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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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폭력을 바라보는 우회로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subjective인 것과 객관적objective인 것으로 구분한다. 주관적 폭력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즉 명확히 식별이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른 폭력을 말한다. 객관적 폭력은 두 가지로 다시 나뉜다. 첫 번째는 부르디외가 묘파했듯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징적symbolic 폭력이고 두 번째는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의 작동으로 발생하는 구조적systematic 폭력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은 눈에 잘 보이는 반면 객관적 폭력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주관적 폭력은 이미 구조적 폭력이 내재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주관적 폭력은 징후일 그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구조적 폭력이라는 배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관적으로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돼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폭력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의 정반대이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악명 높은 암흑 물질과도 같은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25

 

 지젝은 우리에게 폭력에 대해 성찰하는 우회로를 안내한다. 그것의 시작은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다. 폭력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과 희생자에 대한 감정이입은 객관적 사실을 판단하는 사고를 마비시킨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필요하지만 이는 자칫 도덕적 잣대로만 사건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식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겉모습만 살짝 바뀔 뿐 같은 뿌리에서 다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진실truth과 진정성truthfulness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젝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폭력, 그 보이지 않는 배경

 

 지젝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언급한다.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구글, 아이비엠 등이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다. 그들은 스마트하다. 창의적인 기업가로 많은 돈을 벌고 누구보다 많은 기부를 한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인 그들의 이미지를 한 꺼풀만 벗기면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p47)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그들은 공리공론적 접근을 싫어한다. 그들이 보기에, 착취당하는 단일한 노동계급 같은 건 지금 없다. 아프리카의 기아, 무슬림 여성들이 겪는 고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폭력과 같은, 해결이 시급한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는데 케케묵은 반제국주의 따위를 앞세우며 개입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대신 우리 모두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들과 정부와 기업이 공동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고, 중앙 정부의 도움에 기대는 대신 상황을 개선해나가기 시작하고, 이름표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도 관습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위기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반대 투쟁 같은 상황이다.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7

 

 그들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역설은,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 먹고 살아가는 뱀과 같다는 것이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온갖 독점으로 경쟁사를 파산시키거나 합병하고 제 3세계의 노동력을 싼 가격에 이용해 돈을 번다. 그 돈으로 다시 그들에게 기부를 한다. ‘지독한 사업가모습은 자선 행위와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인도주의의 좌장의 모습으로 감춰진다.

 그들이 막대한 기부를 하는 것은 개인적인 특성에서 기인한 일이 아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의 순환이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경제적 관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행위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하여 균형을 다시 잡아가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 국가의 주도에 의한 강제적 재분배를 교묘히 비껴가는 것이다.

 

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큰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한다면 작은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역시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손길에 우려를 표했는데,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든 자원봉사자든 인도주의적 손길을 전하는 사람이 배제의 사슬을 단단히 하는 중요한 고리라는 것이다. , 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난민을 배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요원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겉으로는 인도주의적 행동이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배제의 목적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폭발을 유발하는 파괴적인 원한을 줄이기 위해 인도주의적손길로 그들이 사는 곳을 비교적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놓고, 자기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담장을 높이 쌓아 잠재적 범죄자들과 분리하는 것처럼 무장을 한 경비원들로 하여금 철저히 그들을 격리 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부패[인간쓰레기들]의 불쾌한 악취가 원주민들의 거주지에 도달하지 못할 만큼 먼 거리,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거처인 임시 수용소의 위치를 선정하는 주요 기준이다. 그런 장소가 아닌 곳에 있는 난민은 장애물과 골칫거리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 들어간 이들은 잊힌다. 난민을 그런 곳에 가둬 놓고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점에서, 그런 격리를 궁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일부의 연민과 또 다른 일부의 증오는 서로 협력해 난민을 멀리 격리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72

 

이는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을 함께 있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 해로운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고자 하는 압도적인 바람뿐만 아니라 도덕적 올바름righteousness을 원하는 절실한 바람도 충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인 것이다.”(P. 72)    

 

