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옆지기가 한참 신문을 보다가 "읽어봐, 좋아" 하면서 보여준다. 너무 좋아서 다른 이들도 함께 봤으면 해서 올려본다.

 

[판] 글쓰기는 ‘논술’이 아니다

입력: 2007년 04월 05일 17:50:20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창과 교수〉

 

 

아들아,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너의 등에는 논술이라는 짐이 하나 더 얹혔지? 비단을 잔뜩 지고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의 등에 또 한 필의 비단을 얹은 꼴 같아 안쓰럽구나.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아라. 이 나라에는 지금 논술을 무슨 신이나 괴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을 경배나 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일만은 아니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논술을 요술단지인 양 선전하며 혹세무민하는 자들, 그리고 그 신전에 복채를 갖다 바치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가련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문제일 뿐이다 .

 

너는 어느 날부터 아비가 읽어야 할 아침신문을 슬쩍 가방에 넣고 학교로 가더구나. 처음에는 참 매정한 놈이다 싶었는데 나는 용서하기로 했다. 네가 늦은 밤에 돌아와 꺼내 놓는 신문의 귀퉁이가 꽤 너덜너덜하게 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 교실에서 동무들하고도 돌려 읽는다니 잘한 일이다. 쓰기의 출발이 읽기라는 것을 이제 조금 알아차린 듯하구나.


아들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공부, 가장 확실한 공부가 글쓰기라는 것을 너는 잊지 말기 바란다. 글을 쓰는 순간 머리 속의 지식과 지혜는 뼈와 살이 있는 육체가 된다. 피가 도는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생명체가 된다. 그러니 논술을 대비해서 책과 신문을 읽는다는 생각 따위는 일찌감치 버리도록 하여라. 글쓰기를 진학과 취업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한 ‘논술광풍’의 기세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너는 부디 글을 잘 쓰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미래에 작가나 전문적인 집필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논술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글쓰기보다 인생을 즐기고 혁신하는 방법의 하나로 글쓰기를 염두에 두라는 말이다.


글을 쓰는 일은 물론 괴로운 일이다. 예를 들면 이 짧은 칼럼 하나를 쓰는데도 아비는 서너 차례 국어사전을 뒤적인단다. 20년 넘게 글에 매달려 살아온 나도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 한글 지킴이’로 부르는 이수열 선생님 같은 분의 눈치를 봐야 하지. 이 ‘빨간 펜 선생님’은 신문에 실린 내 글을 보시고 잘못된 문장과 표현을 빨간 펜으로 바로잡아 늘 우편으로 보내주시거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렇듯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지난달에 독일을 가서 라이프치히 국제도서전을 참관하고 작품 낭독회를 가진 적 있단다. 네 또래 청소년들하고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진지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몇 차례 질의응답을 통해서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단다. 그것은 삶을 깊고 넓게 사유하는 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지.


또 하나 감동적인 것은 그 도시의 대학 문예창작학과에 계시는 소설가 강유일 선생의 강의 방법이었단다. 

그이는 지난 학기에 ‘사랑의 해부’라는 주제로 글쓰기 강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혹독한 글쓰기 훈련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구나. 도서관을 이용한 꼼꼼한 자료수집, 생생한 글을 쓰기 위한 현장답사와 장기간의 여행, 사회 여러 분야의 전문가 초청 특강, 여러 차례의 토론과 합평회가 학기 내내 이루어진다는 거였지. 글을 쓰면서 또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지.


아들아, 종이와 펜과 알량한 재주만으로 글을 쓰는 시대는 지났다. 글을 잘 쓰려면 너에게 다가오는 괴로움들과 한판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 그러니 책을 읽되 부지런히 세상도 읽고, 떠들고 웃되 절망 앞에서 펑펑 소리 내어 울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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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7-04-08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현은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랍니다. 퍼갈게요.
저도 우리 아이들이 글을 잘 썼으면 좋겠어요.
공부의 한 수단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말이 공감이 가네요.

홍수맘 2007-04-08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 네, 저도 제일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