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식물학 - 이름은 알지만 사연은 몰랐던 105가지 꽃과 풀의 속사정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김수경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닭의장풀의 꽃은 하루밖에 피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오전 중에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 시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식물은 예로부터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것의 상징으로 여겨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잎을 모아 물감으로 쓰기도 했고, 잎 속의 즙을 약재로 쓰기도 했습니다. 하루치 분량의 꽃을 이어가며 피워내는 식물. 하나하나는 덧없이 지지만 그것들이 모여 여름 내내 푸른빛을 잃지 않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모여 이루는 아름다움, 그것이 닭의장풀입니다.               p.51


일본의 대표적인 식물학자이자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신작이다. 쉽고, 재미있게 식물학에 대한 풍성한 지식들을 풀어내는 책을 많이 냈는데,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되어 있다. 그 책들 중에 <전략가, 잡초>와 <잡초들의 전략>이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대부분 쓸모없는 식물이라고 알고 있던 잡초에 대해 '특수한 환경에 적응하고 특수한 진화를 이룬 특수한 식물'이라는 해석을 들려 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식물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꽤 읽어 봤지만, 잡초를 주인공으로 하는 잡초학이라는 학문은 꽤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자가 워낙 유쾌하고 위트있고 가볍게 글을 풀어내어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번에 나온 <방구석 식물학>은 우리가 익히 일상에서 보고, 알고 있던 꽃과 풀들의 속사정에 대해서 들려주는 책이다. 각각의 식물마다 아름다운 세밀화가 수록되어 있어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힐링이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렵고 낯선 식물들이 아니라 계절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풀꽃들의 이야기라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작은 들꽃 하나에도, 꽃집 창가에 놓여 있는 화분 하나에도 시대와 지역을 넘어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이야기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기도 했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풀 한포기, 꽃 한송이도 결코 함부로 대하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새삼 다시 들었고 말이다. 




데이지는 오래전부터 꽃점에 쓰여온 식물입니다. 꽃잎을 한 장씩 떼어내며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를 번갈아 읊조립니다. 마지막 꽃잎에서 나오는 답이 곧 사랑의 결론. 또한 눈을 감은 채 데이지를 꺾었을 때 손에 든 꽃의 송이 수가 그녀가 결혼할 때까지 남은 연수를 나타낸다고도 합니다. 손에 쥔 꽃 한 송이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얹고 꽃잎 하나하나를 떼어내며 답을 기다리던 사람들. 데이지는 그 오랜 설렘을 조용히 간직해온 꽃입니다.               p.189


봄이 되면 어디선가 펼쳐지는 샛노란 꽃밭을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으레 그것을 유채꽃이라 부르지만 사실 도감에는 '유채꽃'이라는 식물이 따로 없다고 한다. 유채는 배추속 식물에 피는 노란 꽃을 두루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 들판을 가득 채운 노란 꽃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양유채, 서양배추, 양배추, 콜라비, 갓 등 저마다 잎을 활짝 펼친 꽃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모두 넓은 의미의 유채꽃이라고 한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네잎클로버는 길가나 자주 밟히는 곳에서 잘 발견되는데, 사실 네잎클로버는 잘 밟히는 곳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잘 밟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토끼풀은 성장점이 땅 가까이에 있어서 밝혀 상처를 입으면 네잎클로버가 나오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운이 밟히고 또 밟히면서 자라나는 것이라니 어쩐지 다음에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게 되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잡초가 엉겅퀴라는 사실, 히로시마 원폭 페허에서 살아남아 가장 먼저 꽃을 피운 식물이 협죽도라는 것, 수선화가 자기 자신에게 반해 꽃이 된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의 이름이라는 사실, 달리아에게 변덕이라는 꽃말이 붙은 이유가 나폴레옹 황제 황후의 시녀 때문이었다는 것 등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많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식물의 겉모습만 알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민들레, 쑥, 엉겅퀴, 강아지풀, 수선화, 작약, 수국, 채송화, 해바라기, 코스모스, 은행나무 등 누구나 알고 있는 식물들의 뒤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으니 말이다. 신화와 전설, 세계사와 과학을 넘나들며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겼던 책이다. 각각의 식물마다 두 페이지가 할애되어 있고, 예쁜 그림이 눈을 즐겁게 해주며, 내용 설명도 그리 길지 않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기분이 내킬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좋고, 사전처럼 필요한 꽃과 식물에 대한 정보를 찾아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 교유서가 시집 6
추성은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이/무너져서//

