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들의 공통점은 뭘까. 그냥 내가 요즘 읽은 책들인데, 특이하게도 저자들 모두 육친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는 점이 공통점이라면 너무 논리적 비약이 있을까.

 

뒤늦게 '박준' 시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운다고~'를 아주 괜찮게 읽었다. 시집도 찾아 읽고 있는 중인데 시집보다는 이십만부가 팔렸다는 '운다고~'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의 그림도 좋고. 20만부 특별판과 원래 책과 그림이 다르긴 한데 화가는 같은 사람이었다. 시와 에세이가 섞여있는 형식이 주효했던 것 같다. 에세이에 더 특화된 시인 같기도 하고. 박준은 책에서 누나를 잃었다고 몇 번 언급을 한다. 대놓고 넋두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마음 아팠다.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마지막 페이지에 (1981-2008)로 되어있는 여인의 뒷모습 사진이 실려있다. 아마도 그의누나가 아닐까 짐작이 되는데. 연이어 허수경 시인의 발문이 더 슬펐다. 허수경 시인도 고인이 되었기에.

 

요조의 책은 '아무튼, 떡볶이'이후 두번째인데 주로 '책방무사'와 관련된 이야기이고 '동생을 잃었다' 정도의 언급만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슬픔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그 경험으로 인해 그의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왜 이리 다들 육친의 죽음을 경험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들은 젊은데 왜 다들 형제의 죽음을 경험했을까. 안타까웠다.

 

유병록은 몰랐던 시인인데 도서관에서 떠돌다가 보게 된 책. 이 책은 어린 아들을 잃고 쓴 아버지의 '아들을 잃고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결이 곱고 섬세한 시인이 어린 아들을 잃었으니 그 슬픔은 비유할 곳이 없을 것이다. 아이를 다시 낳아 키울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 살짝 나오는데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조언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다시 키우고 싶은지, 왜 그럴 자신이 없는지도 다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조부모의 죽음, 부모의 죽음, 형제의 죽음, 자식의 죽음. 육친의 죽음 중 가장 슬픈 것은 무엇일까. 죽음으로 인한 슬픔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 않지만 그래도 자식의 죽음이라고들 말한다. 그래서 자식이 죽으면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들 한다. 혹자는 고인과 함께한 세월에 비례한다고 하기도 한다. 다 맞는 말이지만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는 말이 제일 옳겠지. 다른 어떤 죽음보다 '내' 육친의 죽음이 '나'에게 가장 슬픈 것이겠지. 유병록의 슬픔은 참으로 처절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래도 시인이라 이렇게 글로 슬픔을 토로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것인데, 그런데 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거의 전부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육친의 죽음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날씨가 쌀쌀해져서인가 그들의 슬픔들이 새삼 사무친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지만, '메멘토 모리'라지만 '살아남은 자는 슬플' 뿐이다. 박준의 시에서처럼 다시 태어나서 내가 그들보다 먼저 죽어 그들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게 해주고 싶을 정도로. 유병록 시인처럼 아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세끼를 꾸역꾸역 챙겨먹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살아남은 자'들이기에. 슬픔은 오롯이 우리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기에. 살아있기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기에.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은 꾸역꾸역 입에 밥을 넣고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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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말콤 글래드웰의 책을 읽게 되었다. 욕하면서 계속 읽기 도전이라도 되는지. 하지만 전에도 언급했듯이 내가 주변에서 구하기에 가장 쉬운 원서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말콤 미안) 하지만 역시나 그의 문체는 가독성이 있다. 특히나 이 책에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2008년 출간이니 12년이나 지났지만 다행히도 아직 유효한 내용이 많은 듯하다. 물론 이 책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만 시간의 법칙'이 이미 많이 공격받긴 했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이 만 시간 노력을 하면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다 이루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두 살 때부터 게임에 몰입하는 수많은 한국의 아이들이 이미 모두 전문가가 되어 있을 터. 알려져 있듯이 에디슨의 99퍼센트의 노력보다는 남달랐던 그 1퍼센트가 무엇인가에 더 매진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99퍼센트의 노력없이 1퍼센트만으로 뭔가를 해 봐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어려운 이야기.

