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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 위기의 순간을 사는 철학자들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9월
평점 :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이택광 교수가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 등 8명의 세계 유명 석학들과 나눈 대화를 묶은 책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SNS를 통한 새로운 운동 등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에 대해 각각의 의견을 제시한다. 8명의 학자들의 주옥 같은 얘기들은 읽는
이에게 많은 질문과 생각을 던져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드시
이렇다’라고 단언하거나 확신하지 않는다. 각자 나름의 논리적인
시선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뿐이다.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는 것은 차치하고, 현재와 과거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어떠한 이론도 완벽할 수 없다. 사회가 급변하고 복잡다단해질수록 특정 현상이 일어나게 만든 원인들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그 모든 원인들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두
손을 놓은 채 아무런 노력 없이 실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종국에는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고민해보고 노력해보는
것이다. 즉,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이해와 예측도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100%의 정확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해 끊임 없이 70%의 해석력을 가진 이론, 80%의 통찰력을 가진 이해을 만들어내고
공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더 낫게 실패한’ 이론과 행동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언젠가는 보다 나은 사회가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어렵고 멀어보지만
가장 쉽고 빠른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
책에 실린 내용 중 일부를 옮겨봤다
인터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철학자들의 대답은 한 마디로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구절이다. 말하자면 철학은 실패에 대한 사유다. 따라서 철학은 또다시 실패할지언정 다시 시도하기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이
경제학자들과 다른 점을 여기서 짚어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그 위기의 순간에 철학은 새로운
체제를 사유한다. 위기의 순간을 사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본질이자 사명이라는 것이 이 책에 실린 철학자들
사이에 합의되어 있는 명제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서 비로소 사유의 혁명은 시작된다. (프롤로그,
11)
나는 쉬운
해결책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해결책보다 사유를 해야 한다. 유명한 마르크스의 구절이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말인데, 20세기에
우리는 이 말에 따라 너무 많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변화보다도 해석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 (지젝, 83)
사유를 시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자동적으로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종교만
해도 복잡하다. 내가 믿는 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신일 수 없다. 서로
교환되지 않는다. 이런 걸 고민해야 한다.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지젝,
87)
오해는 최초의
이해보다도 더욱 지적인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다. 원조
철학자보다 더 훌륭한 지적인 성취가 오해에서 오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두 외국인이 되어야 한다. (지젝, 88)
아랍의 혁명들은
내가 자주 강조하려고 했던 사실을 하나 상기시켜주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란 정부 기구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민주주의란 무엇보다 자신들의 태생, 재산
혹은 권력을 운용하는 전문지식 등에 의해 그렇게 ‘운명이 정해진’ 사람들이
지닌 권력에 대한 위반의 표명이다. (랑시에르, 101)
혁명이란
보이는 것의 질서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혁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역량들을
표명함으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들을 지워버린다. (랑시에르, 102)
나는 지배적인
두 가지 해석에 반대하면서 민주주의를 다시 사유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단순하게 대중 선거에 근거하는
제도적 형식 전체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란 계급지배를 그 내용으로 하는
사실상 단순한 형식이라는 해석이다. (랑시에르, 102)
다시 말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그들이 말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의 규칙을 위한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말하는 노동자
시인들의 경우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구술과 산문 밖에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글을 쓴다. 그들은 운문으로 글을 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통속적인’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시를 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개인적인 실천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은 개별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교섭하는 일이 아니라 공적
토론과 시위에 속하는 집단적인 일이라고 결정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것들의 질서에 대한 단절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실천은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채 생산할 능력이 있다고 노동자들 스스로 선언하게 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단절과 일맥상통한다. 불가능한 것은 사실상 이중의 지위를 가진다. 한편으로
불가능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한 것의 영역을 선험적으로 한정하는 데 사용된다. 다시 말해 평민이 말하거나
노동자가 주인 없이 생산하는 것은 지배적인 논리로 가능하지 않다. 다른 한편 불가능한 것의 의미는 가능한
것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1968년에 이런 슬로건이 있었다. “현실주의자가
되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실제로 우리가 가능한 것을
얻는 것은 오로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면서 이루어진다. ‘노동자 공화국’을 원했던 노동자들은 대신에 ‘사회적 권리’를 쟁취했다. 오늘날 이런 모든 권리를 폐지하고자 하는 세계의 지배자들이
