영토, 종교 등 매우 다양한 이유로 일어난다. 왕가의 집안싸움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민족적 대립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원인이야 어떻든 그것은 매우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사람의 귀한 목숨을 앗아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헤어지게 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한 정신적 충격은 물론이고, 신체적 고통을 당한다. 경제적 손실도 생긴다. 그럼에도 인류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 폐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혹자는 말한다. 전쟁은 남자들의 야욕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남자들이 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남자의 독특한 공격성으로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전쟁은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고, 불행이다.

 전쟁이 완전히 종식될 수 있을까? 섣부른 추측이 될지 모르겠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아마도 그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지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쟁 종식을 포기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최대한 전쟁을 줄여야 한다. 비참한 그것을 멈출 수 없다면 줄여야 함이 마땅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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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 - 세상을 바꾸는 힘, 비폭력 직접행동
박현주 지음 / 검둥소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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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참으로 무서운 것은 폭력이다. 누구나 맞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맞으면 아프기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비폭력이다. 그것은 때리고 싶은 욕망과 맞는 두려움을 모두 이겨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최초 폭력자에 꼬투리만 준다. 하지만 비폭력은 실행하기 어렵지만 매우 현명한 방법이다. 도리어 최초 폭력자의 꼬투리를 잡는다.  

 역사상 가장 눈에 띄고 두고두고 화제가 되는, 대표적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것이 아닐까 싶다. 두 사람에 의한 그 운동은 폭력자에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일관한 운동이다. 간디의 그것은 종교 갈등 해결과 인도 신분제 철폐, 그리고 인도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고, 마틴 목사의 그것은 미국 흑인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공권력에 아무런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맞섰다.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운 저항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둘 모두 암살 되었기 때문이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대명사는 가히 그린피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를 반대하고, 자연수호 운동을 펼치는 그들은 국제적 단체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연파괴에 비폭력으로 맞서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에 죽어가는 수많은 동식물,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피나는 노력에 많은 결실을 맺었고, 그들은 계속 노력하고 있다. 

 누구나 바른 말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바른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굉장히 큰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의 말에 누군가 폭력으로 맞선다면 더더욱 말을 지키기 어렵다. 따라서 바른 말을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며 어떠한 상황에도 비폭력으로 그것들을 일관하는 이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하는 양심' 이 책에는 그러한 이들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그린피스, 간디, 프리덤 라이더스, 치코 멘데스 등 잘못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작지만 큰 비폭력 직접행동을 한 양심들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무기력하게 보이는 비폭력 행동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된다. 미련해 보이는 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지 느끼게 된다. 힘을 쓰는 것보다 힘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힘이 있는 행동인지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힘이 다가 아님을 보게 된다. 

 고대, 중세, 근대에는 양심의 행동은 죄악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잘못된 힘에 맞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분명히 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것에 맞서 서슴 없이 용기를 발휘한다. 보다 평화로운 세상, 옳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폭력으로 세상을 망가뜨리는 이들의 시도는 끊임이 없다. 세상을 계속, 그리고 더욱 파괴하고 있다. 그런데 비폭력으로 세상을 지키는 이들의 노력 또한 만만치 않다. 그들은 폭력에 더욱 비폭력으로 맞선다. 약해 보이지만 더욱 큰 양심의 행동으로 세상을 지킨다. 그들의 목소리가 있는 한, 그들의 양심의 용기가 유지되는 한 세상은 희망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양심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나도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강건너 불 구경하듯 하면 결국 비폭력자들은 힘을 잃고, 폭력자에 세상을 내주어 함께 공멸하고 말 것이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양심이 더욱 많아지도록 가르치고, 도와야 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그것에 동참해야 한다. 나부터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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