 

대한항공 괌 여객기 사건부터 한중일을 비롯한 논농사를 하는 동남아 국가 국민들의 성실성에 대한 이야기, 한자문화권에서 숫자를 읽는 방법부터가 수학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다 들어가 있다는 언급 (그래서 아시아권 학생들이 구구단을 일찍 빨리 외울 수 있다. 심지어 19단까지.) 등등.

 

그래서인지 우리는 한국학생들의 수학 실력에 거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평균에는 맹점이 있다. 엘리트 수학에서는 특히나 기계적인 연산 말고 원리를 묻는 수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큰 자부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리터러시도 마찬가지다.

 

김영민 교수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훈민정음의 우수함으로  문맹률 최저를 자랑하는 우리이지만 어느 정도 수준있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가를 테스트해보면 그 수치는 절망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낮다는 것. 우리 엘리트들의 수준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다는 것. 앵무새처럼 외우는 구구단과 글자 단순 판독 가능성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말그대로 그것은 기본이기만 해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우리의 지성들은 그런 면에서 수준이 생각보다 아니 기대보다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는 그 반대인 듯하다. 전체 국민을 놓고 보면 평균이 매우 낮은 것처럼 보이지만 상위 그룹의 능력을 따져보면 월등히 높다. 그래서 그 힘에 의해 그들의 나라가 망할 듯 망할 듯 망하지 않고, 이 현재의 문화와 문명을 일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원서를 읽어도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는 법인데, 어김없이  PDI(Power Distance Index ) 이야기가 나왔다. Power Distance is concerned with attitudes toward hierarchy, specifically with how much a particular culture values and respects authority.  우리의 이 수치가 브라질 다음으로 높다는 것. 4위는 멕시코, 5위는 필리핀. 이것때문에 하위직이 상사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일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거나 개진하지 못해서 항공기 추락사고가 났고 그래서 대한항공은 기내 공용어를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꾸면서 문제 상황을 해결했다는 일화가 소개된다. 고단한 상사가 애매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소위 아랫 사람은 아무 건의도 못 하고 어영부영 하다가 사고가 나게 되었다는 일련의 과정들을 읽어나가면서 너무나 공감이 되기도 하면서 너무나 속이 상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한국인이라면 무슨 상황인지 다들 짐작이 갈 것 같은데 그래서 소위 '90년대생'들은 공시족을 자처한다고 한다.

 

그놈의 상명하복 때문에. 그놈의 갑질채용 때문에.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멕시코 다음으로 우리가 제일 많은 것이 주당 근무시간이란다. 이 상황은 주당 근무시간이 최근 줄어들면서 좀 나아진 듯도 한데 멕시코 다음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멕시코는 PDI도 높았는데 주당 근무시간도 많고 우리랑 정말 비슷하구나 싶었다. 남하한 엘에이 갱들이 형성한 마약 카르텔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는 그 멕시코 말이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이야기들이었는데 이것이 내가 문득문득 아웃라이어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들이다.

 

이 책도 아직까지도 의미가 생생한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책도 아니었다. 아직도 이런 일화들이 우리에게 의미있게 다가온다는 것이 왠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나 말콤의 억지 아닌 억지에 끌려다니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물 흐르듯 읽어내려가는 책도 좋지만 계속 읽기를 멈추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 더 좋은 책인 것이겠지. 그럼 또 말콤 책을 읽는다는 것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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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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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정통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엄밀히 말하면 청소년용 성장소설이겠지만 어른들도 성장 중이므로 어른에게도 필요한 장르이다. 96년생 작가에게서 이런 깊이의 소설이 나오다니 놀랍다. 소설의 작법을 제대로 구사한 듯하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좋은 성장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인 것 같다. 


