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나는 지하철에서 책읽기를 좋아한다. 지하철역 벤치에 앉아 시계를 흘끔거리면서 책을 읽는 그 맛은 무어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조용하고 흐름이 느린 책은 지하철 독서에 적합하지 않다. 읽는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재미 넘치는 책이 알맞다. 2호선 열 다섯 정거장을 오가며 출퇴근하던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 때 읽었던 많은 책들 중에 오늘까지도 단연 기억에 남는 책은 바르가스 요사의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다.
<훌리아 아주머니>는 작가 자신의 첫 결혼 이야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만든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18세의 청년으로 실명 등장한다. 주인공은 18세의 나이로 32세의 친척 아주머니와 사랑에 빠진다. 아내가 되는 훌리아는 삼촌의 처제, 볼리비아 태생의 이혼녀다. 아무리 관대한 남미 사람들이라도, 이 커플의 연애가 순조로울 리 없다.
1950년대의 페루를 배경으로(한국의 6.25 이야기도 한줄 등장함) 주인공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엎치락뒤치락 결혼 대작전과 천재 방송작가 페드로 카마초의 요절복통 라디오 드라마 이야기가 한 챕터씩 나란히 진행되는 특이한 구성이다. 페드로 카마초는 TV가 귀하던 시절 대중을 울리고 웃기던 라디오 드라마의 스타 작가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능수능란하게 쥐어짜는 뛰어난 드라마들을 집필한다. 바르가스 요사가 근무하는 라디오 방송국은 페드로 카마초를 영입함으로서 절정의 청취율을 구가하며 승승장구한다.
천재라고 해서 인격자는 아닌지라, 페드로 카마초는 전대미문의 괴짜요, 어이없을만큼 안하무인이고 편협한 사람이라서 아르헨티나 사람에 대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적개심을 방송극에 아낌없이 드러낸다. 그의 드라마 속에서 무뢰한, 협잡군, 정신병자, 거짓말쟁이 역할은 아르헨티나 인들이 도맡고 있으며 사석에서는 아르헨티나인을 "씹구멍을 후비고 후장을 딸 놈들"이라고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가 아마도 50대인 듯, 인생의 황금기는 50세부터라고 선언하며 그의 방송극에서 모든 선하고 현명한 역할은 50대 남자(가끔 여자)가 도맡는다.
그러나 하루에 열 편의 방송 원고를 혼자서 써내는 천재 작가는 소설 중반쯤부터 차츰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해,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그의 방송극들은 거의 엉망진창, 뒤죽박죽,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황당한 즐거움을 준다. 한 방송극에서 죽었던 사람이 다른 극에 등장하고, 굉장히 착한 배역을 맡았던 사람이 갑자기 미치광이가 되어버리고, 이제까지 모든 방송극의 등장인물이 갑자기 한 방송극에 총 출연해서 상상도 못할 천재지변이나 말도 안되는 엉뚱한 상황, 예를 들면 지진, 화산, 축구장 폭동, 해일, 혁명 등등 때문에 몰살당해버린다... 뭐 그런 식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페드로 카마초가 주는 즐거움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소설 전반부의 천재적 방송극 작품(상당히 재미있음) 2) 페드로 카마초 본인의 괴짜성에 대한 묘사(황당한 인간임) 3) 소설 후반부의 말도 안되는 미치광이 작품(엄청 웃김!!) 페드로 카마초의 황당무계함에 비하면 18살 소년과 32세 이혼녀의 결혼 소동은 너무 점잖아보일 지경이다. 페루의 가족들도 우리나라 가족들처럼 참견하기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는지, 소년의 결혼을 둘러싸고 대가족이 장난 아닌 소동을 피운다.
나 자신의 숨기고 싶은 속물성을 페드로 카마초에게서 위로받은 기분이랄까, 나 자신을 훌리아 아주머니의 위치에 놓고 열여덟살의 꽃미남 문학청년과 재혼하는 은근뻔뻔한 상상을 즐겨본달까. 얇지 않은 한권의 책을 이렇게 후련하게 읽어내고 정신적 치유효과마저 거두다니, 이래서 나에게는 TV가 필요치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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