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덫 ㅣ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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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했던 책 도착! 먼저 출간되었던 두 작품도 시리즈에 맞게 새롭게 출간된다고 하니 더 기대된다. 시리즈 꼭 완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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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ㅣ 슬라우 하우스
믹 헤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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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새 계단에 이르러 있었다. 평소 사람들을 지하로 빨아들이는 계단이 이제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주위에 충만한 주된 감정은 짜증이었지만 술렁거림에서는 공포와 억눌린 패닉도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어떤 일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에게만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일 중에 죽음도 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은 그런 믿음을 차츰 무너뜨렸다. '이 역은 폐쇄됐습니다. 가장 가까운 출구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p.15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추락은 한순간에 시작된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자폭 테러를 막지 못해서, 기밀 정보가 담긴 디스크를 열차에 두고 내려서, 거액을 횡령해 모습을 감춘 사무직원을 놓쳐서, 심각한 사고를 일으켜서, 작전에 실패해서... 그 외에도 약물에 알코올, 풍기 문란, 정치적인 이유와 배신이 얽혔을 수도 있다. 온갖 사연으로 MI5 본부에서 좌천된 요원들을 모아놓은 지상 감옥, 바로 슬라우 하우스이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직장에서,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아무런 열의 없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기운 빠지는 일이다. 모두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애쓴다. 막장에 오게 됐다는 좌절감을 넘어, 자신이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고, 빛이 드는 양지로 다시 기어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의 첫 단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다. 


슬라우slough, 즉 진창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뜻의 '수렁의 집'은 어떤 공문서에도 존재하지 않고, 명함과 문패도 없는 비공식적인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슬로 호스', 느린 말이라고 부른다. 사용 기한이 지난 부적격자들을 모아다 아날로그 시대의 서류들과 함께 방치하는 무덤이나 다름없기에 그들은 정보국 작전에 동원되지도, 유용한 임무를 부여받지도 못한다. 서류를 작성하고 관리하며, 본부의 심부름을 할 뿐이다. 그렇게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만 계속되던 어느 날, 무슬림 청년을 납치한 극우 단체에서 '사십팔 시간 뒤 목을 베겠다'는 처형 예고 영상을 올리면서 런던이 발칵 뒤집힌다. 보안국이 실패했을 때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무고한 피해자를 위해 묵념에 동참하며 그날을 기리지만, 성공은 금세 잊힌다. 만약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시민이 참수될 경우,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과연 슬라우 하우스는 보안국의 핵심 작전에 관여할 수 있을까. 인질 사건이라는 참극을 기회로 삼으려는 이들과 테러 행위를 막아야 하는 이들의 머리싸움이 시작된다. 




미친 인간도 밤에는 자신보다 더 미친 인간을 알아본다. 남자가 슬그머니 사라진 뒤 홉든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온갖 고약한 냄새가 짬뽕이 된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신 다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거나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 사실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늘 문을 활짝 열고 맞아줄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홉든에게는 그런 곳이 없었다.                p.253~254


누적 4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슬라우 하우스'의 첫 작품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2022년부터는 게리 올드먼 주연의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되어 현재 시즌 6까지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다. 스파이 문학의 정통성 위에 냉소적 유머, 관료주의와 정치와 경제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를 얹어 '21세기형 스파이 스릴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라 전부터 매우 궁금했는데 드디어 만나보았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으려고 일부러 드라마는 찾아 보지 않았는데, 소설을 읽고 나니 드라마 시리즈도 챙겨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로 대표되는 냉전 시대의 스파이는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했다면, 이 작품은 지극히 현재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21세기형 첩보물’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스파이 문학들이 속임수와 배신, 은폐 등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첩보 활동을 전면에 내세웠었다면,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매 순간 세상과 주변 모든 사람들과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스파이라는 존재의 숙명이라면,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어제와 오늘이 같고, 다가올 내일 또한 다르지 않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거대한 음모의 플롯보다는 각 개인의 내면과 관계에 더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더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정도로 사랑받는 이유는 미워할 수 없는 안티히어로인 슬라우 하우스의 수장 아래 좌천되어 모이게 된 요원들이 현대 직장인들의 삶을 리얼하게 보여주며 각자의 매력을 현실적으로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후속작인 <데드 라이언>도 곧 나온다고 하니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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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낱말들 - 아름다운 낱말 하나를 얻는 순간 세계는 곱절로 선명해진다
박완서 지음, 호원숙 엮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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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밖에선 햇살보다 더 밝게 창호지를 비추며 분분하게 낙화지던 앵두꽃도 살구꽃도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녹두빛 잎이 '연연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꽃의 흔적이 열매가 되어 부풀기도 전이건만 꽃이 지던 날은 먼먼 옛날처럼 가물거렸다.             ─ 「미망 1」, 238쪽


