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맨, 근대성에 대한 성찰

 

정원사의 삶, 정재영

 

정재영은 플랜맨이다. 시계와 알람이 없으면 불안 증세가 찾아오고, 조금이라도 삐뚤어진 것을 참지 못하고, 1급 결벽증으로 더러운 것이라면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으며, 모든 일은 규칙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일어나서 잠에 들기까지 모든 일이 계획에 의해 돌아간다. 6시에 일어나 6 5분에 이불을 개고 6 10분에 씻고 항상 똑같은 시간에 정확히 출근을 한다.

 그에게 계획적으로 된다는 것은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는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모든 것은 계획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이성에 대한 믿음의 반영이다. 이성과 자유의지를 갖고 철저한 계획대로 행동한다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 여기에 비합리적인 세계에 이성과 합리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이 더해져 믿음은 더욱 공고해진다.

 발전을 통해서 인간은 시계로 매사를 정확한 시간에 통제할 수 있고 위생용품의 발달로 더러운 것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발전과 진보와 궤를 함께하는 책을 다루는 도서관 사서는 그의 성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직업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에 따르자면 이는 그가 근대인에 빗대어 표현한 정원사의 생활방식에 정확히 부합한다.

 

근대 이전에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사냥터지기의 자세와 비슷했다면, 근대의 세계관과 관행을 나타내는 비유로는 정원사의 마음가짐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

 정원사는 자기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또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자지가 관리하도록 되어 있는 작은 부분에는) 질서가 없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에 어떤 종류의 식물이 자라야 하고 어떤 식물이 자라면 안 되는지 더 잘 안다. 그는 우선 머리에 바람직한 배치도를 마련한 다음에 정원을 그 이미지에 맞춘다. 그는 적합한 종류의 식물들(대체로 그가 씨를 뿌리거나 심은 식물들)은 성장하도록 하고, 그 외의 식물들, 즉 이제는 잡초라 개명된 것들을 뿌리를 뽑아 버림으로써 대지에 자신이 미리 생각해 놓은 디자인을 강요한다. 달갑지 않은 불청객인 잡초는, 그가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갑지 않은 존재로서 그의 디자인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가장 명민하고 전문적인(아마도 누군가는 직업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유토피아 창조자(utopia-makers)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원사다. 정원은 언제나 정원사가 머릿속에서 그려낸 청사진 속의 이상적으로 조화로운 이미지에서 그 원형을 드러낸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다시 빌리면, 인류가 유토피아라는 국가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160

 

 정원에 원하는 식물을 정해둔 위치에 심듯이 항상 계획과 계산에 의해 움직이고, 정원에 불청객인 잡초를 걸러내듯이 더럽고 잘 모르는 것은 만지지 않는다. 정재영은 가장 완벽한 정원사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  

 

정반대의 여자, 한지민

 

 한지민은 정재영과 정반대의 사람이다. 둘의 차이는 화성과 금성 사이의 거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녀에게 계획은 없다. 무계획이 곧 계획이다. 늦잠을 자고 싶으면 늘어지게 자고 잠이 안 오면 밤을 새면 그만이다. 그녀의 직업(?)은 가끔 부모님이 운영하는 편의점을 돕고 홍대에서 음악 공연을 하는 일이다. 사서와 대척점에 있는 직업이다.

 여기서 한지민과 정재영의 직업은 그냥 지나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정재영이 어떻게 그러한 성격의 사람이 되었는지 다소 뜬금없는 이유가 등장하지만 일단 사서와 록(Rock)을 하는 음악가의 차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둘은 정확한 이항대립이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은 야만과 싸워 이룬 문명의 기념비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책은 인류의 진보를 상징한다. 항상 계획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그의 성격과 사서라는 직업의 일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한지민은 음악가다. 게다가 기성 음악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는 록음악을 한다. 책과 사서가 이성의 영역에 가깝다면 음악과 음악가는 감성의 영역에 가깝다. 그녀는 규칙보다는 파격을, 계획보다는 무계획을, 음악과 일상생활 모두에서 추구한다.

 

무엇을 위한 시간관리와 계획일까

 

 정재영의 모습은 마치 기계와 같다. 코드를 꽂는 순간 작동되고 뽑기와 동시에 동작이 멈추는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시간에 밥을 먹고 잠에 든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는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해진 시간에 학교와 회사를 가고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점심을 먹으며 다음날을 위해 비슷한 시간에 잠을 청한다. 계획에 없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다음부터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원칙에 입각한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일 목적으로 고안된 테일러리즘은과 포디즘은 이제 산업현장과 사무실은 물론 가정을 포함한 일상생활 영역으로까지 외연을 넓히고 있다. 일종의 생존전략으로서의 시간관리는 노동세계의 가치, 즉 생산성과 효용성을 높이고 낭비하는 시간은 줄인다는 원칙에 기초한다.

