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예찬, 우리 꼰대는 되지 말자

 

 신문은 정말 싸다. 가판대에서는 한 부에 800,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과 똑같다. 정기구독을 하면 신문 한 부의 가격은 더욱 낮아진다. 하루에 500원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싸도 너무 싸다. 특히 한겨레 신문 토요판이 그러한데, 몇 백원을 내고 사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삼각김밥 사먹을 돈으로 가판대에서 신문 한 부를 사고 한 달에 치킨 한 마리 덜 시켜먹고 신문 정기구독을 하자. 몸은 지방이 줄어 날씬해지고 머리는 지식과 상식으로 탄탄해질 것이다.

 

신문, 세상을 열어주는 창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될까. 초능력과 재력을 동시에 갖고 있어 하루가 48시간이고 전세기로 세계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비슷할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지는 나라, 지역, 성별, 경제적 수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대개 그것들에 기초한, 그것들과 관련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환경을 둘러싼 경계를 초월하는 세상을 접하는 것을 직접 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간접 경험에 보다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에 책과 신문이 있다. 그 안에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를 통해서 나의 국적, 성별, 계급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과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카메룬의 소설과 칠레 철학자의 책을 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프랑스의 『르 몽드』와 독일의 『슈트도이체 자이퉁』을 읽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매달려 있는 줄은 무엇일까

 

 미국의 과학자 샘 해리스와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샘 해리스는 “꼭두각시는 자기를 조종하는 줄을 사랑하는 한 자유롭다”라고, 피터 버거는 사회학이 우리가 사회의 꼭두각시임을 보여주지만 그냥 꼭두각시와 달리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발견이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우리가 사회라는 줄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라고 하더라도 그 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회학이 아니라 어떤 공부라도 그것은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고 이는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 이후에 그 줄을 사랑할 것인지, 줄에게 반항할 것인지를 택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위 때문에 길이 막혀 짜증난다고 욕을 하는 것과 시위가 벌어진 이유와 시위의 정당성을 생각해 본 후에 비판을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신문을 읽는 것이 바로 그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매달려 있는 줄 즉 정치, 경제,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언론을 믿지 않는다고?

 

 지인들과 가끔 신문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종종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언론, 특히 그 중에서도 신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어 당황스러웠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그럼 뭘 믿는데?”. 물론 언론의 공신력이 낮아진 데는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진영논리의 스피커 노릇을 해온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기자들은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의식을 잃은 채 특정 진영의 종군기자, 개별 언론사 샐러리맨이 돼왔던”(권석천, 『중앙일보』, 2013. 8. 28.) 사실이 그 말 속에는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모든 신문을 거짓말쟁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신문을 (안 믿으니 그렇겠지만)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조중동이라서 비난하고 한겨레는 한겨레라서 비난한다. 내가 『중앙일보』를 들고 있을 때는 꼴통보수라고 눈을 흘기고 『한겨레21』을 들고 있을 때는 빨갱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홍세화 씨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생각의 좌표』에서 얘기했다.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견해는 견고하다. 택시기사는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고, 또 어떤 계기로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한겨레를 읽지 않은 채 품고 있는 한겨레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나처럼 같은 택시노동자 출신으로서 조금 전까지 죽이 맞아 얘기를 나누었고 지금 한겨레에서 일하는 사람의 한겨레는 그런 신문이 아닙니다라는 얘기를 통해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할 수 없다.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 택시기사는 자신이 빠진 함정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까?

   택시기사 뿐인가? 우리는 정보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다. 사람들은 민주노총에 대해,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 ‘알 필요가 없는 것’,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되어 있다.  

홍세화, 『생각의 좌표』

 

 신문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치 개입이 철저하게 배제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가치와 생각을 접하고 사실에 대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흔히 요즘 정치권의 문제로 소통의 부재를 꼽는다. 모든 사람이 불통을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가? “너나 잘해따위의 말로 정치권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한 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가 한 강연에서 꼰대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꼰대는 달리 꼰대가 아니다. ‘꼰대는 남이 무슨 얘기를 하든 자기가 할 얘기를 머릿속에 이미 정해 놓는다. , 상호작용으로서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의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꼰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을 살짝 바꿔서 얘기하자면, ‘꼰대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해서 남의 생각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기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 대해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신문을 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수구보수라고 한겨레를 빨갱이라고 욕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우리가 핏대를 세우고 그토록 비판하던 불통의 모습이자 꼰대의 행동이다.

 ‘정보의 홍수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일 매일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접하고 싶은 정보만 접한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신문은 나와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트위터에서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만 맞팔을 하고, 페이스북에서 역시 내가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사람과만 친구를 맺는다. 정보는 홍수를 이루지만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무람없고 건방지게도 신문을 보는 방법을 추천해보려 한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무 자르듯 나누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조심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만, 자신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히 보수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중에 하나를 보기 바란다. 반대로 자신이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읽기 바란다. 이 방법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지점의 신문을 본다고 갑자기 그 쪽으로 쓸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영화 <생활의 발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살짝 바꿔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꼰대는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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