난분분하다, 괄다, 소삽하다, 짜득짜득, 귀살스럽다... 이 중에서 뜻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될까. 대충 짐작은 하더라도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순우리말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난분분하다는 눈이나 꽃잎 따위가 흩날리어 어지럽다는 뜻이고, 괄다는 불기운이 세다, 소삽하다는 길이 낯설고 막막하다, 짜득짜득은 물건이 잘 끊어지지 아니할 정도로 검질긴 모양을 말하며, 귀살스럽다는 일이나 물건 따위가 마구 얼크러져 정신이 뒤숭숭하거나 산란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 수록된 120개의 우리말들은 박완서 작가의 수많은 명작 속에서 엄선한 것이다. 자연을 닮은 말,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말, 삶을 일구는 말, 마음이 하는 말, 사람을 읽는 말이라는 카테고리로 단어들을 나누어 구성해 다채로운 낱말 사전이 되었다. 평소에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거나,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많아서 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각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와 함께 해당 단어가 쓰인 책의 한 대목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사전처럼 찾아 읽기도 좋고, 여백에 문장을 필사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귀여운 일러스트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며, 양장본이라 사전처럼 곁에 오래 두고 자주 펼쳐 보아도 튼튼하게 만들어 졌다. 




엄마는 이미 그런 각오까지도 굳힌 듯 '구메구메' 껴주었던 혼숫감 같은 것까지 다 꺼내 내 피난 짐을 챙기면서 연방 "너라도 좋은 세상 살아야지." 하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300쪽


박완서 작가의 책상 가까이에는 늘 사전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나달나달해지고 결국에는 제본이 여러 조각으로 풀어졌을 정도로 열심히 펼쳐보신 두껍고 무거운 사전 덕분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단어들이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조롭고, 빈약한 어휘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층층시하라는 말이 부모, 조부모 등의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처지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이고 자는 잠을 '나비잠'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두 사람의 말이 서로 어긋날 때, 제삼자를 앞에 두고 전에 한 말을 되풀이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무릎맞춤하다,라고 한다는 것 등 처음 접하게 되는 표현들이 너무 많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보깨다, 아뜩하다, 생급스럽다, 징건하다, 애면글면, 약비나다 등의 단어들은 너무 낯설어서 그 의미조차 추측이 되지 않았다. 정작 뜻을 알고 보면 친근해지는 표현들인데 말이다. 




