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
소재원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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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범죄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범죄는 사기라는 말을 했었다. 사기를 당한 사람은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물질적 손해가 얼마가 되었건 간에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시킨다는 얘기였다. 틀렸다. 사기 역시 잔인하지만 성적인 범죄, 특히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범죄가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짓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한 명의 인격을 자신의 성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상처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화인으로 남아 한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잔인하리만큼 파괴시킨다.

 성폭력의 피해자는 이겨내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의 주변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피해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것이다. 영화 <중력피에로>에서 레이코는 젊었을 때 성폭행을 당했다. 집에 함께 있던 아들들은 그 광경을 목격했고 기억은 덫으로 남아 이후의 삶에도 끈질지게 달라붙어 영향을 끼친다. 결국 레이코는 그날의 상처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고 만다.

 소설 <소원>의 지윤이는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말았다. 행복과 순수함으로 가득해야 할 어린 그에게 세상은 너무나 가혹한 아픔을 주고 말았다. 상처받은 신체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 있다고 해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파괴된 영혼과 기억은 회복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엄마는 강하다, 강해져야만 한다

 

 소설은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앞으로 지윤이와 그의 부모는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을 헤쳐나가야 한다. 하지만 고난을 함께 극복해내는 것이 아니라 지윤이 엄마, 박유정에게 모든 어려움이 부담 지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1차적 피해자인 지윤이는 그렇다 쳐도 아빠는 고통스러워도 현실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지윤이의 상처에 대한 슬픔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자신의 삶을 놓아버렸다. 운영하고 있던 문방구는 방치시키고 술로 연명했으며 결국에는 달려오는 차에 몸을 던져 버렸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사고능력이 어린아이 수준으로 돌아가 주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모든 짐은 엄마에게 돌아갔다. 지윤이를 돌보고 병원에 데려가는 것도, 문방구를 운영해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엄마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지윤이가 이렇게 되었다는, 죄책감과 주변의 시선들이다. 심지어 남편마저 당신이 조금만 더 지윤이에게 신경을 썼었어도, 라고 모든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박유정, 지윤이 엄마는 주저 않을 수 없다. 지윤이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엄마는 강하다, 아니 강해져야만 한다.  

 

곱지 않은 세상의 눈길

 

 그날의 기억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지윤이와 가족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기는커녕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더 아프고 따갑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지윤이가 학교를 입학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기존 학생의 학부모들은 지윤이를 비정상적인 아이, 장애가 있는 아이로 몰며 지윤이의 학교 입학을 거부한다. “우리 지윤이가 잘못한 게 뭡니까?”라고 묻는 지윤이 엄마에게 어떤 이는 심지어 그런 험한 일을 당한 게 우리에게 잘못한 겁니다. 아시겠어요?”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할말을 잃었다. 눈 앞에 있다면 욕을 실컷 해주고 싶었다.

 지윤이의 상처와 피해를 신문에서, 뉴스에서 접했을 때 우리 모두는 지윤이를 안타까워했고 가해자를 맹비난했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왔을 때, 특히 자신과 관련된 곳에 그들이 들어왔을 때는 지윤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헷갈릴 만큼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쏘아댄다. 성적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을 오히려 멀리하고 이상하게 보는 잘못된 풍조가 있다는 것을 들어보긴 했지만, 어린이에게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그들이 생각 없이 던지는 한 마디와 차가운 눈초리가 지윤이와 가족의 고통을 곱절, 그 이상으로 커지게 만든다.

 벤저민 바버(Benjamin R. Barber)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카라치(Karachi)나 바그다드의 어린이들이 잠자리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미국의 어린이들도 그럴 것이다. 세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박탈감과 굴욕감에 젖어 있다면 유럽인들이 아무리 자유를 자랑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다소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모습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지윤이가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나의 딸과 아들은 물론이고 주변의 어린이도 그럴 것이다. 내 딸이 등하교 할 때 범죄의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항상 붙어 다니고 경호원을 고용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불안하기 때문에 더 많은 보호를 하지만 보호는 또 다른 불안을 증식시킬 뿐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어린이들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그것의 시작은 남의 일이니까, 나는 피해를 안받았으니까, 라고 무관심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나와 나의 딸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피해자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지윤이와 가족의 탱고가 계속 되기를 멀리서나마 응원해본다. 지금은 엉켜버렸지만 언젠가는 모두를 반하게 할 정도의, 명랑하고 신나는 탱고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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