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 원재훈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새가 날개를 가지듯
꽃이 향기를 품고 살아가듯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생의 비밀을 적었다.
아이의 미소를, 여인의 채취를, 여행에 깨우침을,
우체통은 간이역이었다.
삶의 열차가 열정으로 출발한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었다.

그래 그런 날들이 분명 있었다.

낙엽에 놀라 하늘을 본 어느 날이었다.
찬바람 몰려왔다 갑자기 거친 바람에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그것은 상처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나의 우체통에는 낙엽만 쌓여 가고
하늘은 상처투성이의 어둠이었다.
밤엔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데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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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호우주의보 - 김종제

                            

 

그늘 한 점 없는
온난전선의 내 생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호우주의보 내려졌으니
한 석 달 하고도 열흘은
폭우 쏟아진다고
부실하게 지은 내 몸 어딘가에서
산사태 나고 축대 무너지기 십상이다
축축한 살에서 곰팡이 슬고
습기 찬 뼈의 금 가는 소리 들린다
내 생의 어느 때
주의보 내리지 않은 적 있었나
한랭전선이 머물렀던 지난 겨울에는
외롭게 홀로 독하게 지내보라고
대설주의보와 한파주의보가 같이 내렸고
봄에는 꽃 같은 사람 만나서
눈 멀어지고 심장이 너무 심하게 띈다고
한 차례 주의보 내리고
여름에는 땡볕 같은 사랑에 쓰러질까
폭염주의보 내리고
가을에는 실연으로 낙엽주의보에
내 생은 온통
내가 아닌 주위에
주의하고 살아온 것 아닌가
물속이든 눈속이든 아니면 불속이든
푹 담갔다가 쑥 건져낸
같다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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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한때 - 천양희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을 깬다.

공터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생()!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루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 속에서 달려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

 

 쑷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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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한계선 - 박 정 대

 

 

풍경들을 지나서 왔지

지나온 풍경들이 기억의 선반 위에

하나둘 얹힐 때

생은 풍경을 기억하지 못해도

풍경은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아주 머나먼 곳에 당도했어도

끝끝내 당도할 수 없었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풍경처럼 살아

풍경, 풍경

생을 노래하지

 

 여우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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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 이 하루 - 이태수

 

 

 

어디를 헤매다가 마음아,

곤죽이 되어 돌아왔니? 구겨진 길들

발목에 매단 채 봉두난발(蓬頭亂髮),

해진 옷자락으로 되돌아왔니?

하늘의 푸른 잉크 빛 속으로 아득하게

새들이 빨려 들어가는 유월 한낮.

모란이 뜨락에서 꽃잎을 떨어뜨리는 동안

가까스로 햇살에 몸을 맡겨

제정신이 드는 마음아,

이 풍진(風塵) 세상을 어찌하리.

누군가 산을 넘고 물 건너 멀리 가보아도

끝내 눈물 흘리고 돌아왔다 하지 않니.

바람 잘 날 없어도 낮게 비워보면

작은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실로 가련한 마음아, 네가 깃들여

길을 트고 걸어야 할 지금 여기는

그래도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 올려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그늘지고 헐벗어도 다스한 가슴들이

한낮에도 조그맣게 불을 밝혀주어,

물러서던 길도 환해지고 있지 않니?

나무들이 껴입은 초록빛에 스며들며

물방울처럼 글썽이는 유월, 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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