초판 한정 특별 부록으로 반년 다이어리 형태로 된 '낱말 수집 노트'를 받을 수 있다. 본책 표지와는 또 다른 일러스트로 완성되어 너무 예쁘다. 필사하기 쉽도록 360도 펼쳐지는 제본이며, 단어들을 모아 수집할 수 있도록 소장 가치를 더한 양장본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하나 식상한 표현이 없으며, 삶의 매순간을 적확한 언어로 명징하게 그려내는 단어들로 가득한 책이다. 페이지만 펼쳐도 우리를 낯설고도 신비로운 단어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단순히 단어들을 모아둔 것이 아니라, 해당 단어가 표현된 책 속 구절이 같이 있으니 박완서 작가의 책을 다시 찾아 읽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 속에 담긴 단어들을 다 익히고,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보다 선명하게, 불투명하던 생각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와 닿게 만들어 주는 단어들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한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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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인류세 - 인간과 생태계를 잇는, 인류학의 새로운 자연사
애나 로웬하웁트 칭 외 지음, 김희정 옮김 / 해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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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삶의 과정을 역사적 시간 안에서 생각하게 한다. 유기체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이 변화는 유전자 변이, 후성유전학적 발현, 적응, 혹은 체내 미생물 군집을 포함하는 공생관계에 의해 생길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각각의 유기체는 모두 역사의 당당한 주체이자 주인공이 된다. 이들이 역사에 반응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안, 역사는 그들의 변화에 반응한다. 교란 생태학에서 지질학적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계에도 이러한 방향으로 가는 다른 변화들이 있다.              p.192


상처 난 소나무 껍질 아래에 서식하는 붉은송진나무좀은 원산지인 북아메리카에서는 그다지 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 중국 산시성으로 대량 수출된 가공되지 않은 산업용 목재에 이 벌레들이 함께 실려 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중국의 렙토그라피움 프로세룸 진균 종을 만난 붉은송진나무좀이 공생관계를 이루어 나무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산업적 목재 무역이라는 인간 활동이 없었다면 해충들이 북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옮겨갈 이유가 없었다. 한때 얌전하기 그지없던 식물이 온세상의 물을 질식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경우도 있다. 부레옥잠은 한때 식물원들이 가장 원하는 식물이었다. 그런데 관리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부레옥잠이 번식하자, 식물원들은 부레옥잠을 걷어내 강에 대량으로 던져 넣었고, 그 결과 강둑, 호수, 운하, 철도 도랑, 늪, 웅덩이, 저수지, 심지어 논에서도 이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 모두 모두 인간이 교란시켜놓은 환경 덕분이었다. 


이렇게 특정 지역에서 인간의 인프라에 의해 변형되었지만, 더 이상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린 상황들이 바로 인류세 개념을 형성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인류세'란 '인간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뜻하는 말로 인간이 자연을 교란하고 훼손시키면서 초래한 환경위기가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표현이다. 열대야와 폭염이 지속되는 기후 현상을 비롯해서 지구온난화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이제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섰다. 인류가 파괴한 자연생태계를 복원하고,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책들을 꽤 읽어 봤는데, 새로운 시각으로 인류세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인류세는 전 지구적인 현상인 동시에 매우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특정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지 않은 채 인류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지식 전통들과 함께 작업하고 그 전통들을 아우르는 큐레이션의 방식으로 '포개 쌓기'를 주장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지식을 한데 모음으로써 어떻게 포괄적인 이질성이 가능해져서 인류세 세계가 파열하고 재구성됨에 따라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페럴 아틀라스'의 디지털 구조가 어떻게 패치적 인식론을 실행에 옮겨서, 불협화음과 예상치 못한 연결의 미학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했다... 연구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학문적 차이를 관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p.361~362


이 책은 조각보처럼 서로 분리된 채 인류세 현상을 보이는 특정 지역들을 가리키는 '패치'라는 단어를 사용해 '패치 인류세'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세계 끝의 버섯>을 쓴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현장의 인류학자들과 함께 쓴 이 책은 인류세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 현장 안내서이기도 하다. 인류세 패치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규모로 일어나고 있기에, 이 책을 통해 환경 변화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들은 댐, 운하, 단일 경작지 등 인간이 구축한 산업적 인프라가 빚어낸 낯선 생태적 현실을 조명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번성한 생물과 무생물이 야기시키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동등한 행위자로 마주하는 ‘인간 너머’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인류세의 희망은 빅데이터가 아니라 '현장'에 있다고 말하는 이 책은 인간 너머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의식하고, 식별하고, 이름을 알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인간이 자초한 환경 재앙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전 세계에 걸쳐 생태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위기에 처한 것이 무엇인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지는 주체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패치 형태의 인류세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 지구적 현상의 특수성과 그 특수성이 가지는 전 지구적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문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인류학자들이 진행한 일종의 패치 인류세 현장 보고서로 집필된 이 책은 결코 읽기 수월하진 않았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던 인류세라는 개념을 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연과 인류세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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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와 욕조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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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넌 어떤 게 선한 행동인지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아들이 무기에 화약을 부어 넣는 걸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우린 전쟁 중이야. 도덕이 낄 자리는 없어. 언제나 이긴 쪽이 옳은 법이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승리에 공헌하는 거야. 우리가 승리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반대로 패하면…… 우리 군의 일선이 어떻게 됐는지 너도 봤잖니, 안 그래?>              p.84


