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읽을수록 공감이 된다. 조금만 아파도 진통제를 찾고 리질리언스를 강조해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일어나는 불굴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는 서구 문명(과 그를 추종하는 모든 문명)에 대한 일침에 진정으로 공감이 되었다. 고통을 최대한 느끼지 않으려는 서구 문명에서 시작해 이제는 전세계적 차원의 현상이 된 ‘무고통‘추구가 인간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진정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한 책.
회복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트라우마의 경험을 성과 향상을 위한 촉매로 만든다. 심지어 트라우마 뒤에 오는 성장이라는 말까지 사용되고 있다. 영혼의 힘을 훈련한다는 회복력 트레이닝의 목표는 인간을 최대한 고통에 무감각하며 언제나 행복한 성과주체로 만드는 데 있다. - P11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고통 없는 삶을 일종의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생각하는 지구상 첫 번째 세대에 속할 것이다. 고통은 스캔들이다. - P12
고통을 주는 완두콩이 사라지면 인간은 부드러운 매트리스로 인해 고통받는다. 바로 삶의 지속적인 무의미함 그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 P42
나는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그 각각의 것들이 내게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고통의 이런 법칙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 및 세상 만물이 내게 지닌 가치를 온전히 결정한다....가짜뉴스와 딥페이크가 존재하는 탈사실적 시대에는 현실의 둔감성, 나아가 무감각성이 생겨난다. - P53
하루만 유효한 인스타 스토리에 스토리를 올리는 것으로 스토리텔링이라 믿는 스토리셀링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울리는 경종.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듣고 흘려버린 내용들이 있을까봐 종이책으로 한 번 더 읽었다. 아포리즘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유의미해 허투루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왜 외롭고 우울하고 불안한지 정확하게 짚어준다. 네트워킹은 연결되어있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감기가 우울증이 된 것이다. 한병철의 글은 시적이고 압축적이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일단 적응이 되면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며 읽게 된다. 그런데 분량이 길지 않아 휘리릭 읽어낼 수 있다는 장점까지. 그동안 몇 번 실패했었는데 이제 성공해서 뿌듯하다. 오디오북으로 듣고 종이책으로 다시 읽는 것도 종이책 완독의 문턱을 낮추는 방법이 되었다.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해야 겠다.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 즉 타자가 누구인가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 - P118
커져가는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우리에게서 접촉이 완전히 없어지면 우리는 스스로의 자아 속에 불치의 상태로 사로잡힌 채 잔류할 것이다. 접촉은 우리를 자아 안에서 밖으로 꺼내준다, 접촉의 빈곤은 결국 세계 빈곤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를 우울하고, 외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디지털화는 이러한 접촉의 결핍과 세계 빈곤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은 늘어가는 연결성이다. 여기에 바로 파멸적인 네트워킹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네트워킹되어 있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 P120
우리는 모두 어린이 시절을 지나왔으면서도 금방 그 시절을 잊고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 작가 김소영처럼 어린이 눈높이에서 어린이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작가가 있을까.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이 오픈되자마자 들었는데 종종 집중력을 잃어 다시 듣게 되었지만 어찌저찌 완독. 작가가 생각하는 학교, 어른에 대한 생각이 너무 아름답고 발라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요즘 우리 세상은 요즘 우리 학교는 어린이들을 이렇게 보듬어주고 있을까. 새삼 어린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다시 종이책으로 읽고 싶다. 그래서 밀리의 서재에서 오디오북으로만 오픈이 된 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름다운 책. 임진아 그림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는 단연 김소영 작가라고 단언해 본다.
정대건 몰아읽기 마지막인데 데뷔작을 읽게 되었다. 오디오북은 몰입이 안 되어 종이책으로 읽었다. 270쪽 정도 되는 분량으로 이 분량도 길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정대건 작품에 비하면 호흡이 길어 몰입감이 있었다. 좀 더 긴 작품도 많이 써주시길. 오래 매진하던 영화일을 접고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작가는 말했지만 그때의 그 삶은 헛되지 않고 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많이 힘들었겠지만(물론 이런 말 자체로 표현이 안 된다는 거 안다. ) 어떠한 고생의 경험도 내 안에 쌓이지 어딘가로 흘려보낸 것이 아니므로 다 작가의 내공으로 쌓여 이렇게 작품으로 탄생해 상도 받고 데뷔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내가 했던 오랜 객지 생활이 뭔가 쓸모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 고생들은 다 내 안에 쌓여 있을 텐데 그걸 어떻게 끌어내어 의미있게 활용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작가는 어찌보면 행운아일 수도. 본인 생각에는 자신이 한 고생의 털끝만큼도 못 미치는 활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지만 단 한 번의 기회를 기다리며 평생 노력하는 사람에게도 그 기회라는 것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작가도 이 소설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하지 않았는가.) 인상깊은 구절들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 뭔가를 도모하고 거기에 몰두할 때 제일 행복하다. - 이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사람은 행운아이다. 진정으로 응원해주고 지켜봐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 - 우리는 정말 이런 한 사람을 가지고 있는가. 영화 GV의 빌런으로 여겨지던 고태경에 대한 혜나의 시선이 변화하면서 고태경을 그리고 자신을, 친구들을 이해하게 된다. 천천히 읽을 생각이었지만 마지막 마무리가 궁금해 한꺼번에 읽게 되었다. 후반부의 몰입감이 좋다. 뭔가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매진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다른 길을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영화계에서 시나리오 작업하다가 몇 번 미끄러지면 십년이 날아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접해본 내용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일상처럼 여겨지는 세계인 것 같아 상상도 잘 안 된다. 유튜브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 영화인들도 여러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 같다.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 무시무시하다.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