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나의 얼굴을 엿보다 - 이 원 규


  
음력 열엿새의 달이 지기도 전에 
햇살 쏟아지는 섬진강의 아침
또 하나의 내가 일어나
열린 문틈 사이로
곤하게 잠든 나의 얼굴을 엿본다.

강 건너 오산의 사성암
어제 이맘때처럼 그대로이고
박새며 산까치 떼가 날아와
나의 잠을 깨우는 것도 여전하지만
날개도 없이 노고단을 내려온
또 하나의 내가 있어
이 아침 햇살이 새롭다

달빛과 햇살이 만나는 지점에
섬진강이 다시 흐르고
차마 깨울 수 없는 나의 잠 속에
노고단의 구름이 따라와 머물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삶은 때로 이렇게 평화로운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삶은 때로 이렇게
죽음과도 같이 순결한 것이다

잠든 나의 얼굴을 엿보는 이 아침
앞마당의 은행나무 제가 먼저
아랫도리부터 환하게 물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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