좋은 소설이 되려면 어떤 요소가 필수적일까. 플롯, 핍진성, 개연성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인물들의 생동감과 뚜렷한 캐릭터도 꼽을 수 있겠다. 인물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 말이다.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점을 다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형적이라는 말은 좋은 말도 되고 나쁜 말도 되는 양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좋은 면에서 전형적이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청소년 소설은 이렇게 쓰세요 하고 보여줘도 될 것 같은 샘플 같은 작품이다.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는 운명적인 것들과 싸우며 부딪치고 울고 웃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시리다. 어리기만 하다고, 아무 걱정없이, 아무 생각없이 사는 십대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내면은 이렇게들 복잡할 것이다. 그들이 알게 모르게. 어른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경험의 부족으로 모든 것이 처음이라 그토록 시린 것이겠지. 그럼에도 그들은 놀라운 유연성과 회복력으로 성장을 해 간다. 아름답다. 


+ 별 기대없이 읽었는데 감동받아서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다. 

++ 책날개에 있는 창비소설선 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창비소설선이라. 어느 한 권도 뺄 수가 없다. 다 좋다. 미처 다 못 읽은 두 권도 어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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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은 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작가가 누군가에게 했다는 넋두리( 늘 최민석은 농담을 진담처럼, 진담을 농담처럼 해서 헷갈린다. 이걸 노린 것일 수도 있고.)를 읽고 깜놀. 바로 내 얘기였다. 이 책도 무려 코로나 시대에 닫힌 지역도서관에서 낮 12시에 인터넷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아 12시 2분에 마감이 되는 무인예약을 신청해서 2-3일 기다린 끝에 받아본 책이었다. 나름 구매보다 어렵게 구한 책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하지만 작가에게는 이 사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지요. (알게 모르게 최민석 작가의 팬이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그의 수필은 꽤 읽은 것 같은데 소설은 하나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소장하고 있는 책은 한 권 뿐이다. 나는 무려 열 권이나 책을 낸 소설가라고 늘 말하는 최민석 작가의 말이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참고로 나에게 책은 소장품이 아니라 거의 물물교환 수준의 물품이다. 그래서 한 번 읽은 책은 그냥 다른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기꺼이 바꾸어 버리는,  책에 대한 소장욕이 없어 책을 거의 구매해서 보지 않거나 구매해도(은근 독서계 얼리어답터. 신간 애독자.) 곧장 중고로 팔아넘겨 오직 새로운 책을 읽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암튼 이러한 사연으로 내게 온 책. 붙잡자 마자 다 읽고 싶어지기도 하고 조금씩 아껴 읽고 싶어 지기도 하는 책이었다. 거기다 책 표지는 영화 <해피 투게더>에서 양조위가 웨이터로 일했던 바(Bar) '수르(Sur)'에서 글쓰는 작가 최민석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파랑 바탕, 사진도 많고 지도도 있고 예뻤다. 가격도 17000원이라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책이다. 얇고 사진이 없어도 15000원은 거뜬히 넘어버리는 요즘인데 말이다. 


