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설리에게 빠져 있기 때문에
이태원과 백화점을 다녀왔다. 분수에 맞지 않게 그것도 한 주에 두 곳을 다녀왔다. 아마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있을까 싶다. 이태원에서는 한끼에 20,000원이 넘는 밥을 먹었고 백화점에서는 정장을 샀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마치 굉장히 잘 사는 집의 아들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기분이 올라왔던 이유는 충분히 맛있는 밥을 먹고 좋은 옷을 샀으면서도 미처 갖지 못한 더 비싼 밥과 옷이 눈에 들어왔다는 점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역시 여기는 나와는 맞지 않는 곳이야”라고 말했지만 그 안에는 사실 ‘돈을 많이 벌어서 이곳에 익숙해지고 싶어’라는 마음이 어딘가에 분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쓸데없는 개 멋에 취해
미련하게 청춘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네
이런 비호감적인 음악을 해봤자 더 이상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늦지 않았어 그 기타를 팔아버리고 옷 한 벌을 더 사
노래방에서 연습한 알앤비를 그녀에게 돌려줘 베이베
다시는 홍대 앞에서 기타 메고 폼 잡지 않을거야
함께 불러 알앤비 리듬 앤 블루스
(…)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동안 지켜왔던 신념만 믿고
다른 음악은 철저한 자본주의 상술이라 믿었지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네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
설리에게 빠져 있기 때문에
불나방스타소세지클럽 – 알앤비
15,000원짜리 스테이크를 먹는 것보다 7,000원짜리 순대국을 먹고 8,000짜리 시집을 사는 게 더 나은 삶이라고, 나에게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감히 옳다고 믿는다. 배부름에서 오는 만족은 채 몇 시간도 가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가슴에 새겨진 한 문장 한 문장의 울림은 영원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태원과 백화점 때문에 그 믿음에 살짝 금이 가고만 것이다.
노래 <알앤비>식으로 말하자면, ‘그 동안 지켜왔던 신념만 믿고 다른 음악은 철저한 자본주의 상술이라 믿었는데 이제야 그것이 모두 부질없는 착각’이었다고 깨달은 것이다. 미각은 본능보다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떡볶이보다 파스타가 비싼 것은 순전히 맛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상술이라는 믿음이 말이다.
그 믿음이 착각이었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노랫말처럼 실제로 ‘개 멋’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것이 무엇이든)깨달았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점은 나의 이런 비호감적인 취향을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데이트를 한답시고 만나서 허름한 백반집에서 파는 싸구려 밥으로 점심을 때운 후 헌책방에서 책 몇 권을 집어 들며 기쁨에 겨워하는 남자를 좋아해줄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타를 팔고 옷 한 벌을 더 사’라는 말대로 헌책을 포기하고 비싼 밥을 먹고 싶지는 않다. 비싼 밥을 먹는 돈을 줄여서 책을 산다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아무리 귀찮아도 제목이 밖으로 보이도록 책을 들고 다니는 ‘개 멋’으로, 비록 꿋꿋하지는 못하겠지만 근근이라도 버텨갈 것이다.
이 순간에 심보선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라면 후자는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다.(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에서 ‘시’, 문학과지성사, 2011) 사실 손에 많은 돈을 쥐고 있다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 비싼 밥을 먹고 비싼 옷을 입어도 책 살 돈이 충분할 테니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