조주은, 『기획된 가족』, 196

 

 시간관리가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노동의 가치를 높이고 쓸모없는 시간을 줄인다는 목적이 있다면, 과연 정재영에게 있어 시간관리는 어떤 의미와 목적을 띠고 있을까. 그가 철저한 시간관리를 통해 특별히 효용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시간관리를 위한 시간관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분업은 많은 장점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노동 소외와 인간 소외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에서 나사못을 조이는 일을 하는 찰리는 이후 보이는 모든 것을 조이려고 하는 병에 빠진다. 즉 나사를 조이는 이유와 목적이 사라진 채 일에만 강박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정재영도 다르지 않다. 조금 특이한 성격이라는 말로 가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맹목적인 강박관념이 숨어있다.

 

비정상인이라는 시선

 영화에는 정재영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상인이 등장한다. 정재영은 자신의 강박증을 고치기 위해 병원을 찾는데 그곳을 찾은 다른 사람과 강당에 모여 집단 치료를 받는다. 치료는 당사자가 자신의 비정상적인 습관과 성격을 고백하고 의사와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조언과 용기를 주는 식이다.

 문제는 이들이 꼭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인가라는 점이다. 치료라는 말을 썼지만 대신에 개화, 교화, 계몽 등 어떠한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 그들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 아닌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다뤄진다. 이러한 생각은 병원에 걸린 그림을 통해 드러난다. 그 사진은 영장류에서 시작돼 지금의 인간까지의 진화 과정을 표현한 그림이다. , 인간은 진화하는 동물이며 이성을 통해 끝없는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 무한히 뻗어나갈 발전의 앞 길을 막는 존재는 계몽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만 한다.

 

 미셸 푸코는 이성적인 것, 정상인 것과 다른 것으로 치부되고 억압되어 온 미쳤다는 것이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담론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광기는 이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서 배제되어야 할 속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광기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인 것이 되어 간다. 이성과 합리성을 인간 정신의 근본으로 삼고자 했던 근대 철학은 광기를 이성의 타자로 배제시키고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 속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언어는 이성의 언어에서 제외되고 금지된다. 광기의 언어에 침묵이 강요됨에 따라 광기에 대한 담론은 풍성해진다. 미친 사람의 말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무시되지만 미친 사람에 대한 연구와 담론은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증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성과 비이성을 구분하고 광기를 배제하는 담론은 17세기에 감금이란 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실천된다. 감금을 통해 미친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감금된 것은 미친 사람뿐만 아니다. 걸인, 노숙자, 자살 시도자, 음탕한 자, 신성모독자 등 사회적 규범과 동떨어진 것,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된 것은 모두 감금의 대상이 됐다. (…)

18세기 후반이 되면 광기는 의학적 담론이 다뤄야 하는 대상이 된다. 미친 사람은 이제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 수용소에서 관찰되고 치료받아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광기에 대한 의학적 접근은 인간적이고 과학적인 치료행위가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배제시키는 근대적 담론의 수정판일 뿐이기 때문에 미친 사람은 더욱더 정상인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다. 미친 사람의 말은 정신의학이 다뤄야 할 대상일 뿐 그 자체로는 완전한 침묵을 강요받는다.

주형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86

 

 푸코는 이성과 광기의 대립을 통해 광기와 비정상이 사회적으로 이뤄진 것이며 이성과 정상 역시 사회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성의 기능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의 구현을 통한 인간의 해방과 진보를 주장하는 계몽적 이성은 사실 타자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권력의 장치인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비정상적인 습관과 성격을 고쳐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눈물 겹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한 곳에 모여 끝내 비정상을 극복한 서로를 축하해준다. 모두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치료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 마음껏 비를 맞자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정재영과 한지민, 영화의 마지막에 같이 비를 맞으며 뛰어간다. 아직 비를 맞는 것이 어색한 정재영이지만 한지민의 손에 이끌려 함께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비는 언제부터 피해야 하는 것이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비를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에 젖은 몸이 일상에 귀찮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습기와 축축함 자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젖은 이후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축축한 상태로 버스를 타야 하고,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일정부분 근대화와 관련한다. 농경시대에는 비가 생명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한지민에게 비는 시원함과 즐거움이다. 근대의 생활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사는 그녀에게는 말이다. 정재영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활방식에 녹아들게 된다. 때로는 계획적으로 때로는 무계획적으로 살아갈 정재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진 만큼 행복 역시 늘어나지 않을까.         

 

 

참조

 

Bauman, Zigmund(2010), 『모두스 비벤디』, 한상석 역, 후마니타스,

조주은(2013), 『기획된 가족』, 서해문집

주형일(2012),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세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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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3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돈 받고 원고 팔아도 되겠습니다. 좋군요. 제가 6개월 동안 읽은 알라딘 서재 글 중 톱 10이군요...ㅎㅎㅎㅎㅎ. 이 영화 급 땡기는데요. 봐야겠네요...

까레이 2014-01-31 15:30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ㅋㅋ
근데 이 영화 뒤로가면 병맛입니다.... 신파가 따로 없습니다...

소재는 좋은데 이야기 풀어나가는 게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