갖는 집념은 그들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이런 변증법에 나름대로 얼마나 민감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 120)
고니는 노동의
하루 여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글쓰기를 통해 재구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글쓰기를 그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수단으로, 착취를 통해 도둑맞은 시간과 소유권을 통해 독점된 공간의 소유를 되찾는 수단으로 만든다. 그가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해 행하는 것은 글쓰기를 통한 자기의 재전유 작용이다. 이런 작용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나눔에 이른다. 그것은 노동자의 몸이 시간과 공간의 분재/나눔 속에 기입된 것으로
간주되는 방식을 수정한다. 그는 노동자가 말하는 방식, 언어를
활용하는 방식, 노동자가 낮과 밤에 할 일을 분배하는 방식, 그의
생산과 소비를 관계 짓는 방식을 바꾼다. 해방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이다. 고니는 그것을 개인적인 경험의 틀 안에서 표현한다. 그러나 이 개인적
경험은 노동자들이 서로 말하고 그들의 고용주에게 말하기 위해 모이는 방식, 그들이 그들의 말의 지위를
바꾸는 방식, 그들이 동시에 새로운 삶의 수단과 투쟁의 능력을 창안하는 방식 속에서 즉시 연장된다. (랑시에르, 125)
1968년이 보여주는
것은 복종과 반역의 원인 복종과 반역 그 자체일 뿐이라는 점이다. 반역은 자각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반란이 폭발하는 세계를 다르게 이해하게 하고, 우리가 적응하고
있었던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반란이다. 반란은 또한 모든 사람이 생각한다는 단언, 사유가 구상되는 세계와
그것이 적용되는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는 단언이기도 하다.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적용한 것은
바로 이런 교훈이다. 말하자면 나는 노동 해방이 생산의 과학에 기초한 운동이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자들에
의한 그들의 사유 능력, 의식/지각(sentir) 능력, 그때까지 특권계급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을 실천하는
능력의 단어임을 보여주었다. 나에게 이런 교훈은 현안의 문제로 귀착한다. (랑시에르, 127)
현존하는
정치제도가 자신의 권력을 무장해제당한 것과 달리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권력은 정치적을 통제되지 않고 있다. 권력과
정치를 다시 결합시키지 않는 한 당장 발들에 떨어진 불을 끄거나 일시적으로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것 이외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바우만, 141)
내가 한국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에 대해 당신이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또는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책임을 지는 것은 필연이다. 설령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책임은 언제나 강렬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당신의 선택의 결과를 주의 깊게 고려하고 당신 자신과 당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면밀하게 따져본 뒤에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 선택이 무엇인지, 또한 그 선택이 초래할 문제들에 대해 최대한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그 노력을 통해 선택의 결과를 평가하고 추후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우만, 153)
일상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경험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잘 훈련된 지성은
경험을 토대로 추상적인 것을 만들어 낸다. 독자의 입장에서 경험의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트레이닝이다. 자기 트레이닝이든 무엇이든 끝없이 경험을 해석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자를 만들어낸다. (스피박, 165)
내가 보기에
만일 사람과 동물이 더 행복하고 덜 고통스럽게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더 나은 사회일 것이다. (싱어, 177)
나는 그
어떤 체제도 자본주의만큼 생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순전히 자본주의 때문에 빚어지는
끔찍한 결과들이 감소되기를 원한다. 부를 활용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이들에게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 이타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말하자면 윤리적 삶을 강조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충분히 편안하다면
당신의 부를 타인과 나누어서 어떤 이들도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각인시켜야 한다. (싱어, 178)
나는 공리주의자다. 급진적인 평등주의자는 차치하고 평범한 평등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평등이라는 것이 저절로 얻어지는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00달러의 가치라는 것은 1년에 5만 달러를 버는 사람과 1년에 500달러를 버는 사람에게 결코 같을 수가 없다. 500달러를 버는
사람에게 100달러의 가치라는 것은 5만 달러를 버는 사람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부유한 사람의 부 상당량이 가난한 사람에게 재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말해주듯이 이타주의는 가난한 사람을 돋게 만드는 동기로 충분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정부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싱어, 180)
종교적 실망과
정치적 실망에서 철학에 대한 요청이 나온다고 했다. 실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상실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경험에서 실망이 기인한다. 실망은 끝이라기보다
시작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 시작이 바로 철학에 대한
요청이다. (크리츨리, 187)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조심스럽게 마르크스의 생각들을 분리해내야 한다. 자본주의의 현재 위기에 관해서라면 마르크스가 모든 점에서 옳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저작은 중요한데, 경제에는 언제나 정치적 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에 의존하는 삶은 상품 구매 수요로부터 이윤을 얻는 이들에게 취약하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정치적인 가설이다. 그는 경제를
지배하는 이들의 우리의 의식적 행동 또한 지배한다고 말했다. 만일 마르크스가 틀린 점이 있다면 자신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를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경제를 지배하는 자는 우리의 의식적 행동뿐 아니라
무의식적 행동까지 지배한다. (바커, 231)
한국 독자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읽고 그림을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림은 지적 성장에 아주 좋은 훈련이다. 덧붙여 유머를 잃지 말라.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유머다. (바커,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