복지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앞서 말했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모습은 과거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지젝이 언급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가 대표적인 예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고 교황에 의해 성인 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주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그 자신이 다스렸던 콩고의 자연자원 착취라는 대규모 경제계획이 낳은 파국적 결과들을 적당히 중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진실한 인도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콩고는 그의 개인 영지였으니까!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1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복지국가의 형성과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업의 복지에서 노조들이 주창하는 것들 중 핵심은 조합원의 몫을 늘리는 것이다. 그 사이에 비정규직의 권리와 복지는 들어설 틈이 없다. 좀 더 넓게 국가적 차원을 보자면, 잘 갖춰진 사회안전망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박노자 교수는 한 칼럼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당연히 노르웨이의 최대 기업인 스타트오일 (국영 석유회사)의 노조는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조합원의 임금 인상과 복지” 등을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기업이 이윤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컨대 자연환경 파괴적인 로포텐 섬 (관련링크) 근방의 유전 개발 문제라든가 알제리아와 같은 최악의 독재국가에서의 자원 “개발” (사실상 약탈) 참여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환경 본위의, 국제연대 본위의 입장을 취하겠습니까?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조직노동과 자본은 비록 각각의 “몫”을 놓고 늘상 긴장을 하고 있지만, 또 동시에는 ()노르웨이 운영에 있어서는 “동업자”이기도 합니다. 노르웨이 자본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앙골라나 방글라데시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공범”은 아닐까요?

노르웨이의 굴지의 재벌인 통신사 텔레눌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안전장치없이 일해야 하는 13세 아이들에게는 텔레눌의 “해외 경영”을 반대한 적도 없는 그 노조는 과연 무엇일까요?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레디앙칼럼)

 

 물론 콩고의 사람들을 대학살 했던 레오폴드 2세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소 과격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원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역설로 들리지만, 실은 가장 내구력이 있고 가장 튼튼한 자본주의는 바로 다수를 공범이랄까, 배부른 감옥의 “수인 겸 간수”랄까 하여튼 체제의 순량한 “일분자”로 만드는 복지자본주의입니다라는 박노자 교수의 말을 되뇔 필요가 있다.

 

환상은 금물

 

 여기까지 전개된 생각에 대해 누군가는 냉소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냉소가 아니라 의심이라고, 그리고 지젝의 조언대로 주저 않고 바로 대답하겠다. “!, 바로 그겁니다”. 어설픈 열정과 온정주의은 주관적 폭력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들고 좋은의도가 오히려 객관적 폭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폭력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려야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생각은 분명히 무기력하지만 생각이 없는 행동은 효력이 없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도덕적 부패와 인간적 고통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38

 

 

참고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후마니타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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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리뷰는 확실히 공들여서 쓴 느낌이 드는군요. 이 책 50% 세일할 때 살까 말까, 하다가 적립금 한도가 약간 넘쳐서 책 하나를 빼다가 그만 이 책을 뺏는데 좀 아쉽네요. 아직도 반값 하나 모르겠네요..... 알아봐야겠다...

오, 아직도 반값이네 !!! 그나저나 이런 글이 좀 핫 코너에 소개되어서 널리 읽혀야 하는데 좀 아쉽습니다.

까레이 2014-01-04 21:09   좋아요 0 | URL
오미 감사합니당ㅋㅋㅋㅋ 쓰다보면 언젠가 실리겠죠??ㅋㅋ
강력추천입니당 주제도 좋고 역시 지젝 이빨(?) 잘터네요ㅋㅋ 농담, 문학, 소설 다 끌어다 쓰는듯해요ㅋㅋ
근데 뒤로가면서 저한테는 좀 어렵더라구요
그놈의 라캉과 헤겔ㅋ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21:48   좋아요 0 | URL
라캉 쉽게 이해하기 힘들죠. 라캉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이해해야 하고... 뭐 그런 족보를 캐야 하니, 더군다나 지첵 번역ㅇ 쉬지가 않은 가 봅니다.
하여튼 반갑이니 얼릉 사두어야 겠습니다.
 

리메이크 열풍그리고 박정희라는 판타지

 

 당시의 인기가수가 과거의 명곡을 리메이크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지만지금의 양상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가히 리메이크 열풍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불후의 명곡>, <히든 싱어> TV 프로그램들도 리메이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한국 가요 시장의 상황과 궤를 함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시작으로 EXO까지 남녀불문하고 아이돌’ 가수들이 현재 한국 가요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그들의 인기는 여전하지만 한편으로 5년 넘게 지속된 이러한 유행에 많은 사람들이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가 이제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문제는 새로운 모습의 가수와 노래가 등장할 가능성 역시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다아이돌 가수들이 귀여움섹시함중성적 매력 등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하지만더 이상 파격적이지도 새롭지도 않다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웠던 과거를 추억한다이것이 리메이크의 유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회자되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다한 쪽에서는 경제 부흥의 영웅으로한 쪽에는 무자비하게 인권을 탄압한 폭군으로 그를 재조명한다둘 다 전적으로 맞는 것도틀린 것도 아니다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치가 개입된 사실판단에 의한 논쟁은 싸움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이문세와 김광석의 노래의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 논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리메이크 열풍이 왜

