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 발명 - 지식 편집자를 위한 12가지 생각도구 아로리총서 20
정상우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서문에서부터 지은이의 세심한 정성과 깊은 고민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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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 2012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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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했지만 패배하지 않은 영웅의 이야기

최민석의 장편소설 『능력자』가 말하는 것

 

 

이 영웅은 누구인가

 

 “글러브를 끼지 않았잖아.”

(최민석, 2012: 118)

 

 “어차피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야어떻게 지느냐그래중요해사람들은 어쩌면 그걸 내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지도 모르지하지만 그 모습이 근사하지 않더라도초라하더라도보잘것없더라도상관없어헐렁한 트렁크스조명땀 냄새훈련실패로 터득한 내 스텝그걸 기다리는 링.그것만으로 충분해이 위에 있을 때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거든.”

(최민석, 2012: 217)

 

 현대사회와 영웅은 어쩌면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보다 정확히 말하자면고귀한 혈통에서 태어나고특이한 출생 과정을 겪으며성장 과정에서 겪는 남다른 시련을 극복해내고비범한 신체와 외모의 특성을 가진 영웅은 현대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세속화를 바탕으로 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영웅과 영웅적 능력은 미신(迷信)으로 치부될 뿐이다설령 어떤 사람이 영웅적 능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설화 속 이야기에서처럼 세상을 구하고 평화를 이룩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조상으로부터 비범한 힘을 물려받았다 한들 김승옥의 단편소설 「역사力士」에 등장하는 서 씨처럼 공사장에서 남들보다 약간 더 많은 보수를 받게 하는 기능밖에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영웅의 탄생 이유와 영웅의 외형은 달라지더라도 어느 시대어느 공간에나 영웅은 존재하는 법이다다만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영웅의 속성도 달라질 뿐이다현대의 영웅은 좀 더 현실과 밀착되고신화적 측면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김수진, 2012) 김수진은 스페인 작가 페레스 레베르테Arturo Perez-Reverte의 소설에 등장하는 작중인물들을 들며 그들을 과거 신화적 영웅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고단한 영웅이라고 지칭한다.

 고단한 영웅은 전통적 영웅의 초능력이나 특별한 능력과는 거리가 멀다그들은 보통 사람과 비슷하거나 특정 부분에서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능력을 갖추긴 했지만행동 여기저기에서 많은 빈틈과 엉뚱하고 모자란 모습을 자주 보인다그렇다고 높은 수준의 의협심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도덕과 질서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그리고 국가와 공동체와 같이 보통 대의라고 여겨지는 가치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고군분투할 뿐이다우리는 영웅다움보다는 평범함에 가까운 이들을 과연 영웅이라 칭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인 영웅의 모습에서 벗어나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장삼이사의 모습을 띤 주인공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일련의 움직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대단한 애국심도정의에 대한 사명감도 없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고단한 영웅에서 우리는 사람냄새를 맡으면서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김수진, 2012)는 논평처럼이러한 친숙함은 19세기와 20세기 리얼리즘 소설의 차이에서 인간들의 사는 방법 및 사고의 형태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상 엄청나게 감소되어 버렸다는 사실”(Auerbach, 2012: 726)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최민석의 작품에는 우스꽝스럽고 모자란 부분이 심심치 않게 드러나고전통적인 영웅적 면모와는 거리가 멀며영웅보다 건달이나 협잡꾼 혹은 괴짜에 가까워 보이는 영웅이 자주 등장한다공장주의 악행에 대한 분노와 세상의 멸시에 대한 억울함으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돌격할 계획을 세우는 이주노동자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 스타노크라스카 제인바라이샤 코탄스 초이아노프스키(「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독립운동 조직의 비밀요원으로 광활한 중국에서 마적단과 대결을 펼치는 변강쇠(독립운동가 변강쇠), 범상치 않은 체격과 힘을 그리고 거의 모든 일을 기억할 만큼 탁월한 기억력을 가진 이풍(『풍의 역사』), 한때는 복싱 세계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공평수(『능력자』)가 등장한다.

