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도넛을 나누는 기분은 알겠다. 도넛 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빵 이름을 넣는다면 같은 마음이 될 테니까. 스무 명의 시인이 이런 마음으로 시를 담아 놓은 책이다. 유희경 시인의 서문을 읽으면 가벼운 듯 간절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시 쪽으로 한 발씩 다가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나는 느껴지는 만큼 다가선다. 그리고 보니 한층 쓸쓸해진다. 장차 더없이 지겨워질 여름의 길목에서.
여러 시인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시집을 읽으면 좋은 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점도 있다. 좋은 점이라면 몰랐던 시인의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일 그리고 좋아하는 시인의 글을 반갑게 맞이하는 일, 반대로 그렇지 못한 점이라면 좋아하는 시인의 글을 몇 편밖에 못 만나는 일. 나로서는 섭섭한 마음이 더 크다. 어쩔 수 없지만.
시가 어렵다느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느니 하는 분들에게 권한다. 쉽게 읽힌다. 읽힌다고 해서 읽은 만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낯선 경계심이나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을 시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또한 내 생각이겠지만 읽어 보니 그렇다. 유희경 시인의 말처럼 읽어 보자고, 노력해 보자고, 살아 보자고 하는 듯하여.
박준 시인의 글 세 편이 오롯이 남는다. 만족해야지.
176-177
골목에서 마주친 길고양이가 나를 멀리 피해 가지 않는 일, 막 구운 식빵이 나오는 빵집의 시간표를 알고 있는 일, 길 건너 커피를 사러 가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새삼 떠올리고는 중간에 발길을 돌리는 일,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만나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듣는 일, 한참을 서성거리며 머물러도 눈치 보이지 않는 책방을 찾는 일, 책방 서가와 내 방 책꽂이가 어느새 비슷하게 펼쳐지는 일, 좁은 길을 우르르 달려가는 한 무리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이름은 몰라도 별명만큼은 알고 있는 일, 매번 무리 끝에서 달리는 아이와 눈인사를 하는 일, “늘 똑같이 살 필요가 뭐 있어? 어떤 모습이든 내 모습인데. 이번에는 짧게 좀 가 보자.” 하고 미용실 주인이 나보다 먼저 내 머리 모양을 지겨워하는 일,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듣는 일, 저녁 어스름에 다시 만난 길고양이가 내 바짓단을 쓱 한번 훑고 지나 주는 일, 산책길이 익숙해지는 일, 자주 이 길을 걷던 흰 개와 늘 그 뒤를 천천히 따르던 어르신이 며칠째 보이지 않는 일, 한밤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시다가도 문득 걱정스러운 마음 탓에 잠들지 못하는 일.(박준-동네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