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나의 얼굴을 엿보다 - 이 원 규


  
음력 열엿새의 달이 지기도 전에 
햇살 쏟아지는 섬진강의 아침
또 하나의 내가 일어나
열린 문틈 사이로
곤하게 잠든 나의 얼굴을 엿본다.

강 건너 오산의 사성암
어제 이맘때처럼 그대로이고
박새며 산까치 떼가 날아와
나의 잠을 깨우는 것도 여전하지만
날개도 없이 노고단을 내려온
또 하나의 내가 있어
이 아침 햇살이 새롭다

달빛과 햇살이 만나는 지점에
섬진강이 다시 흐르고
차마 깨울 수 없는 나의 잠 속에
노고단의 구름이 따라와 머물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삶은 때로 이렇게 평화로운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삶은 때로 이렇게
죽음과도 같이 순결한 것이다

잠든 나의 얼굴을 엿보는 이 아침
앞마당의 은행나무 제가 먼저
아랫도리부터 환하게 물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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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 작  - 황 지 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奇蹟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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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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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해빠진 독서 -기형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 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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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빛의 궤적 - 조용미

 

 

지는 목련 아래의 비참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지 말자

누렇게 말라가는 꽃잎은,

 

저 고요히 흘러내리는 커다란 흰 귀는

너의 작은 죄를 들으려 바닥으로 내려왔다

 

타 들어가는 목련 잎들에서

상한 향이 난다

 

물고기 썩는 내음이 풍긴다

 

나무 위에서 상해가는 흰 귀들이

너를 괴롭히는 봄

 

비릿한 향이 저 적막한 생의

소멸의 궤적이라면

 

별의 궤적 사소하고 은밀한 죄의 궤적

몰락의 궤적 흰빛의 궤적

미혹의 궤적 또한 저리 비린 길을 걷는 걸까

 

나무 아래 죽은 물고기들이 수북하다

 

부패가 진행되면서

연둣빛 새살은 돋아난다

 

지는 목련 아래의 비참은 밤늦도록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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