 그중 장편소설 『능력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최민석의 첫 장편소설 『능력자』는 소설 속 인 남루한과 공평수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다남루한은 작가다남루한은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소개하지만 이내 자신을 어디 가서 주인공이라고 말하기에 뭣한 주인공이다.”고 칭한다자신보다 더 중요한 주인공공평수가 있기 때문이다남루한은 현재 자신이 몹시 추락해 있는 상태라고 말하는데이는 공평수도 크게 다르지 않다둘의 인생은 모두 낙오한 상태비루한 상황이다.

 남루한은 유명 출판사의 신인으로 등단한 작가인데소설 내는 건 꿈조차 못 꾸는 상황이다. “게다가 통장 잔액은 3,320원이 전부다.”(최민석, 2012: 11) 이에 그는 순수문학을 잠시 접어두고 얼마 전 성인 사이트를 개설한 학교 선배 희태 형의 부탁으로 야한 소설을 쓰고 있다공평수는 한때 밴텀급 복싱 세계 챔피언으로 잠시나마 찬란한 인생을 살았지만 은퇴 후에는 장기인 화려하고 빠른 발놀림을 이용해 무도()계가 아닌 무도(舞蹈)계로 진출해 제법 이름을 날렸지만 이마저도 문제가 생겨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매미는 우주 에너지의 근원라는 주장을 펼치며 매미 연구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둘은 남루한의 아버지가 마련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데공평수는 그 자리에서 남루한이 작가라는 사실을 듣고 대뜸 자신의 자서전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남루한은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통장 상황 때문에즉 자서전을 쓰는 대가로 지급되는 돈을 목적으로 제안을 수락한다그렇게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공평수는 어느 날 남루한에게 다시 복싱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데오랜 기간 동안 치열한 훈련을 거쳐 재기전을 치르는 데 성공한다사람들은 노장의 투혼화려한 재기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그는 열광과 환호의 풍경을 보지 못 한다. 12라운드에서 쓰러진 후 끝내 일어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 속에서도한없이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자신을 구성하던 중요한 일부가 붕괴된 삶 속에서도공평수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끝까지 부여잡으려 하는 것이 있다그것은 자신만의 윤리성즉 삶을 대하는 태도다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서영채는 성석제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작중인물들을 들며 그 인물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윤리성을 언급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기로는 완강하기 짝이 없으며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갈 데까지 가고 보는 집요한 인간들이다.”(서영채, 2002) 어떤 일이 닥쳐도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다이는 그들의 신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념을 신념이게 하는 것은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태도이자 그것을 지키는 형식의 철저함이다그것이 윤리성을 만든다.”(서영채, 2002)

 끈질기고 엄격한 신념과 태도의 윤리성은 공평수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공평수의 경우를 보자『능력자』의 전반부 정도까지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일게 된다공평수는 왜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까지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초능력자임을 주장하고복싱을 다시 할 수 없을 만큼 이미 늙고 약해질 대로 약해져 버린 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싱을 하고자 하는지 말이다.

 그 의문은 1부의 마지막쯤에서 공평수와 남루한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풀리게 된다.

 

 나는 한껏 부풀고 흠뻑 젖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미안해방송에서 헛소리해서사실 난 매미 따위 몰라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하지만 이래야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그래야 다시 복싱을 볼 거야시대가 원하는 건 평범한 능력의 인간이 아니라,미쳐 버리더라도 평균 이상의 능력……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니까.”

 () “완벽해야 해.”

(최민석, 2012: 120)

 

 그는 자신의 다짐이자 바람이 헛말이 아님을 증명하듯이 섬에 들어가 미친 듯이 훈련에 임한다그가 뻗는 것은 주먹이지만그가 하는 것은 복싱이지만그의 행위에는 어떤 주장이 담겨 있는 것 같”(최민석, 2012: 169)이 말이다그의 진지한 신념과 태도가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은 양정팔과의 타이틀 대결이 막바지게 이르렀을 때다그는 마지막 12라운드를 앞두고 남루한에게 이렇게 말한다그 말은 그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다

 

 “난 끝까지 버텼어난 포기하지 않았어알지꼭 그렇게 써야 해.”

