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읍시다. 지금 우리의 지성 네트워크를 위하여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고 해야 할까. 집에서 혼자 읽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는 일, 즉 독서 토론회에 참여한지 6개월이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시작해 지금은 학교를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독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도서관은 친목이 아니라 침   묵의 공간이, 독서실이 되었다. 독서에서 행위는 배제됐고, 책을 읽을수록 마음의   양식이 살찌니 정신의 비만이 우려된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정열과 혁명의 책   도 혼자 읽는 조용한 독서의 대상일 뿐이다. 내가 읽은 책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노동이나 자본, 탈핵 같은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책을 혼     자 읽으면 뭐하나.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 그 교양을 쌓아서 어디에 쓰지? 그것     이 삶을 더 비참하거나 힘들게 만들지는 않는가.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게 느껴지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특히 계급, 세계화 같이 거대한 담론을 다룬 책이라면 그 강도가 훨씬 심해지는데, 알아봐야 씁쓸한 이물감만 커질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옛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착각)라는 심보선 교수의 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함께 읽는다면 다르다.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때로는 날선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의기투합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장대한 행동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나와 다른 성별, 나이, 지역의 사람과 토론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과 사고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생각, 나의 일상, 나의 주변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모든 것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혼자 읽는 것이 나와 내가 판단한 저자의 모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 소통이라면 함께 읽는 것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들 각각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들이 만들어내는 다대다(多對多)’ 소통이다. 토론의 인원이 5명이라면 그 5명에 더해 그들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 5명이 더해져 10명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토론 속에서 경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난다. 이택광 교수는 프랑스 철학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활발하고 자유로운 지식인 공동체를 들고 있다. 이 공동체의 가운데에는 에콜 노르말 대학이 있었고, 거기에는 루이 알튀세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에콜 노르말과 알튀세르가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알튀세르가 한 일은 학계의 지식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연 것뿐이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을 지칭해서 개념의 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과학과 철학의 개념들이 서로 부딪히고, 예술과 정치학이 서로 조우하는 갈등과 종합의 과정이 이런 초청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철학자로 언급하는 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 또는 조르지오 아감벤 같은 이론가들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통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이런 사실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철학에서 수학〮철학〮정치〮예술〮신학, 심지어 사랑까지도 공평하게 자신의 입장과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콜 노르말의 분위기는 지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성차의 한계도 넘어서는 사상의 용광로였다고 발리바르는 회상한다. 이런 유니섹슈얼이라고 부름직하다는 발비라브의 말에서, 새로운 사상이 출현 할 수 있는 조건은 기존의 한계들을 극복하는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물론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토론회가, 그 외의 수많은 토론회들이 과거 개념의 당에 비하면 규모와 수준에 비하면 한참 모자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적인 한계와 성차의 한계를 넘어서 함께 얘기를 나누고 사유하는 정신만은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택광 교수가 같은 책에서 “(인문학이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비판적 사유는 푸대접을 받는 상황에서)막연하게 인문학의 가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위치한 곳에서 나의 깜냥으로 나름의 지성의 네트워크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읽읍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참고

아직도 책을 혼자 읽으시나요?,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자음과모음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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