한 개의 수박이 되었다//

격자 창문을 타고/내려오는 넝쿨 줄기는//

나를 허영으로부터/지켜주거나 훼손하거나 하지//

             - '수박 게임' 중에서, p.37


지난해부터 시작된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가 꾸준히 출간되는 덕분에 요즘 시집을 자주 읽게 되었다. 내지에 표지 색과 같은 컬러의 그라데이션을 줘서 밑줄 긋고, 메모하면서 읽기 딱 좋다.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은 추성은 시인의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이다.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추성은 시인의 첫 시집인데, 일상적 소재에서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한 시 45편을 묶었다.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는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를 시작으로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기혁 시인의 <소설책>에 이어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까지 꾸준히 새로운 시들을 선보여왔다.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내지에 그라데이션을 줘서 더 아름다운 시집인데, 심플한 이미지의 표지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내지의 은은한 색감이 정말 예쁘다. 시집을 읽기 전에 만나는 '시인의 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통과하고 있다.'라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이 시집 전체를 지배하는 투명한 유리창과도 같은 느낌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함께 포함된 작은 엽서에도 시인의 말이 인쇄되어 있어 좋았다. 




나인 것과, 나였던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를 계단처럼 오르내리며 횡단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나. 진흙더미처럼 덩어리째로 쌓아올린 근육이 딱딱해지다가 서서히 흘러내립니다. 새하얀 뼈가 들숨날숨에 따라 움직이고. 나의 호흡은, 텅잉 그대로 살얼음의 모양을 내며 흩어집니다. 규칙적이지만 아주 희박합니다.               - '녹는점' 중에서, p.48