(최민석, 2012: 211)

 

 그러나 남루한은 끝내 쓰지 못 한다그의 자서전을 쓰는 일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미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으므로젊은 날에 획득한 챔피언 벨트가 승리로아니 어떤 승리보다 더욱 값진 패배로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냈으므로”(최민석, 2012: 211)

 

그의 이야기는 전염되고 이어진다

 

비운의 선수게으른 천재시대가 몰라본 선수이런 말 들으면서 자위할지도 모르지그건 정말 허망한 자위일 뿐이야평생 그렇게 변명할 텐가나는 지금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최민석, 2012: 160)

 

 고시원에 돌아오니 그의 닳은 복싱 슈즈가 책상 위에서 초라한 등불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닳은 슈즈가 무척이나 부러워 보였다그 슈즈를 보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최민석, 2012:218)

 

 서영채는 우리가 왜 깡패의 이야기가 사랑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그들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자신의 신념과 태도를 지키려 하는 인간은 지금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실종된 인간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깡패의 질서는 자본제가 식민화하지 못한 영역”(서영채, 2002)이다자본이 물신화되고 인간관계가 손익계산서에 따라 언제든지 폐기되고 대체되는 모습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깡패 이야기의 세계에서 물신화되어 있는 것은 인간관계다.”(서영채, 2002) 그들의 삶과 인간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묘한 공감아슴푸레한 감동을 느낀다.

 이는 공평수에 대해 남루한이 갖고 있는 태도의 변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남루한은 공평수를 처음에는 정신병자 취급하고 자서전의 원고료를 제공하는 사람으로만 여긴다그를 은근히 무시하고 얕잡아 본다당연히 자서전에도 그리 열심이지 않다. “어차피 내 이름은 책에 안 넣을 거니까”(최민석, 2012: 80) 말이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그의 인생을 이해할수록이전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공평수를 다른 누구와도 바뀔 수 없는인간 공평수로 대하게 시작한다자신의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진정으로 감동한 것이다그리고 그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공평수의 자서전을 쓸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젖어 들었다. (나는 그로 인해 나를 돌아보고앞으로의 나를 내다보고 있었다어느덧 그가 은퇴 경기를 승리로 빛내 주길 바랐다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랐다그래서 그의 자서전 마지막 장이 아름다운 승리로 끝나길 바랐다.”

(최민석, 2012: 185)  

 

 남루한의 변화는 공평수를 대하는 마음가짐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나타난다그는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예지를 끼고 있는 출판사들이 문예지에 발표한 소설들만 인정하는 풍토”(최민석, 2012: 16) 때문에오래 사귄 여자친구와의 결혼 자금 명목으로 소설 쓰기를 멈춘 상태였다사실 그러했기 때문에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루한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공평수와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그를 닮아간다그의 진지한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그의 모습을 기준으로 자신을 삶을 비춤으로써 반성하기도그의 말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하면서 말이다그렇게남루한은 다시 소설을 쓰겠노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이상하게도 저 인간에게 자극받아서 쓰기로 했으니적어도 저 인간보다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공평수가 10연승을 하건다시 챔피언이 되건분야는 다르지만 더 나은 소설을 써야겠다 싶었다.

(최민석, 2012: 172)

 

 그는 글을 쓰면서 자아를 마주했고 나아가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비록 몸은 2평도 채 안 되는 좁디 좁은 고시원에 있지만그는 공간의 범위는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 개념이며,그 넓이 역시 신체가 움직이며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떠다니며 규정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최민석, 2012: 173) 어느덧 남루한은 공평수가 가치관과 삶의 태도에 전염된 것이다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타인의 평가와 시선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인정과 가치에삶의 방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너절해져도 찢어지진 않는다.”(최민석, 2012: 220) 그렇게 그는 공평수가 그랬던 것처럼자신에게 주어진 시합인 소설을 향해 달려간다.

 

그의 이야기는 어떻게 말해지는가

 

 그는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썼다이미 그는 아름다운 인생을 완성했으므로그의 삶은 이미 하나의 완벽한 경기가 되었으므로나의 서투른 문장으로 그가 이뤄 낸 삶의 색채를 한정할 수 없었다.