'베를린 일기'가 나의 최민석 작가 덕후 입문기였기에 그의 새 여행 에세이는 정말 기대되었다. 그의 '베를린일기'가 비록 석 달간의 이국에서의 경험을 쓴 것이지만, 이방인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어서 뭔가 내가 이해받는 느낌이 들어서 더 몰입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남미라니. 남미는 내게 범접 금지의 공간이었다. 늘 들려오는 이야기는 캔쿤(유명한 관광지로 그나마 제일 안전하다고 여겨지던)도 이제 안전하지 않다, 캔쿤에서도 미국인 관광객이 실종되었다 등등. 특히 멕시코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루에 몇 명이나 살해되는지,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저격당하는지 - 결탁한 카르텔의 배반이나 결탁한 카르텔과 적대적인 카르텔의 총격에 스러지는 수 천명의 정치인들. 결국 정치인들은 특히 시장은 카르텔과 결탁하든 말든 누군가의 총격에 죽을 운명이라는 것 - 인신매매와 카르텔과 마약의 악순환..멕시코시티와 그외 한 두 개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등교하다가 아이들이 총 맞아 죽는 곳. 그곳이 바로 멕시코였다. 게다가 내게는 미국 대도시를 아주 안전한 도시로 여기고, 늘 누군가에게 뺏길 현금만 가지고 다닌다면 문제없다는 식으로 말하던 멕시칸 친구도 있었다. 여기에 멕시코 미국 간 국경 이야기까지 하면 끔찍한 이야기들만 나온다. 정말 내게는 너무나 먼 나라들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이 살 때도. 실제로 작가가 다녀간 멕시코 시티의 여기저기도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그 곳에도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상점을 지키고 있더란다. 그래서 안전하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작가의 언급대로 총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그곳이 안전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겠지. 실제로 그가 멕시코에서 쓴 신용카드가 도용되어 수십차례 사용되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만 거의 반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엄밀히 말하면 멕시코는 중미이니 중미는 그렇다치고. 남미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은 엄청난 빈부격차가 아닐까 싶은데 이런 곳을 40일만에 일주를 한다니. 또 땅덩이는 얼마나 넓은가. 아르헨티나만 해도 초원이 남한의 열배이상이고 남한의 인구보다 많은 육천만 마리의 소를 키운다는데. 실로 어머어마한 규모이다. 그런데 그런 미지의 무지의 대륙을 그것도 국제호구로 손해를 잘 보는 하지만 또 그것을 나름의 유머로 승화하는 촌철살인 유머의 소유자 최민석 작가가. 읽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정도였다. 


'베를린 일기'에서는 정말 고독한 싱글 냄새가 풀풀 났는데 이제는 아들도 있는 아빠가 되어서인지 고독이 뚝뚝 묻어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들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났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오히려 두 군데 정도밖에 언급이 없었지만 묘하게도 전반적인 느낌이 절대 고독의 느낌은 아니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 이래서 가족이 필요한 건가 싶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작가가 의도했던 것은 전혀 아니겠지만. 행동 양태는 그만의 특유한 행동양태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 여행하면 보이는 그만의 대실수잔치들. 하지만 여행자라면 그것도 아주 낯선 곳으로, 여행자들이 잘 안 다니는 곳만 골라다니다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알고보니 민석의 민자가 예민할 민으로 여겨질 정도로 예민해서 여행이 맞지 않는 사람같았는데 '50개국 남짓 200여 도시를 다녀본' 최민석이라니 놀라울 뿐이었다. 배탈, 설사에 고산병에 감기에 각종 불편함을 감수해야하고 의사소통의 불편함에 바가지도 써야 하고. 거기다 음식은 맛이 없고 커피도 다 좋은 건 다 수출해서 맛이 없었다니, 여행이 아무리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지만 이 정도면 가히 극기체험이나 그가 말한 대로 해병대 체험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영어로 소통이 되고 그외에 다른 외국어를 배우려는 시도를 많이 했던 그야말로 열린 사람이라 위험한 남미여행이라도 잘 해내리라 싶었는데 역시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프고, 낯설고, 신기하고, 불편한 것. 하지만 때가 되면 떠나고 싶은 것. 이게 여행의 본질이다.'라고 외치며 배탈과 고독과 싸우며 여행일정을 소화하는 그. 그러면서도 섣불리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여행자의 시각에서 비판하거나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놓고 관광자 모드도 아니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더 진중하게 다가왔다. 


'발파라이소의 생활이, 아니 타국에서의 이방인의 삶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줄곧 여행을 동경했지만, 항상 여행을 가면 또 집을 그리워하니 말이다. 어찌 보면, 삶의 모든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오라를 뿜뿜 하다가도 'Mean Suck?(비열하고 엉망이야?)로 오해받느니 차라리  '민숙 초이'로 불려 여자로 오해받는 게 낫다'는 식의 유머를 쏴버리면 속수무책 웃을 수 밖에 없다. 민숙 초이도 여권 이름을 민숙으로 잘 못 써 그렇게 됐다니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문장이 많이 나오는데 정말 이 유머는 최민석만의 독자적 웃음 코드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이번 책은 웃음 제조기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많이 웃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읽으면서 내내 과연 최민석 문체란 것이 뭘까를 생각했다. 거의 독보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빌 브라이슨 같기도 하고 뭔가 더 어벙한 것 같기도 하면서 더 날카로운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농담이나 지껄이는 것 같은데 읽다보면 또 나름 진지하고 엄청나게 대강대강 일필휘지로 글을 쓰는 것 같으면서도 치밀하게 계산해서 쓰는 것 같기도 한. 정말 특이한 작가인 것 같다는 결론에. (작가님 만족하십니까? 물론 개의치 않으시겠지만요.) 정말 작가가 경험한 대로 경험했다면 눈물을 펑펑 쏟았을 것 같은데 그의 서술대로 따라 읽어내려가 보면 어느새 눈물이 마르고 웃게 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극한 체험도 웃음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초''능력자' 최민석이라고 할 수 밖에. 