나란히 있는 창 너머로 두 개의 평온한 장면이 번갈아 보인다. 연인이 자신의 접시 위에 놓은 조류를 발골하는 동안, 그의 뒤편으로는 날아오른 새가 열매를 쪼아먹는다. '인간의 마음과 인간이 아닌 것이 프레임 단위로 쪼개진 채 상영되고 있'다는 이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듯 눈앞에 보였다. 깨끗하게 닦인 창이 안팎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도심을 나는 새들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는 비극이다. 그래서 '연인과 토막난 조류와 그를 구성하는 모든 풍경은 마치 설탕공예처럼 얇고 아름답지'만, 유리창 밖에서 날아오르는 새들의 생명력과는 괴리가 있다. 투명한 유리창이 참새의 목을 부러트리는데, 그 안쪽에선 평화롭게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삶이 있다. 그러니 잘 차려진 비밀은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룡의 심장은 인간의 심장을 닮았고, 티라노사우루스의 천적은 홍학이며, 서울숲에는 도마뱀 인간이 있다.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은 무너져서 한 개의 수박이 되었고, 이름을 부르면 복도 끝에서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미래, 혹은 나를 앞서간 과거였다. 일상 속 쉬운 단어로 빚어냈지만, 독특한 상상력이 더해져 비밀스럽게 반짝이는 시집이었다. 접시 위에 잘 차려진 '비밀'이 궁금하다면 이 시집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양 없는 육체
김곡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난 세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단한 육체는 빛을 반사하므로 겉은 드러내고 속은 감춘다. 반면 이번 세기, 보이는 게 전부다. 꿀의 매끄러움이 빛마저 매끄럽게 투과시켜 감출 내부를 없앤다. 이 모든 것을 특정 상품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는 기술들이 도처에 널렸다. 특히 인터넷은 모든 사적인 내밀함을 파괴한다. 거기선 먹고 자고 노는 것까지 모두 노출의 대상이 된다. 육체에 대해선 더하다.               p.52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는 거라고, 외모 보다는 성격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야말로 삶의 중요한 덕목이자 재능이기도 하다는 걸 말이다. 예쁜 사람이 더 많은 애정과 배려를 받고, 예쁜 외모가 면접이나 승진에서도 유리하며, 같은 상황이라도 양보를 받는 건 대체로 더 아름다운 사람이다. 덕분에 우리는 정상체중의 사람도 체중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외모강박시대, 외모불안시대에 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에서 육체란 무엇이며, 몸이라는 영역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관종의 시대>, <과잉존재>에서 현대사회의 나르시시즘을 해부했고, <가족계획>, <보이스> 등의 작품을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한 저자는 몸의 변천과 사회 변화는 결코 무관치 않다고 말한다. 다이어트 중독, 건강 염려증, 딥페이크 범죄,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가스라이팅 등 이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현상들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의 동근원적인 현상으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육체를 살고 있기 때문에, 다이어트가 성행할수록 스토킹이 유행하고, 딥페이크가 흥행할수록 가스라이팅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어조가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가 과거와는 다른 육체를 살고 있다는 그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밖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자기 몸을 사랑하자고 외치지만, 정작 진정한 몸이란 누구인지를 망각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뷰티는 대중예술이다. 단, 그것은 나르시시즘의 예술이다. 이제 몸을 가진 누구나가 근육과 지방을 깎아내는 예술가가 되고, 몸 각자는 걸어다니는 예술작품이 되어 가지만 거기엔 온통 나, 나, 나뿐이다. 심지어 몸이 나다. 나르시시즘의 미학이 불러온 결과는 끔찍하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저항성을 없앤다. 몸은 저항 없는 재료가 되어 개인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사유물이 되어간다.               p.158


성형과 바디프로필이 요행하는 시대에는 더 많이, 더 빨리 변형되는 육체만이 살아남는다. 저자는 감옥과 고문기구 대신 러닝머신과 수술대에 스스로 올라가 지난 세기 몸밖에서 치르던 전쟁을 이제는 몸속에서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건강의 개념이 바뀌었다. 현대 미용의학과 다이어트법, 의상과 화장품 등의 목적은 몸을 조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헬스장과 수술대 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범죄의 양상도 달라졌다. 지난 세기의 범죄가 조직폭력과 무장강도 등 견고한 조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세기를 지배하는 스토킹, 가스라이팅, 묻지마 테러, SNS 성착취 같은 범죄들은 편집증적, 점착적, 자기애적이다. 


지난 세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단한 육체는 빛을 반사하므로 겉은 드러내고 속은 감춘다. 반면 이번 세기, 보이는 게 전부다. 꿀의 매끄러움이 빛마저 매끄럽게 투과시켜 감출 내부를 없앤다. 인터넷은 모든 사적인 내밀함을 파괴하고, 좋아요의 경쟁이 일어나며, 신체 다양성은 멸종된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치 않다. 한편에선 다이어트와 포토샵이 유행하며 모두가 아름다운 몸의 소유자가 되지만, 다른 한편에선 각종 중독증과 함께 데이트 폭력, 리모컨 놀이, 딥페이크 범죄와 같은 병리현상들이 발현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몸에 대한 감각이 변하면 사회에 대한 감각도 변한다고. 몸이 퇴행하면 그만큼 사회도 퇴행한다고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10편의 이야기는 헬스중독, 스토킹, 가스라이팅, 딥페이크, 뇌과학 등을 과거와 현재를 비교·분석하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문제의 원인과 배경을 ‘육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분량이 많지 않아 단숨에 읽히지만, 굉장히 강렬한 사유를 들려줘 잔상이 길게 남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말한다. 진심으로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 게 어떤 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애써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피로, 극심한 공포로 인한 피로를 느끼며 나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야말로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p.60