생겨났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이택광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지금 호명 받고 있는 박정희는 역사적 개인이라고 보기 어렵다오히려 박정희는 이런 역사적 사실성을 탈색시킨 채위기에 처한 증상의 임계 상황에서 출몰한다박정희는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을 표현한다박정희가 고통스러운 증상이라는 뜻이 아니다대중이 원하는 건 증상이 예전처럼 다시 쾌락을 주는 것이다박정희는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으로부터 다시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대중의 요구가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택광『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지금의 경제와 정치 상황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그렇다고 마땅한 대안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그리고 대통령 한 명이일국의 차원에서 어두운 현실을 단번에 장밋빛으로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들은 초인적인 인물의 등장을 기대한다바로 그 자리에 이만큼 잘살게 해준” 박정희가 위치하고 있다.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현재의 가요계와 정치 상황과 그 속에서 호출되는 김광석과 박정희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이택광 교수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할 수밖에 없는데, “박정희라는 기표가 점유하고 있는 지점은 그 어떤 기표로 대체되어도 좋은 텅 빈 결여의 자리라는 말처럼 사실 김광석이 아니라 유재하이문세라도박정희가 아니라 다른 과거의 정치인이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단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박정희와 김광석이라는 텅 빈 기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금 즐거움이 결여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P.S 그렇다 해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김광석의 노래는 정말 좋다.   

     이 글은 '페루애'님의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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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메이크라는 표현이 꽤 와닿습니다.

까레이 2014-01-02 11:39   좋아요 0 | URL
사실 제 글도 곰곰발님 글의 리메이크죠ㅋㅋ 박정희에 대해서도 리메이크라는 표현을 썼으면 좀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네요ㅋㅋ 나중에 교쳐야겠어요ㅋㅋ
 

신문 예찬, 우리 꼰대는 되지 말자

 

 신문은 정말 싸다. 가판대에서는 한 부에 800,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과 똑같다. 정기구독을 하면 신문 한 부의 가격은 더욱 낮아진다. 하루에 500원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싸도 너무 싸다. 특히 한겨레 신문 토요판이 그러한데, 몇 백원을 내고 사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삼각김밥 사먹을 돈으로 가판대에서 신문 한 부를 사고 한 달에 치킨 한 마리 덜 시켜먹고 신문 정기구독을 하자. 몸은 지방이 줄어 날씬해지고 머리는 지식과 상식으로 탄탄해질 것이다.

 

신문, 세상을 열어주는 창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될까. 초능력과 재력을 동시에 갖고 있어 하루가 48시간이고 전세기로 세계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비슷할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지는 나라, 지역, 성별, 경제적 수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대개 그것들에 기초한, 그것들과 관련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환경을 둘러싼 경계를 초월하는 세상을 접하는 것을 직접 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간접 경험에 보다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에 책과 신문이 있다. 그 안에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를 통해서 나의 국적, 성별, 계급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과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카메룬의 소설과 칠레 철학자의 책을 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프랑스의 『르 몽드』와 독일의 『슈트도이체 자이퉁』을 읽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매달려 있는 줄은 무엇일까

 

 미국의 과학자 샘 해리스와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샘 해리스는 “꼭두각시는 자기를 조종하는 줄을 사랑하는 한 자유롭다”라고, 피터 버거는 사회학이 우리가 사회의 꼭두각시임을 보여주지만 그냥 꼭두각시와 달리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발견이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우리가 사회라는 줄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라고 하더라도 그 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회학이 아니라 어떤 공부라도 그것은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고 이는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 이후에 그 줄을 사랑할 것인지, 줄에게 반항할 것인지를 택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위 때문에 길이 막혀 짜증난다고 욕을 하는 것과 시위가 벌어진 이유와 시위의 정당성을 생각해 본 후에 비판을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신문을 읽는 것이 바로 그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매달려 있는 줄 즉 정치, 경제,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언론을 믿지 않는다고?