(최민석, 2012: 219)

 

 앞서 언급했듯이 공평수는 남루한에게 자신의 자서전을 써줄 것을 의뢰한다남루한은 그의 자서전을 쓰지 않지만소설은 마치 공평수의 자서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소설 속 화자는 주인공 공평수의 행동과 생각에 이런저런 주석과 해석을 덧붙이지 않는다대신에 그건 뭐예요왜 그랬어요하고 직접 묻는다질문을 받은 공평수는 이에 자신만의 단어와 리듬으로 설명하고 대화한다

 이는 등장인물들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발언과 저자 자신의 발언 사이의 한계를 모호하게 하는 수법(Auerbach, 2012: 715)이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저자가 과연 소설의 밖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분명치 않아진다.”(Auerbach, 2012: 715) 최민석은 이러한 말하기 방식을 통해서 저자 중심의 단일한 관점이 아니라보다 다양한 각도와 열린 관점으로 독자가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는 이처럼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저자의 개입 정도를 경제적〮문화적 평등의 증대 및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혼합과 차이의 감소를 비롯한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고 파악한다. “현재 여러 다른 인간들의 우연적인 순간의 내면과 외부를 편견이 없이 정확하게 묘사하는 작가들의 그 태도에 가장 구체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Auerbach, 2012: 726)이라고 말이다.  

 『능력자』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저자가 공평수의 말을 전달하는 방식이다공평수가 하는 말은 독자로 하여금 피식하는 웃음을 일게 한다. “니 말 마이 들었다 아이가-끼우동!” “이거 오줌보가 홍금보네” “이야기 했다 아이가-미가제!” 같이 방언이 섞이고 맥락에 개의치않는  농담을 늘어놓더니남루한이 자서전을 쓰겠다고 하자 그래자아아아……(이번엔 우사인 볼트와 벤 존슨이 이어달리기로 지구 열댓 바퀴는 뛰는 느낌이었다)…… 아아알 생각했다내 자서전 써가 우리 세상을 함 뒤집어 볼 수 있다 아이가-츠나베!”라는 역시나 정체불명의 언어유희로 의지를 다진다.

 이기호의 소설 「버니」 속에서 표준어에 구애받지 않고 특정 계층과 지역의 방언이 그대로 재현된 것을 두고 서술자의 목소리가 어떤 계층의 방언과 일치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한 사회적 정체성의 표준화 또는 전체화가 거부되는 효과가 발생하며, “계층방언의 서술음성화는 그 계층의 정체성을 공세적으로 현시하는 것이면서 나아가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대한 불신을 함축하는 것”(황종연, 2002: 176)이라는 문학평론가 황종연의 논평처럼공평수의 말을 자르거나 수정하지 않은 채 전하는 것은 단일하고 일률적인 규칙에 일종의 균열을 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그뿐만 아니라 표준어로 재현되지 않고 그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는 공평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이와 같은 공평수의 유쾌한 농담과 재간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최민석의 허풍과 풍자는 이야기가 자못 진지해지고 엄숙주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다웃음과 유쾌함을 유지함으로써 이야기의 재미를 더함은 물론이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초능력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최민석, 2012: 187)

 

 『능력자』가공평수가 쌓아가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황종연은 장정일과 최인석의 소설 전반을 돌아보며 그 핵심에는 비루함비루한 것이 있다고 했다그는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행로가 빚어내는 이야기에서 불우한 사람들의 진정성을 발견한다범죄자일탈자에 대한 90년대 젊은 작가들의 열광에는 건전한 도덕적 감각이 보이는데그것이 진정성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진정성은 실정적으로 정의된 어떤 행위나 상태를 표시하지 않는다그것은 오히려 부정의 용어이다.진정성은 진정성이 부재한다는 인식 속에진정성을 추구하는 행동 속에 존재한다진정성 추구의 기본적인 충동은 그것이 어떤 내용의어떤 품질의 삶이든지 간에 개인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려는 파토스이다진정성의 파토스는 개인으로 하여금 그의 삶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원칙과 일치하는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자아감정신념과 일치하는가를 묻게 한다따라서 그것은 개인 스스로 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모양을 만들려는 열정을 포함한다진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개인의 자기 창조적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진정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기성의 윤리적 질서와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사태이다.