마사의 마흔 번째 생일 파티가 끝나고 이틀 뒤, 남편 패트릭이 떠났다. 집중치료실 전문의인 패트릭은 일평생 중간지점을 벗어나지 않는 성격이었고, 잡지에 음식 칼럼을 기고하는 마사는 뭐든 극단적인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는데, 마사의 첫 번째 결혼이 실패 후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 역시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모두가 패트릭을 보며 저런 남자와 결혼하다니 정말 행운이라고 말했지만, 마사는 모두가 착하다고 하는 사람과 결혼했을 때 뒤따르는 문제점에 대해서 남들에게 말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마사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말이다. 




마사는 열일곱 때 처음으로 발작적 공포와 무기력감을 느꼈고, 병원을 찾았다. 이후 꾸준히 약을 먹고 마음을 다잡아도 공포와 우울, 불안, 자살 충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직장을 얻고 일을 시작해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해도, 그 결혼이 파국이 나고 다른 사람과 다시 시작해도 마사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까탈스럽고 유난스러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나날이 계속 된다. 겉으로 보면 마사가 좋은 아내 또는 좀더 훌륭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혐오에 빠진 마사가 분노와 절망의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채 날을 세우고 그를 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의 삶 대부분,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본래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써왔다는 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삶에서 기쁨을 누리고, 사랑받고, 건강한 관계를 쌓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모든 건 망가지고 엉망진창이고 또 완전히 괜찮아. 그런 게 인생이야. 그저 비율만 달라질 뿐이지. 그 비율도 대개는 제멋대로 바뀌고. 이거구나, 앞으로 영원히 이렇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바뀌는 거야." 

그런 게 인생이었고, 이후 삼 년 동안 줄곧 그랬다.... 죽고 싶어, 제발, 숨을 못 쉬겠어, 점심을 잘못 먹었나봐, 사랑해,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 였고 우리 둘 다 영원히 그렇게 살 줄 알았다.             p.307~308


이 작품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멕 메이슨의 신작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와 〈더 타임스〉에서 기자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뉴요커〉 〈보그〉 〈엘르〉 등 유력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온 멕 메이슨은 두 번째 소설인 이 작품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함과 동시에 2022년 브리티시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작품은 평생 우울과 자살 충동을 겪으며 살아온 주인공 마사가 스스로 무너뜨린 삶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실 우울증은 폐렴이나 위장병처럼 평범한 질환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정신적 질병은 육체적 질병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탓도 있고, 아직은 사회적 시선이 그 두 가지를 평등하게 대하지는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당사자도, 그의 가족들도 '우울증이 진짜 병이 아니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도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 게 어떤 건지 상상 조차 할 수 없다고.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단의 심리 상태까지 이끌고 가는 심각한 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이제 조금은 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면서 후회하고, 자책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고 우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에 지쳐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습관적으로 자신을 다그치느라 피곤해지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해지고, 어떤 일에도 여유가 없어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대부분 극복하고, 다시 미래를 향해 일어서게 마련이다. 이런 감정에 몇 년 동안 빠져 있어야 한다면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우울증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극중 마사처럼 삶이 너무 버겁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결국 좌절과 체념 끝에 삶을 방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사는 용기를 낸다. 절망의 끝에서 다시 기쁨을 되찾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극중 마사에게 패트릭이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건 망가지고 엉망진창이고 또 완전히 괜찮아. 그런 게 인생이야."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고, 또 내일을 향해 달려갈 힘을 내보는 것이다. 우울증을 다룬 심리학서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그런 책들보다 소설 한 편이 더욱 강렬하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섬세하게 감정을 헤아려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내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 작품은 그 어려운 걸 기어코 해낸다. 현대인들이 누구나 겪는 '우울'에 대해 이토록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생생하고, 빈틈없이,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그려내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자, 이 처연하고 찬란한 고백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는 게 지겹고 무서운 당신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