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들의 공통점은 뭘까. 그냥 내가 요즘 읽은 책들인데, 특이하게도 저자들 모두 육친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는 점이 공통점이라면 너무 논리적 비약이 있을까.

 

뒤늦게 '박준' 시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운다고~'를 아주 괜찮게 읽었다. 시집도 찾아 읽고 있는 중인데 시집보다는 이십만부가 팔렸다는 '운다고~'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의 그림도 좋고. 20만부 특별판과 원래 책과 그림이 다르긴 한데 화가는 같은 사람이었다. 시와 에세이가 섞여있는 형식이 주효했던 것 같다. 에세이에 더 특화된 시인 같기도 하고. 박준은 책에서 누나를 잃었다고 몇 번 언급을 한다. 대놓고 넋두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마음 아팠다.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마지막 페이지에 (1981-2008)로 되어있는 여인의 뒷모습 사진이 실려있다. 아마도 그의누나가 아닐까 짐작이 되는데. 연이어 허수경 시인의 발문이 더 슬펐다. 허수경 시인도 고인이 되었기에.

 

요조의 책은 '아무튼, 떡볶이'이후 두번째인데 주로 '책방무사'와 관련된 이야기이고 '동생을 잃었다' 정도의 언급만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슬픔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그 경험으로 인해 그의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왜 이리 다들 육친의 죽음을 경험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들은 젊은데 왜 다들 형제의 죽음을 경험했을까. 안타까웠다.

 

유병록은 몰랐던 시인인데 도서관에서 떠돌다가 보게 된 책. 이 책은 어린 아들을 잃고 쓴 아버지의 '아들을 잃고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결이 곱고 섬세한 시인이 어린 아들을 잃었으니 그 슬픔은 비유할 곳이 없을 것이다. 아이를 다시 낳아 키울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 살짝 나오는데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조언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다시 키우고 싶은지, 왜 그럴 자신이 없는지도 다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조부모의 죽음, 부모의 죽음, 형제의 죽음, 자식의 죽음. 육친의 죽음 중 가장 슬픈 것은 무엇일까. 죽음으로 인한 슬픔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 않지만 그래도 자식의 죽음이라고들 말한다. 그래서 자식이 죽으면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들 한다. 혹자는 고인과 함께한 세월에 비례한다고 하기도 한다. 다 맞는 말이지만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는 말이 제일 옳겠지. 다른 어떤 죽음보다 '내' 육친의 죽음이 '나'에게 가장 슬픈 것이겠지. 유병록의 슬픔은 참으로 처절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래도 시인이라 이렇게 글로 슬픔을 토로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오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것인데, 그런데 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했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거의 전부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육친의 죽음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날씨가 쌀쌀해져서인가 그들의 슬픔들이 새삼 사무친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지만, '메멘토 모리'라지만 '살아남은 자는 슬플' 뿐이다. 박준의 시에서처럼 다시 태어나서 내가 그들보다 먼저 죽어 그들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게 해주고 싶을 정도로. 유병록 시인처럼 아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세끼를 꾸역꾸역 챙겨먹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살아남은 자'들이기에. 슬픔은 오롯이 우리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기에. 살아있기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기에.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은 꾸역꾸역 입에 밥을 넣고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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