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행복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 열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모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느릅나무의 레몬색 잎들. 과수원의 사과들. 잎들이 속삭이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나를 여기에 멈추게 하고, 인간의 힘이 아닌 얼마나 많은 힘들이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빛이 타오른다. 사과는 반짝이는 녹색을 띤다. 나는 온몸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어떻게? 나의 창문 아래에서 작은 올빼미 한 마리가 울어댄다. 나는 다시 반응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생각하는 바를 스냅사진 같은 이미지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감각들 위를 표류하는 물이 새는 배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들에 노출되어 있는 감광판이다.                   p.31


거장들의 품격 있는 문장과 사유를 소개하는 열림원의 '열다' 시리즈, 그 세번째 책이다. 헤르만 헤세의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빈센트 반 고흐의 <싱싱한 밀 이삭처럼>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모두의 행복>이다. 에세이, 시, 소설,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의 글과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엮은 것이 이 시리즈인데, 이번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정원과 풍경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았다. <밤과 낮>,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올랜도>, <파도>, 세월> 등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 작품 속에 묘사된 정원과 자연에 대한 대목들도 따로 엮어 더욱 의미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 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고,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며, 출판사를 운영하며 당대의 작가들을 발굴했고,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로서 비평가와 독자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딸이었으며,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평생 겪었고, 결국 스스로 강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평소에 버지니아는 별일 없는 한 매일같이 혼자 산책을 나서곤 했다. 콘월의 세인트아이브스, 켄싱턴 가든스, 하이드 파크와 큐 가든, 리젠트 파크 등 런던의 공원과 정원들에 대한 묘사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자줏빛 일본산 아네모네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잔디의 푸름, 정원을 온통 가득 채운 두툼한 금빛 크로커스, 꽃이 만발한 파이프 나무, 색종이를 오린 모양으로 꼿꼿하게 곧추서 있는 백일초와 금련화, 덩굴을 뻗으며 높이 자라는 무수히 많은 하얀 메꽃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정원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원 문의 돌쩌귀는 녹이 슬어서 아들이 문을 비틀어 열었어. 노새들이 뾰족한 발굽으로 때각거리며 들어오고 이탈리아 여자들이 어깨에 숄을 두르고 머리에 카네이션을 꽂고 샘물가에서 수다를 떨 때, 어린 시절의 강렬한 열정들, 지니가 루이스에게 키스할 때 내가 정원에서 흘린 눈물, 소나무 냄새가 나는 교실에서 느낀 나의 분노, 낯선 곳들에서 느낀 나의 외로움 등은 안전함과 소유와 친밀함으로 보상을 받지. 나는 평화롭고 성과가 많은 세월을 살았어. 주위에 보이는 것은 다 나의 소유야. 나는 씨앗들을 심어 나무들을 키웠어.               p.277~278