(황종연, 2001: 31-32)

 

 황종연이 말하는 진정성과 앞서 언급한 서영채의 신념으로서의 윤리성에서는 비슷한 면이 발견된다둘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결과와 이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영향받지 않는 마음과 태도에 관한 것이다추구하는 가치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자아에 있다그리고 이러한 지향을 향한 철저한 태도를 보이는 인물은 기존의 질서와 그것에 포함된 억압과 구속위선과 부자유에 대해 필연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전복을 시도한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억압의 기제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대항할 능력의 도덕적 원천은 진정성의 관념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황종연, 2001: 32)

 

 “그들은 나체주의자들이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외설도 모른다때문에 이런 깡패들의 논리는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자본제의 질서가 지니고 있는 위선과 표리부동을 비추는너절함과 소심함과 교활함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그들은 인간관계를 물신화함으로써 화폐의 물신화를 격파해버리고시대착오로써 현재의 현실을 되비춘다.

(서영채, 2002)

 

 우리는 여기서 공평수의 행동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그는 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매미와 초능력에 집착하고 복싱 경기를 치르고 싶어 했을까공평수는 자신의 행동으로 공평수는 초능력자가 되기를 강요하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어버린 치열한 세계결과와 성과만을 따지는 세상의 법칙멈추지 않는 자기학대와 극기가 미덕으로 칭송받는 풍토에 자기 몸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공평수가 전한 말을정확히는 공평수에게 들은 말을 전하는 헤드의 말을 가능한 한 자르지 않고 전할까 한다.

 

 “스무 살엔 챔피언만 되면 모든 것이 알아서 내 발 앞에 다가올 줄 알았어그런데 막상 챔피언이 되고 나니까다가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가진 거라곤 사진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나 쓸모 있는 챔피언 벨트가 고작이야그것도 도금이라고후배들을 길러 보려 했지만 제대로 안 됐고뭐 춤이야 말할 것도 없고아무튼몇 년 동안 그런 시간을 보내다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들어서 떠올려 보니,그건 모두 내가 뭔가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었더군.

 (다 실패해 버렸단 말이야챔피언이 돼도방어전에 패배하면 실패한 복서야. (결국평가에 따라 실패와 성공이 갈리는 거라고.

 (그러니까우리는 평가에 목을 매고 평가에 울고 웃는 이상줄기차게 평가만 쫒아가게 돼그건 너무나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나를 봐챔피언이지한 번 진 걸로 영원한 패배자야게다가링 안에선 이겨 봤다고 쳐링 밖에선나는 완벽한 패배자야. .

 (결국 능력의 세계는 끝이 없는 거야끝없는 자기 학대그래서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인지 노예인지 알 수조차 없는 상태그걸 노력이라 포장하고극기라 부르지교묘한 말 바꾸기야그건 자신을 이기는 게 아니라자기 탐욕의 노예가 되는 거라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건 초능력이라고무슨 말인지 알겠어초능력이란 말이야.초능력!

 (그러니까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즉 초능력자를 미치광이로 보이게 할 필요가 있어그들이 비정상이라는 걸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내가 빠르지도 않고세상의 사다리를 잘 오르지 못한다 해도그게 보통이고정상이라는 것을아니 그게 도리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야곘어세상이 이대로 흘러가면 결국은 모두 초능력자가 되어야 해이게 미친짓이라는 걸 누군가는 증명해 내야 해완벽한 미치광이가 초능자의 말로가 어떤지 보여 줘야 한다고그래서 평범한 능력으로만으로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고대수로운 인물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보잘것없는 시간들이 값지다는 것을…….”

(최민석, 2012: 187-191)

 

 로즈매리 잭슨Rosemary Jackson은 환상 문학과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분석했는데그는 환상이 전혀 생소한 인간 세계를 그리는 것도 무한히 초월적인 것도 아니라고 가리키며환상성의 전복적 기능에 주목했다환상적인 것의 문화의 말해지지 않는 부분보이지 않는 것즉 지금까지 침묵당하고 가려져왔으며 은폐되고 부재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온 것들을 추적”(Jackson, 2001: 12-13)하는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 “환상은 제도적 질서와 대립한다.”(Jackson, 2001: 94) 환상 문학은 금기를 위반한다상상력을 무기로 실재를 전도시키고 전복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는 않는다.”(Jackson, 2001: 33) 낯익은 세계를 낯선 무엇으로 바꾼다. “환상은 이 세계의 요소들을 전복시키는 것낯설고 친숙하지 않으며 그리고 명백하게 새롭고’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산출하기 위해 그 구성 자질들을 새로운 관계로 재결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Jackson, 2001: 18)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자신에 의사에 반하며 드러낸다그 거리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김현, 1991: 52)라고 썼다그렇다고 문학이 그 간극을 메꿔주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대신에 문학은 불가능한 것을 꿈꾸게 한다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김현, 1991: 52-53)

 공평수와 남루한그리고 최민석이 길어 올린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우리가 바라야 할 불가능한 꿈이 무엇인지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제시하는가.    