그의 수필은 '피츠제럴드' 빼고는 다 읽어본 것 같은데(최근작이 한 두권 더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 다작 작가.) 그의 소설은 아직 안 읽어보았다. 왠지 내 선입견으로는 최민석 작가는 소설보다는 수필에 더 특화된 작가인 것 같아서다. 물론 그의 과감한 언급 - 에세이를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을 고려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수필은 정말 좋은데 소설로 실망을 많이 했던 작가들이 몇 있어서 최민석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좀 많이 궁금해져서 은근슬쩍 읽어볼까 싶기도 하다. '피츠제럴드'도 팟캐스트에서 듣기만 하고 읽지 않았는데 내가 여러 번 읽은 정말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인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에게 실망할까봐 안 읽은 것인데 이제는 믿고 읽는 최민석 작가의 책이니 과감하게 용기를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보니 소심한 겁쟁이인 나를 여러 모로 용기내게 해주는 작가가 (적어도 나에게는) 바로 최민석 작가가 아닌가 싶다. 최 작가는 중학교 수학 경시대회 시 대표였고, 부산 해운대 출신이고, 대학 때 전공은 문학과는 관련없는 전공을 했고, 대학생 때 미시시피 주로 일년간 교환학생을 다녀와 미국 남부의 그 촌스러움을 잘 알고, 절대 잘리지 않는 직장, 그것도 볼리비아와 케냐로 출장을 보내는 직장에 다니다가 십년전에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의 사이가 그다지 가깝지 않고 다 커서 다시 만나 몇 년 살게 되었고. 고모 밑에서 자랐고. 아버지의 빚을 갚아드렸고, 한 때 마포에 산 적이 있으며, 지금은 방송과 강의와 각종 원고 마감으로 바쁘며 뉴욕으로 출장가는 아내와 교대해서 돌봐야 하는 어린 아들이 있다는 정도로 그의 덕후는 그를 알아가고 있다. 몇 년 전 - 베를린 일기 쓰기 전-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겨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며 다행히 이제 다 회복했다는 정도. 거기에 50여개국 200개 도시를 다녔고, 영어를 하고, 스패니쉬, 이탤리언 등등을 배우려고 시도했던 사람. 달리기를 좋아하고 생선을 좋아하며 장트러블이 잘 생기는 사람. (작가님. 사실과 다른 게 혹시 있을까요?) 이렇게 에세이를 읽으며 한 작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 특히 수필읽기를 좋아하는 독자의 재미가 아닐까 싶다. 


강원도를 여행하는 와중에 틈틈히 읽었는데 묘하게도 내 여행일정이 끝남과 동시에 이 책도 다 읽게 되어 남미 여행과 강원도 여행이 동시에 완결되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됐다. 이것이 여행기를 읽는 묘미였단 말인가. 


감사하다. 이 계절의 아름다움과 강원도의 아름다움과 이 여행기의 아름다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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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일기'로 알게 된 최민석 작가. 에세이를 쓰기 위해 소설가로 데뷔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최근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고는 한다.) 에세이란 인지도가 중요해서 소설가로 데뷔한 뒤에 그 유명세를 타고 쉬어가며 쓰는 이야기 정도로 여겨지기에 그의 솔직한 고백이 이해가 갔다. 


