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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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폭력을 바라보는 우회로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subjective인 것과 객관적objective인 것으로 구분한다. 주관적 폭력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즉 명확히 식별이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른 폭력을 말한다. 객관적 폭력은 두 가지로 다시 나뉜다. 첫 번째는 부르디외가 묘파했듯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징적symbolic 폭력이고 두 번째는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의 작동으로 발생하는 구조적systematic 폭력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은 눈에 잘 보이는 반면 객관적 폭력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주관적 폭력은 이미 구조적 폭력이 내재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주관적 폭력은 징후일 그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구조적 폭력이라는 배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관적으로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돼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폭력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의 정반대이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악명 높은 암흑 물질과도 같은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25

 

 지젝은 우리에게 폭력에 대해 성찰하는 우회로를 안내한다. 그것의 시작은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다. 폭력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과 희생자에 대한 감정이입은 객관적 사실을 판단하는 사고를 마비시킨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필요하지만 이는 자칫 도덕적 잣대로만 사건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식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겉모습만 살짝 바뀔 뿐 같은 뿌리에서 다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진실truth과 진정성truthfulness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젝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폭력, 그 보이지 않는 배경

 

 지젝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언급한다.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구글, 아이비엠 등이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다. 그들은 스마트하다. 창의적인 기업가로 많은 돈을 벌고 누구보다 많은 기부를 한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인 그들의 이미지를 한 꺼풀만 벗기면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p47)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그들은 공리공론적 접근을 싫어한다. 그들이 보기에, 착취당하는 단일한 노동계급 같은 건 지금 없다. 아프리카의 기아, 무슬림 여성들이 겪는 고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폭력과 같은, 해결이 시급한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는데 케케묵은 반제국주의 따위를 앞세우며 개입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대신 우리 모두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들과 정부와 기업이 공동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고, 중앙 정부의 도움에 기대는 대신 상황을 개선해나가기 시작하고, 이름표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도 관습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위기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반대 투쟁 같은 상황이다.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7

 

 그들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역설은,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 먹고 살아가는 뱀과 같다는 것이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온갖 독점으로 경쟁사를 파산시키거나 합병하고 제 3세계의 노동력을 싼 가격에 이용해 돈을 번다. 그 돈으로 다시 그들에게 기부를 한다. ‘지독한 사업가모습은 자선 행위와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인도주의의 좌장의 모습으로 감춰진다.

 그들이 막대한 기부를 하는 것은 개인적인 특성에서 기인한 일이 아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의 순환이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경제적 관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행위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하여 균형을 다시 잡아가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 국가의 주도에 의한 강제적 재분배를 교묘히 비껴가는 것이다.

 

잘라라, ‘인도주의적인 그 손길을

 

 큰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한다면 작은 차원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역시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손길에 우려를 표했는데,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든 자원봉사자든 인도주의적 손길을 전하는 사람이 배제의 사슬을 단단히 하는 중요한 고리라는 것이다. , 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난민을 배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요원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겉으로는 인도주의적 행동이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배제의 목적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폭발을 유발하는 파괴적인 원한을 줄이기 위해 인도주의적손길로 그들이 사는 곳을 비교적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놓고, 자기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담장을 높이 쌓아 잠재적 범죄자들과 분리하는 것처럼 무장을 한 경비원들로 하여금 철저히 그들을 격리 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부패[인간쓰레기들]의 불쾌한 악취가 원주민들의 거주지에 도달하지 못할 만큼 먼 거리, 이것이 그들의 영원한 거처인 임시 수용소의 위치를 선정하는 주요 기준이다. 그런 장소가 아닌 곳에 있는 난민은 장애물과 골칫거리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 들어간 이들은 잊힌다. 난민을 그런 곳에 가둬 놓고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점에서, 그런 격리를 궁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일부의 연민과 또 다른 일부의 증오는 서로 협력해 난민을 멀리 격리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72

 

이는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을 함께 있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 해로운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고자 하는 압도적인 바람뿐만 아니라 도덕적 올바름righteousness을 원하는 절실한 바람도 충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인 것이다.”(P. 72)    