  

 

<참고문헌>

 

Auerbach, Erich(2012), 『미메시스』김우창〮유종호 역민음사서울

Jackson, Rosemary(2001), 『환상성전복의 문학』서강여성문학연구회 역문학동네파주

김수진(2012), 「페레스-레베르테의 고단한 영웅’ 의미 고찰『공성전』을 중심으로」외국문학연구 Vol. 47,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김현(1991),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문학과지성사서울

서영채(2003), 「깡패웃음이야기의 윤리」문학동네 Vol. 10 No. 2, 문학동네

최민석(2012), 『능력자』민음사서울

황종연(2001), 「비루한 것의 카니발」『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서울

황종연(2012), 「매 맞는 아이들의 정치적 상상력」『탕아를 위한 비평』문학동네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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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차이즈가 아니면 갈 데가 없어

 

 한국의 프랜차이즈화 정도를 새삼스럽게 다시 실감할 때가 있는데, 친구와 약속 장소 정하기 위해 대화를 나눌 때다. 강남에서 볼까, 종각에서 볼까, 아니면 홍대입구에서 볼까. 그럴 때마다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다. “사실 어디든 다 똑같지 않은가?” 실제로 홍대입구, 종각, 강남, 서울 어디를 가든 온통 프랜차이즈로 뒤덮여 있다. 서울뿐 아니라 지역 고유의 특색을 자랑하는 동네를 가도 비슷하긴 마찬가지다. 프랜차이즈 편의점, 치킨집, 카페, 식당으로 가득하다.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보지 않으면 다른 곳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는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다. 프랜차이즈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파고들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시장보다 마트를, 동네의 작은 밥집보다 유명 프랜차이즈 식당을 자주 찾지 않는가. 어느덧 우리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어버린 프랜차이즈,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프랜차이즈화에 대한 명상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조지 리처(George Ritzer)는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에서 효율성(efficiency), 계산가능성(calculability),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 통제(control)로 대표되는 맥도날드의 특성을 들어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맥도날드는 어떤 음식점보다 빠르게 정확한 양의 음식을 제공하고 전 세계에 똑같은 햄버거를 제공한다. 이는 고도의 무인기술과 통제된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맥도날드화의 또 다른 이름은 프랜차이즈화일 것이다. 맥도날드와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음식점, 상점은 전국 어디에서나 똑같은 상품을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프랜차이즈 가게로 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 속에도 문제는 분명 존재한다. 조지 리처는 합리성의 불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맥도날드화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중에 비인간화, 동질화를 꼽을 수 있다. 프랜차이즈에 일을 보기 위해 들어가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프랜차이즈라는 시스템에 접속하는 쪽에 가깝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일하는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고객과 점원은 주문을 위해 필요한 대화 외에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안에서 서로 간의 접촉은 최소화된다. 집 앞에 있는 편의점을 일 년 동안 매일같이 들락날락해도, 장을 보기 위해 항상 대형마트를 들러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1분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에 익숙해져 가끔 점원이 개인적으로 던지는 짧은 대화와 호의 담긴 질문마저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과도한 프랜차이즈화의 또 다른 영향은 전국을 빠른 속도로 동질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프랜차이즈의 확산은 곧 전국 거리의 풍경이 비슷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메산골이 아닌 한 5분만 걸으면 편의점을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이 조금이라도 모이는 곳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프랜차이즈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선다. 어디든 똑같이 펼쳐지는 프랜차이즈의 홍수 속에 새로움을 향한 호기심은 동질화와 예측가능성으로 대체되었다.    