우연히 타지에서 '베를린 일기' 샘플을 읽게 되어 목이 빠지도록 전자책 출간을 기다렸으나 전자책은 영영 출간되지 않았고 결국 귀국하자마자 읽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그 이후로 에세이들을 찾아 읽다가 발견한 책. 그의 전작들을 재출간한 것이라는데 재출간이라는 것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나이지만(작가도 그런 것 같다.) 재출간이 더 성공적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꽈배기의 맛'을 먼저 읽으면서 중간 쯤에 좀 지루해지는 부분이 있어서(작가님 죄송) '멋'은 읽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가 역시나 중고서점에서 '멋'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사버리고 말았다. 이 책을 사온 나를 보고 지인이 옆에서 '이제 이 작가 책 안 읽는다면서.' 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멋'을 안 읽는다했지. 근데 발견해버려서 다 읽어버려야겠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었다고 솔직히 고백. 그런데 '맛'보다 '멋'이 더 재미있어서 다시 그의 유머에 풍덩. '멋' 책 표지처럼 배부르게 먹은 후 어딘가에 기대어서 편안히 읽은 것은 아니고, 지하철에서 출퇴근길에 읽었지만 덕분에 단조롭고 반복적인 내 일상의 한 줌의 단비가 되어주었다. 


'베를린 일기'이후 국제호구, 죄민석 등으로 알려진 그가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아빠도 되었다니 반가웠다. (독신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그의 문체는 정말 독특하고 그의 유모는 촌철살인이라 뭔가 허당같으면서도 알고보면 상당히 치밀하게 쓰여진 글들이라는 깨달음이 온다.(그런 거 없다고 손을 내젓는 작가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 그의 글들을 읽노라면 특유의 멋에 빠져들게 되고 만다.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대목도 있고. 공감가는 대목도 있다. 뭔가 특유의 껄렁거림이 있는데 그게 좋다. 무게잡지 않아서. 


특히나 '멋'에서 '빌려쓰는 삶'이 마음에 들었다. '과연 소유란 무엇이고 대여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돈이 무엇인지 그냥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클릭 몇 번만 하면 돈이 들어오고 나가고 결재가 이루어지는 걸 보면 더 그렇다. 백세인생은 그러니 '백 년 동안의 대여'란다. 이러니 따라 웃을 수 밖에. 천상병의 '이 세상 소풍'과 같은 처연함이 아니라 '백년대여'라니 귀엽지 않은가. 기발하기도 하고. 


+ 어느새 그의 마니아가 되어 그의 저서들을 뒤적여 보다가 최근에 남미 여행기를 출간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지역 도서관에서 무인예약을 해놓고 기다리는 중인데 좀 설렌다. 역시 최민석 작가답게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막차를 타고 남미 여행기를 썼다는 데에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베를린일기'도 재미있었는데 남미 여행기는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세계일주가 꿈이고 다녀본 나라가 무수히 많고 외국생활도 많이 해 본 작가라 아무래도 시야가 넓어서 좋다. 그리고 객지생활 오래 해 본 사람이 더 잘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있다. '멋'에서도 미국남부에서 일년 쯤 살았던 경험담을 이야기했는데 그 광경이 눈에 그려질 듯 했다. 특히나 그 트로트같다는 컨트리 뮤직에 대한 묘사는 압권. 청바지에 체크남방, 부츠, 카우보이 모자, 픽업트럭. 이 모든 것이 미국 중남부를 대표하는 문화다. 촌스러움의 극치이기도 하고. 작가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미국이라 하면, '영웅주의'와 자국우월주의에 휩싸인 멋므르고 맛 모르는 무식한 자식들'이라 떠올린다.'라고. 엘리트들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 많지만 보통 사람들에 국한한다면 정말 적확한 표현이다. 게다가 맛도 두 가지 밖에 모른다. 단맛과 짠맛. 


++그의 남미 여행기를 읽고 다시 한 번 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지척에 두고도 무서워서 가지 못했던 남미라서 더 기대된다. 남미는 가족여행으로는 정말 비추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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