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시대라 모든 것이 비대면이라 더더욱 미술관 관람이 아쉽다. 과야사민 전시회는 간신히 예약을 할 수 있어서 관람했으나 김환기전 관람은 한발 늦어 만석이라 예약 불가. 랜선관람이 가능하다지만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그 고유의 느낌이 사무치기에 포기하고 곽아람 기자의 '미술 출장'을 찾아 읽었다. 본인은 고달팠다지만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안 되는 초유의 상황에서 오히려 그의 고행이 여행과 미술관 관람을 돈까지 벌면서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0여년 전부터 5,6년 전까지 취재를 다녔던 세계 각지의 미술관 전시와 미술품, 작가를 소개하는 이 책은 더 입소문이 나서 잘 팔려야만 하는 책 같다. 

 

곽아람 기자의 책은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에 이어 두번째였다. 이 책은 한국사람들에 둘러싸여(적어도 내 눈에는) 맨해튼에서 일년을 보내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펴낸 책인데 너무 고생했다는 넋두리가 많은 것이 좀 아쉽지만 그래도 나도 지금 뉴욕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 재미있기도 했다. 객지에서 살아보지 않은(여행 말고 사는 것) 사람이야 일년 맨해튼 생활이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단함의 연속이었겠지만 오히려 그가 있었던 곳은 미국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대도시는 미국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적극 동감한다. 게다가 한국인 룸메들이라니. 그것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것이 과연 객지살이란 말인가. 물론 그것이 더 독이 되어 그를 더 힘들게 했다지만 말이다. 노란 피부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곳 그곳이 진정한 미국이지만 이제 미국 어디에나 한국인이 있어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객지는 없는지도.)


넋두리 말고 곽아람 기자의 글에서 아쉬운 점은 그녀의 시선이다. 곱게 자란 중산층 미술학도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는데 그 중산층의 시선이 아쉬웠다. 그래서 김한민이 떠올랐다. 


김한민도 곱게 잘 자랐겠지만 어릴 때부터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중산층의 시선이 없다. 물론 김한민 특유의 그 진지함을 벗어버렸더라면 이 책이 더 매력적일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김한민의 매력이 또한 그 진지함이기에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목도 '그림 여행을 권함'이라니. 누군가에게 뭔가를 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록새록 느끼게 되는 요즈음인데 그는 여전히 (물론 출간된지 꽤 됐다.) 타인에게 뭔가를 권하고 있다. 그 특유의 열정으로. 하지만 사람들은 누군가가 뭔가에 빠져 즐기고 있는 것만 살짝 보여주면 회가 동하게 마련이다. 오히려 이거 좋아, 이거 해봐보다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김한민의 그 시선이 좋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말고 눈높이를 맞추는 그 시선이 아름답고 씩씩하다. 


여행과 미술을 동시에 즐기고 싶은 나같은 사람이 랜선여행 랜선관람말고 즐길 수 있는 이런 책들이 좋다. 


+곽아람 기자의 글을 더 찾아보려고 한다. 김한민의 '페소아'를 찾아 보았지만 와닿지 않았다. 당분간 문학기행보다는 미술기행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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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타국 생활을 마치고 미취학 자녀 둘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는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 딱히 연고가 없어서 어느 지역을 골라 귀국할지 궁금했다. 결국 그들이 고른 곳은 '잠실'이었다. 그들은 엄마의 직장이 가깝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누가 봐도 그들이 그 곳을 왜 골랐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잠실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하는 궁금증으로 시작했으나 역시나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 과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다가는 큰 오산이 되겠다 싶었다. 이 소설은 미친 사교육의 현장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소설이니 '스카이 캐슬'과는 다르겠지 하는 기대로 끝까지 읽었으나 사교육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그들의 삶을 끝까지 엿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장강명 작가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평을 해서 그런지 이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책 '당선, 합격, 계급' 이 떠올랐다. 객관식 평가로 줄 세우기를 하는 것은 정말 시대착오적인데 우리 나라에만 전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이 시스템이 고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김이나가 그의 저서 '보통의 언어들'에서 우리 나라에만 있는 단어가 재벌, 갑질, 애교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특히 그는 '애교'에 방점을 찍었었다) 장강명은 이 책에서 '입사 동기'라는 단어를 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일괄적으로 해마다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뽑는 우리와 같은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같은 해에 회사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한 단어로 묶어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우리의 청춘들을 객관식 시험으로 줄 세워서 대학에 보내고 회사에 보내고, 공무원을 시킨다. 이 시대의 청춘들은 객관식 문제풀기에 몇 년의 청춘을 쏟아 붓는 것일까. 암담한 생각이 들어 부러 심윤경의 '설이'를 떠올렸다.  