프랑스 혁명기, 시몽은 셀 없이 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화염에 휩싸인 도시들, 사람들이 마치 곤충이라도 되는 듯 쓸어버리는 총탄들... 아무리 정의로운 대의를 위해 싸운다지만, 이젠 전쟁이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자유와 변화에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라고, 병사들이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버티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이 끝이 난다. 시몬은 고향인 낭트의 집으로 향한다. 어서 부모님을 만나 푹 자고 일어나 전쟁 전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달 전쯤엔가 도매상인들이 모조리 체포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거칠게 저항했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고, 어머니는 감옥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몽은 자신에게 모든 걸 가르쳐 준 사람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의 시몽이었지만, 이제 <복수>라는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무작정 총독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조심스럽게 소총을 장전하고는 눈 덮인 풀숲에 엎드려 총독이 오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총독이 등장했고, 시몽은 그를 죽이는 동시에 자신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창녀라고 소개하는 한 여자가 나타나 그를 막는다.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복수를 제안하겠다고, 이건 혼자서 완수할 수 있는 복수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유 없이 끌려간 사람들, 하루아침에 모조리 사라진 죄수들... 시몽의 개인적인 복수는 어느새 도시 전체의 비밀과 얽히기 시작한다. 자, 과연 시몽은 아버지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흐름의 힘, 매 순간 한결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그 모든 물이 그가 거기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자연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자연은 인간사를 개의치 않고, 그들의 결점이나 거짓, 잔인함이나 희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흐름을 따라가며 상황에 따라 그들의 목을 축여 줄 수도 있고, 혹은 집어삼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를 삼켜 버릴 뻔했던 그 힘 뒤에는 어떠한 의지도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p.614


이 작품은 조나탕 베르베르의 신작이다. 대중의 찬사 속에 화려하게 데뷔한 젊은 작가 조나탕 베르베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아들이다. 국내에는 그의 첫 작품인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가 먼저 소개된 적이 있다. 심령술과 마술, 탐정 수사가 뒤얽힌 기이하고 매력적인 세계인 선보였던 전작에 이어 <불화의 아이들>이라는 미스터리 작품을 선보였고, <등장인물 연구 일지>에서는 인공 지능의 소설이라는 흥미롭고 시의적절한 소재를 색다르게 풀어낸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스릴과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었고, 하나의 창작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메타픽션으로서도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신작에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내전으로 여겨지는 방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역사 미스터리를 선보인다. 철저한 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자 찬란한 승리로 기억되는 프랑스 혁명 뒤에 숨겨진 어둡고 추악한 진실을 들여다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부제는 〈방데의 한을 풀어 준 남자의 이야기〉이다. 방데는 프랑스 서부의 지역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내전으로 여겨지는 방데 전쟁의 발원지다. 시몽의 고향인 낭트를 비롯해 방데 전쟁 중 여러 지역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우리의 4.3과 5.18처럼 말이다. 국가 권력에 의한 무참한 집단 학살이었던 방데 전쟁은 시대에 따라, 진영에 따라 그 평가가 갈라졌다. 이 전쟁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는 옮긴이의 말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역사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스토리에 페이지수도 만만치 않은 작품이지만, 아버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가독성 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재능은 타고난 것 같다. 역사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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