 

 지인들과 가끔 신문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종종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언론, 특히 그 중에서도 신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어 당황스러웠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그럼 뭘 믿는데?”. 물론 언론의 공신력이 낮아진 데는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진영논리의 스피커 노릇을 해온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기자들은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의식을 잃은 채 특정 진영의 종군기자, 개별 언론사 샐러리맨이 돼왔던”(권석천, 『중앙일보』, 2013. 8. 28.) 사실이 그 말 속에는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모든 신문을 거짓말쟁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신문을 (안 믿으니 그렇겠지만)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조중동이라서 비난하고 한겨레는 한겨레라서 비난한다. 내가 『중앙일보』를 들고 있을 때는 꼴통보수라고 눈을 흘기고 『한겨레21』을 들고 있을 때는 빨갱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홍세화 씨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생각의 좌표』에서 얘기했다.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견해는 견고하다. 택시기사는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고, 또 어떤 계기로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한겨레를 읽지 않은 채 품고 있는 한겨레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나처럼 같은 택시노동자 출신으로서 조금 전까지 죽이 맞아 얘기를 나누었고 지금 한겨레에서 일하는 사람의 한겨레는 그런 신문이 아닙니다라는 얘기를 통해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할 수 없다.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 택시기사는 자신이 빠진 함정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까?

   택시기사 뿐인가? 우리는 정보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다. 사람들은 민주노총에 대해,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 ‘알 필요가 없는 것’,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되어 있다.  

홍세화, 『생각의 좌표』

 

 신문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치 개입이 철저하게 배제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가치와 생각을 접하고 사실에 대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흔히 요즘 정치권의 문제로 소통의 부재를 꼽는다. 모든 사람이 불통을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가? “너나 잘해따위의 말로 정치권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한 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가 한 강연에서 꼰대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꼰대는 달리 꼰대가 아니다. ‘꼰대는 남이 무슨 얘기를 하든 자기가 할 얘기를 머릿속에 이미 정해 놓는다. , 상호작용으로서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의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꼰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을 살짝 바꿔서 얘기하자면, ‘꼰대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해서 남의 생각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기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 대해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신문을 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수구보수라고 한겨레를 빨갱이라고 욕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우리가 핏대를 세우고 그토록 비판하던 불통의 모습이자 꼰대의 행동이다.

 ‘정보의 홍수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일 매일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접하고 싶은 정보만 접한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신문은 나와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트위터에서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만 맞팔을 하고, 페이스북에서 역시 내가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사람과만 친구를 맺는다. 정보는 홍수를 이루지만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무람없고 건방지게도 신문을 보는 방법을 추천해보려 한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무 자르듯 나누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조심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만, 자신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히 보수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중에 하나를 보기 바란다. 반대로 자신이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읽기 바란다. 이 방법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지점의 신문을 본다고 갑자기 그 쪽으로 쓸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영화 <생활의 발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살짝 바꿔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꼰대는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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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는 사지 않아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은 사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활의 작은 기조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사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나지만 예전에 몇 번 샀던 적이 있었고 나중에 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사게 될 날이 오는 일은 예전에 샀던 베스트셀러 책을 기억해내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낮은 일일 것이다. 이택광 교수의 비평서, 심보선 교수의 시집 및 비평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비평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않는 한 베스트셀러를 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은 몇 달만 지나면 헌책방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요즘 헌책방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책들은 <안철수의 생각>, <엄마를 부탁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이다. 잠시 베스트셀러로 영광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지만 이제는 헌책방의 책장만 차지하고 있는 골칫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베스트셀러의 운명이다. 원래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몇 천원만 내면 구입할 수 있다.

 두 번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것들뿐이다. 베스트셀러’s’가 아니라 베스트셀러라서 그런지, 자기계발서 아니면 힐링이라는 이름의 감성팔이를 하는 책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를 읽어봐야 그것이 시키는 대로 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므로 읽을 필요가 없고 힘들지? 조금만 더 힘내, 마음을 다스려봐라고 말하는 힐링책들을 읽으면 있던 힘도 사라지고 짜증만 날 뿐이다. 다소 오만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지성이 밑받침되지 않는 감상은 건전한 비판의식을 잠재우는 마취제”(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최영미)라는 최영미 작가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좋아요’ 100개도 모자란다.

 큰 이유가 위의 두 가지고 작은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자기계발서와 힐링책은 읽어도 남들과 할 수 얘기가 없다. 친구에게 그 책들의 말대로 야 그건 너가 게을러서 그런 거야,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해”,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야라고 고리타분하게 말하는 것은 왕따를 자처하는 일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인기 있는 드라마나 예능프로를 보고 얘기를 하는 게 훨씬 낫다.