 

복지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앞서 말했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모습은 과거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지젝이 언급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가 대표적인 예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고 교황에 의해 성인 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주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그 자신이 다스렸던 콩고의 자연자원 착취라는 대규모 경제계획이 낳은 파국적 결과들을 적당히 중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진실한 인도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콩고는 그의 개인 영지였으니까!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P41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복지국가의 형성과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업의 복지에서 노조들이 주창하는 것들 중 핵심은 조합원의 몫을 늘리는 것이다. 그 사이에 비정규직의 권리와 복지는 들어설 틈이 없다. 좀 더 넓게 국가적 차원을 보자면, 잘 갖춰진 사회안전망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기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박노자 교수는 한 칼럼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당연히 노르웨이의 최대 기업인 스타트오일 (국영 석유회사)의 노조는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조합원의 임금 인상과 복지” 등을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기업이 이윤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컨대 자연환경 파괴적인 로포텐 섬 (관련링크) 근방의 유전 개발 문제라든가 알제리아와 같은 최악의 독재국가에서의 자원 “개발” (사실상 약탈) 참여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환경 본위의, 국제연대 본위의 입장을 취하겠습니까?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조직노동과 자본은 비록 각각의 “몫”을 놓고 늘상 긴장을 하고 있지만, 또 동시에는 ()노르웨이 운영에 있어서는 “동업자”이기도 합니다. 노르웨이 자본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앙골라나 방글라데시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공범”은 아닐까요?

노르웨이의 굴지의 재벌인 통신사 텔레눌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안전장치없이 일해야 하는 13세 아이들에게는 텔레눌의 “해외 경영”을 반대한 적도 없는 그 노조는 과연 무엇일까요?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레디앙칼럼)

 

 물론 콩고의 사람들을 대학살 했던 레오폴드 2세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다소 과격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원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역설로 들리지만, 실은 가장 내구력이 있고 가장 튼튼한 자본주의는 바로 다수를 공범이랄까, 배부른 감옥의 “수인 겸 간수”랄까 하여튼 체제의 순량한 “일분자”로 만드는 복지자본주의입니다라는 박노자 교수의 말을 되뇔 필요가 있다.

 

환상은 금물

 

 여기까지 전개된 생각에 대해 누군가는 냉소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냉소가 아니라 의심이라고, 그리고 지젝의 조언대로 주저 않고 바로 대답하겠다. “!, 바로 그겁니다”. 어설픈 열정과 온정주의은 주관적 폭력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들고 좋은의도가 오히려 객관적 폭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폭력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려야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생각은 분명히 무기력하지만 생각이 없는 행동은 효력이 없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도덕적 부패와 인간적 고통을 엄청나게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P38

 

 

참고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후마니타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박노자, <복지국가의 명암>,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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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리뷰는 확실히 공들여서 쓴 느낌이 드는군요. 이 책 50% 세일할 때 살까 말까, 하다가 적립금 한도가 약간 넘쳐서 책 하나를 빼다가 그만 이 책을 뺏는데 좀 아쉽네요. 아직도 반값 하나 모르겠네요..... 알아봐야겠다...

오, 아직도 반값이네 !!! 그나저나 이런 글이 좀 핫 코너에 소개되어서 널리 읽혀야 하는데 좀 아쉽습니다.

까레이 2014-01-04 21:09   좋아요 0 | URL
오미 감사합니당ㅋㅋㅋㅋ 쓰다보면 언젠가 실리겠죠??ㅋㅋ
강력추천입니당 주제도 좋고 역시 지젝 이빨(?) 잘터네요ㅋㅋ 농담, 문학, 소설 다 끌어다 쓰는듯해요ㅋㅋ
근데 뒤로가면서 저한테는 좀 어렵더라구요
그놈의 라캉과 헤겔ㅋ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21:48   좋아요 0 | URL
라캉 쉽게 이해하기 힘들죠. 라캉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이해해야 하고... 뭐 그런 족보를 캐야 하니, 더군다나 지첵 번역ㅇ 쉬지가 않은 가 봅니다.
하여튼 반갑이니 얼릉 사두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