 

'설이'에도 사교육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등장하지만 판타지를 더 많이 넣었다. 그래서 골치가 덜 아플 수 있다. 같은 사교육을 환타지라는, 허구라는 프레임을 어떻게 씌우느냐에 따라 이렇게도 다른 느낌의 소설이 나온다. 작가들은 모두 천재다. 


'잠실동 사람들'은 르포 느낌이고 '설이'는 환타지 느낌이다. 르포가 골치아픈 사람들은 '설이'로 환타지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잠실동 사람들'을 읽으면 되겠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제일 드는 책은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다. 갑툭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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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평들이 좋아 기대를 많이 하고 읽었다. 기대와는 다르게 이 책은 '집'에 대한 내용이 아닌 여러 집을 전전하며 살던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집이 한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 또는 집을 통해 본 한 여성의 성장기' 이기도 하지만,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집이란 그냥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긴 하지만 한 인간의 성장에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후자가 더 기대가 됐고 다 읽고 나서도 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기에 여기에 옮겨 본다. 


저자는 '서구 사회의 전통은 결혼한 여성에게 남편의 성을 따르게 하지만 한국 사회의 전통은 원래 성을 유지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사회가 여성을 주체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피가 섞이지 않은 여성을 가족 안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부계 혈통주의에서 여성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것이 아니라 감히 따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살며 나를 소개할 때 사뭇 자랑스럽게 '우리는 남편 성을 따르지 않아'라고 말하며 다녔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 이유는 한국 사회가 여성을 주체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얼마나 결혼한 여성에게 주체성을 부여했는가에는 회의적이다. 어차피 결혼 제도란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남편 성을 따르게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해 보이지 조차 않는다. 


"여성의 삶을 방해하고 축소하는 가부장적 결혼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에이드리언 리치) 이라는 인용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결혼은 없다고 본다. 결혼 제도 자체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이라고 하면 이건 말이 되는 것 같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 제도는 가부장적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뼈아픈 현실.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이 언제든 방해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엄마의 독서, 사색, 휴식은 수시로 멈춰졌다. ...내가 엄마만의 방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엄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집 전체가 다 내 방이지." 엄마의 뜻과 달리 그 말은 엄마의 처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며느리-아내-엄마인 여자는 집 안의 어느 곳에나 있어야 하므로 집 안의 어느 곳도 소유해서는 안 되었다. 엄마는 장소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엄마가 엄마의 방이 있었다고 해도 언제든 엄마는 방해받았을 것이고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엄마는 '19호실로 가도' 결국 자살하고 만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잔은 결혼 제도가 여성에게, 아내에게, 엄마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잔은 '나'이기도 하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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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 SNS부터 에세이까지 재미있고 공감 가는 글쓰기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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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작가의 글은 점점 안 팔리지만, 일반인 작가의 글은 점점 수요가많아지고 있다. 글을 잘 쓰는 능력이나 전문성만큼이나 고유한경험이 독자들 사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미 유명한사람보다 이제 유명해지려는 사람이 더 자기 홍보에 열심이고, 그 말인즉슨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에게 더 열심히 다가간다는 뜻이다. 독자도 발견되고 싶어 한다. 익명의 독자에 머부는 대신, 소통하고,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SNS를 통 해소통하는 신인 에세이 작가들은 적극적으로 독자들을 찾아다니며 ‘좋아요‘를 누르거나 감상 글을 ‘공유‘한다. 독자에게도 주목받을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독자로 인정받은 경험이 작가 되고자 하는 용기를 북돋는다. 전문성을 갖추기는 어렵지만구에게나 고유한 경험은 있다.
책은 팔리지 않지만 글은 항상 읽는다. 글쓰기가 붐인데 독자는 줄어드는 중이다. - P219

에세이의 시대는 그 관계성‘에 방점이 찍힌 글쓰기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보통의 경험과 공감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을 가르쳐 온 전문가의 조언보다 높은 선호를 받게 한다. 지식의 종언인가. 에세이는 원래 학술서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전문가의 시대를 누가 열었을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환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의사, 가짜뉴스 같은 지상파 뉴스, 환경파괴 정책을 자문하는 교수, 주례사비평을 하는 평론가. 이전에 문자화된 지식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던들은 소수였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권위와 문자는 분리되는중이다. 읽고 쓰기, 혹은 쓰고 읽기는 이전 어느 때보다 개인과개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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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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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집이 한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 또는집을 통해 본 한 여성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자전적이지만,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시도이기도 했다. 이 시도를 통해 나의 이야기가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연결성을 소망했다. 사적 경험만이 아닌, 한 시대를 공유하며 성장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성과 보편성을 담고 싶었다. 내가 겪은일은 나만 겪은 일이 아니고, 나의 생각은 타자로부터 받아들인 여러 생각의 총합이며,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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