 두 번째, 돈이 아깝다. 책을 사는 데 있어 나름의 작은 기준이 있는데, 시집을 제외하고는 일단 글씨가 많은 책이 장땡이다. 책의 질을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철저히 읽는 사람의 몫이고 글씨의 양이 책의 질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글씨보다 그림이 글씨보다 여백이 많은 책을 보면 지레 질이 별로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사기가 꺼려진다.

 세 번째, 이왕이면 오래된 책을 산다. 베스트셀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만큼 많이 인쇄한다. 10년 안에 절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살려면 나중에도 살 수 있다. 책이 절판되는 주기를 10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2013년에 출판된 책보다는 2003년에 출판된 책을 그보다는 1993년에 출판된 책을 사는 것이 나중에 책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절판된 책들 중에는 가격이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외의 부수입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아직 그래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아까워서 팔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책을 사는 데 있어 크고 작은 이유를 늘어놔봤다. 사실 책을 고르는 것에 정답은 없다. 좋다고 하는 약이 모든 사람에 좋은 것이 아니듯, 좋은 책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좋을 수는 없다. 본인이 봤을 때 좋은 책, 필요한 책을 고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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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읍시다. 지금 우리의 지성 네트워크를 위하여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고 해야 할까. 집에서 혼자 읽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는 일, 즉 독서 토론회에 참여한지 6개월이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시작해 지금은 학교를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독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도서관은 친목이 아니라 침   묵의 공간이, 독서실이 되었다. 독서에서 행위는 배제됐고, 책을 읽을수록 마음의   양식이 살찌니 정신의 비만이 우려된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정열과 혁명의 책   도 혼자 읽는 조용한 독서의 대상일 뿐이다. 내가 읽은 책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노동이나 자본, 탈핵 같은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책을 혼     자 읽으면 뭐하나.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 그 교양을 쌓아서 어디에 쓰지? 그것     이 삶을 더 비참하거나 힘들게 만들지는 않는가.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게 느껴지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특히 계급, 세계화 같이 거대한 담론을 다룬 책이라면 그 강도가 훨씬 심해지는데, 알아봐야 씁쓸한 이물감만 커질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옛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착각)라는 심보선 교수의 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함께 읽는다면 다르다.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때로는 날선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의기투합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장대한 행동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나와 다른 성별, 나이, 지역의 사람과 토론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과 사고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생각, 나의 일상, 나의 주변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모든 것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혼자 읽는 것이 나와 내가 판단한 저자의 모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 소통이라면 함께 읽는 것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들 각각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들이 만들어내는 다대다(多對多)’ 소통이다. 토론의 인원이 5명이라면 그 5명에 더해 그들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 5명이 더해져 10명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토론 속에서 경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난다. 이택광 교수는 프랑스 철학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활발하고 자유로운 지식인 공동체를 들고 있다. 이 공동체의 가운데에는 에콜 노르말 대학이 있었고, 거기에는 루이 알튀세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에콜 노르말과 알튀세르가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알튀세르가 한 일은 학계의 지식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연 것뿐이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을 지칭해서 개념의 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과학과 철학의 개념들이 서로 부딪히고, 예술과 정치학이 서로 조우하는 갈등과 종합의 과정이 이런 초청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철학자로 언급하는 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 또는 조르지오 아감벤 같은 이론가들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통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이런 사실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철학에서 수학〮철학〮정치〮예술〮신학, 심지어 사랑까지도 공평하게 자신의 입장과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콜 노르말의 분위기는 지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성차의 한계도 넘어서는 사상의 용광로였다고 발리바르는 회상한다. 이런 유니섹슈얼이라고 부름직하다는 발비라브의 말에서, 새로운 사상이 출현 할 수 있는 조건은 기존의 한계들을 극복하는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물론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토론회가, 그 외의 수많은 토론회들이 과거 개념의 당에 비하면 규모와 수준에 비하면 한참 모자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적인 한계와 성차의 한계를 넘어서 함께 얘기를 나누고 사유하는 정신만은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택광 교수가 같은 책에서 “(인문학이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비판적 사유는 푸대접을 받는 상황에서)막연하게 인문학의 가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위치한 곳에서 나의 깜냥으로 나름의 지성의 네트워크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읽읍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참고

아직도 책을 혼자 읽으시나요?,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자음과모음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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