 

프랜차이즈화된 세상에서 살아가기

 

 맥도날드화 혹은 프랜차이즈화의 문제점이 있다고 해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모든 생활을 자급자족을 통해 이룩하지 않는 한 이를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맥도날드화가 확산되기 이전의 모습이 전적으로 좋았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심지어 맥도날드화의 문제점보다 장점이 훨씬 커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조지 리처는 개인적 대응으로 최선의 비법은 맥도날드화된 세계에 갇히지 않은 채, 그것이 제공하는 최선의 것들의 장점만을 택하는 취하는 것이다. ()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또는 합리화되지 않은 체계에서 제공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맥도날드화된 체계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 리처의 말이 맥도날드화가 끼치는 비인간화, 동질화 같은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잠시나마 프랜차이즈 없이 살아보고, 그 과정에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려는 시도가 작은 시작이 아닐까. 매일같이 마주치는 편의점 점원과 몇 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지내고, 전국이 프랜차이즈의 이름으로 똑같아지는 모습이 전적으로 좋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지 리처 책의 한국 번역판 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둘 사이에 우리는 놓여있다. 그리고 어디로 향할지는 우리의 노력, 즉 맥도날드화와 프랜차이즈화가 주는 혜택과 동시에 잃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보고 생각해보려는 노력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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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수건이냐 걸레냐, 문제는 그 너머에

 

 토요일 아침,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일어났다. 10분만 더 자겠다는 안이한 생각이 참사를 불러 일으켰다. 부랴부랴 씻고 나왔다. 빨랫줄에 걸린 수건(?) 한 장이 보였다. 재빠르게 몸에 묻은 물기를 털고 집을 나섰다. 재빠르게 준비한 덕에, 아니 택시비로 6,000원을 지불한 대가로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함께 사는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XX 대박. 걸레를 수건으로 착각하고 몸 씻음. 어떻게 이걸 분간 못할 수가 있지?” 걸레로 몸을 씻다니, 심지어 그 걸레는 나흘 전부터 바닥 구석구석의 먼지를 닦아낸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몸이 근질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걸레를 수건으로 알고 한두 번 쓴 것은 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혹자는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누구나 그런 실수 한 번쯤은 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걸레와 수건을 따질 만큼 깔끔한 성격인지 아닌지 혹은 걸레와 수건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낼 만한 섬세한 시력을 가졌는지 아닌지에 있지 않다.

 그 친구는 이어 이게 다 걸레질을 한 번도 안 해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 순간 걸레로 몸을 씻었다는 찝찝함은 걸레를 잡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민망함과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나는 제대로 걸레질을 하고 걸레를 빨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나는 걸레와 수건을 분간해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걸레와 수건의 차이를 알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곧 가사노동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집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문제의 주인공은 대개 가사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한국의 경우에는 거의 남성이다. 나처럼 걸레를 수건으로 착각해 몸을 씻는 경우, 설령 그 정도의 실수는 하지 않더라도 배우자에게 이거 걸레야 수건이야?” 묻는 것부터 시작해 소금과 미원을 헷갈려 요리를 망치는 경우, 물론 정체불명의 요리를 창조해내는 사고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둘 중에 뭐가 소금이야?” 또는 국자는 어디에 있어?” 묻는 이유는 전적으로 평소에 가사노동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내가 겪었던 일은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화장실 틈새를 닦는 용으로 둔 칫솔로 양치질한 적이 있다. 이것 또한 단순한 실수,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 닦는 칫솔과 화장실 때를 없애는 칫솔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화장실 청소에 신경쓰지 않은 나의 평소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가사노동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는 사람, 한국의 경우는 대개 여성, 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가정에서 벌어지는 실수는 단순 실수가 아니다. 가정 내의 대소사에 무관심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징표다. 문제의 본질이 이러하다면 답은 간단하다.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 설거지를 할 때 그릇만 달랑 씻고 싱크대 주변에 튄 물을 행주로 닦지 않는 식의 태도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가사노동,함께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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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가족>, ‘남은 자의 몫과 남은 자에 대한 우리의 몫

 

남은 자의 몫

 

 영화 <동경가족>은 노부부의 자녀들이 사는 동경 방문으로 시작한다둘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다첫째 아들은 의사로 개원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둘째 딸은 미용실을 운영하며 남편과 둘이 오붓하게 지내고 있다노부부는 순서대로 두 집에 들른다셋째 아들은 둘의 유일한 걱정인데,공연 무대 설치 일을 한다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다영화는 오랜만에 조우한 부모와 자녀의 모습을 비추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그뿐만 아니라 단카이 세대’(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1949년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와 단카이 세대의 자녀 간의 차이를 비롯해 일본 사회의 고령화 문제를 탁월하게 짚어냈다동경의 한 술집에서 옛 친구와 함께 변해버린 일본과 늙어버린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세상의 주역이었던 과거를 추억하는 히라야마 슈키치(하시즈메 이사오 분)와 그들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삼사십대 직장인의 모습은 노년층을 바라보는 젊은층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막바지로 흘러 노부부는 동경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을 앞두게 된다하지만 슈키치는 아내와 함께 돌아갈 수 없게 된다아내 히라야마 토미코(요시유키 카즈코 분)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올 때는 둘이 함께였지만 돌아갈 때는 혼자가 된 것이다가족 모두는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지낸다슈키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망자와 생자는 죽은 날이 아니라파묻는 날 헤어지는 것”(김광규「남은 자의 몫『처음 만나던 때』)이라는 말처럼 그는 아내와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엄마를 잃은 자식들은 저마다 슬픔의 이기주의자가 된 것 같았다자기들의 슬픔만 곱씹을 뿐,

아빠의 슬픔은 위로해주려 하지 않았다반세기 가까이 함께 살아오며 사남매를 길러낸 아내를 잃은 지아비의 심정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김광규「남은 자의 몫」자녀들은 아버지를 위로하기는커녕 앞날을 걱정하기에 바쁘다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모실지에 관한 것뿐이다아버지를 어떻게 보살필지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 간다모두 각자의 이유로 아버지를 모시는 데 어려움을 표한다슈키치는 섬에 남아 혼자 지내겠다고 말한다자녀들은 아버지가 걱정스럽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하고 동경으로 올라간다그나마 셋째 아들 히라야마 쇼지(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애인 마미야 노리코(아오이 유우)와 좀 더 남아 아버지를 돌본다.

 

남은 자에 대한 우리의 몫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필립로스, 『에브리맨』​)

 

 오래된 제비집이 사그라져가고 있었다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 때문이 아니라도이제는 가장 노릇이 끝난 셈이었다서둘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혼자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차례였다아쉬운 전송을 받으며 먼저 떠난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김광규「남은 자의 몫」)

 

 쇼지와 노리코가 섬을 떠난 후 영화는 막을 내린다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남은 자 슈키치는 어떻게 살아갈까이제는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 ‘떠날 준비마저 말이다. ‘노년이라는 대학살’(필립 로스『에브리맨』)을 그는 혼자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이는 영화 속 허구도먼 나라 일본의 이야기도 아니다한국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그리고 그 상황은 일본보다 훨씬 위험하다.

 노년은 아픔가난외로움이라는 삼중고와의 싸움이다물론 형편이 나은 몇몇은 비교적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특히 온갖 질병과 급속도로 노쇠해지는 몸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고려대 박유성 교수팀의 발표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7명이 만성질환 두 가지 이상을 앓고 있으며소득 하위 20%는 자식 얼굴을 1년에 네 번도 못 보며부모 소득이 1%높아질수록 따로 사는 자식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볼 가능성이 두 배로 증가(숭실대 조사)하며노인 빈곤율이 OECD 평균은 12.8%인 반면 한국은 48.5%에 이른다게다가 전체 의료비가 100원 나왔을 때 일본은 14미국은 12원만 개인이 낸다우리는 35원을 개인이 해결한다.’(참조김수혜低소득 일자리 전전하며, 5~6년 앓다가쓸쓸히 가는 한국식 죽음’, 『조선일보』)

 남은 자가 떠난 자를 부러워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이런 상황에서 남은 자는 과연 간직한 뒷모습의 기억을 전해주고 스스로 떠날 때까지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렇게 계속해서 살아”(김광규「남은 자의 몫」)갈 수 있을까남은 자 혼자 감당하기에는 그 몫이 너무 크다남은 자의 몫을 사회국가정부가 나눠 맡아야 한다남은 자가 남은 자의 몫을 다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남은 자에 대한 몫을 해야 한다어떻게 남은 자에 대한 몫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한 지금이다.  

 


결국 혼자남게 된 슈키치.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은 사회,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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