실제로 버지니아 울프는 일평생 정원을 가꾸었고, 자연을 가까이 하며 살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과 함께 1919년부터 1941년까지 22년간 살았던 몽크스 하우스에도 정원이 있었다. 이 집은 토지가 약 3000제곱미터에 달했는데, 고풍스러운 주택 한채 외에 과수원과 온실, 물고기연못, 정원 등이 별도로 있었다. 울프는 매일 아침 꽃이 황홀하게 피어 있는 정원을 가로질러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온종일 잡초를 뽑고 화단을 만들며, 그게 행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묘한 감격을 맛보았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울프는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다. 정원의 작은 움직임에 생에 대한 감각을 붙잡고, 전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산책로에서 행복에의 가능성을 좇았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유년 시절 세인트 아이브스의 여름 별장에서 경험한 자연을 시작으로, 평생 가장 애정을 가졌던 집이자 후기 대표작 대다수를 썼던 몽크스 하우스의 추억, 그리고 울프가 태어난 도시 런던에 관한 장면들이 이어진 뒤, 울프가 쓴 문학 작품들 속의 자연과 풍경을 만나본뒤, 마지막으로 유럽 각지를 여행한 울프의 여정이 등장한다.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까지 낯선 공간에서 느꼈던 여행자로서의 경험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보통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때, 침울하고, 핏기 없는 안색의 신경쇠약증 환자 같은 이미지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을 읽으며 정원과 식물들, 그리고 계절을 느끼는 모든 감각들을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하늘과 새와 꽃, 나무 등 자연에 동화된 울프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너무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불행한 여성'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울프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정원에 대한 묘사들이 어찌나 완벽하고, 우아한지 가보지 못했지만 눈 앞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걸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로 늙어간다는 것 - 80대 독일 국민 작가의 무심한 듯 다정한 문장들
엘케 하이덴라이히 지음, 유영미 옮김 / 북라이프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렇게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박탈당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살지 말고 현재에 살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과거의 일들이 자꾸 생각나면서 종종 과거를 미화하고 낭만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를 자꾸 돌아본다고 해서 현재가 더 견딜 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깨어서 적극적으로 현재를 살 때 현재는 의미를 획득하고 더 살 만해진다.            p.117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늙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력이 나빠지고, 흰머리가 나며, 기억력이 감퇴하고, 주름도 많이 생기고, 면역력도 떨어진다. 생물학적으로 늙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늙어 가는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해왔다면 조금 더 육체적으로 편할 것이고, 육체적으로는 쇠약해졌지만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유쾌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생물학적으로 늙는 대신 연륜과 지혜를 얻게 되었으니 그것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독일 문단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해온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엘케 하이덴라이히가  ‘나이 듦’이라는 주제에 대해 쓴 것이다. 올해 82세에 접어든 저자의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아마존 종합 1위를 기록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자는 어린 시절이 암울했기에 자녀를 두지 않았고, 결혼 생활이 잘 맞지 않아 두 번 이혼 했으며, 살아오면서 이렇다 할 운동을 한 적도 없고, 평생 담배도 숱하게 피우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렇게도 수많은 베스트셀러 책을 썼기에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고, 지금 책으로 가득한 집에 앉아 있으니 정말 멋진 인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나이를 먹었는데, 거둬둘 가족도 없고, 지금의 파트너는 스물여덟 살이나 어린 세상 물정 모르는 예술가라 자신을 돌봐줄 것 같지도 않아, 자신의 힘으로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면 간병인을 구해서 가능하면 자신의 집에서 지내려 한다고 명쾌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생각한다. 온종일 그 모든 뉴스와 부당한 요구, 쓸데 없고 사소한 것들에 시달리며 살다가 간혹 담배 한 대 피우고 약간 과음을 한들 무슨 큰일일까? 한 번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운전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늘 한결같이 안전과 건강을 따지고, 시시콜콜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고, 원리원칙을 따지는 사람들이 나는 가끔 신경에 거슬린다. 에고, 이런 말을 했으니 또 분노에 찬 편지들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뭐, 알아두시라. 편지에 답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긋나긋한 노인이 아니니. 언제나처럼 나는 나일 따름이다.                p.202~203


이 책은 독일의 한저 출판사가 10개의 주제로 10권의 에세이집을 기획했는데,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된 엘케 하이덴라이히에게 주어진 주제가 '나이 듦'이었고,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고 한다. '뭐야, 날 더러 늙어가는 이야기를 쓰라고? 아, 싫어.'라고 생각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곧 '흠, 내 나이가 80이니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게 맞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이 멋진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저자는 나긋나긋한 할머니라는 사회적 틀을 단호히 거부하고, '평생 그러했듯 냉소적이고 고집스럽고 투쟁적으로 늙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년은 인생의 아주 멋진 시기이고,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이자 기쁨이 되는 일만 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책은 노년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두려움으로 물들이지 않고, 나이 든 사람 특유의 용기와 솔직함으로 ‘나답게’ 늙어갈 수 있는 법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나는 20대 까지는 한해, 두해 나이를 먹는 것을 체감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30대부터는 숫자에 조금씩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서류에 나이를 기재할 일이 있거나, 누군가 나이를 묻는 상황이 생기면 꼭 나이를 세어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제껏 인류사에서 그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평균수명이 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나이'는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주고 있을까에 대해서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우리 부모세대와는 다르게 늙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부모 세대보다 더 오래 정신적으로 민첩하며 양질의 의료 서비스도 누리고 있다. 옛날의 오십대와, 오늘날의 팔십대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늙어가는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연약해져만 가는 걸, 그럼에도 살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걸 배울 수 있을까. 삶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로부터 나는 늙어가는 것을 배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노년이 온갖 덫으로 가득한 비극적인 운명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들이 계속 태어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세계가 꾸준히 사라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까. '나이 드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와이 일본어 첫걸음 카와이 일본어
레이쌤(김하경) 지음 / 길벗이지톡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싶다는 로망을 가져본 적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내내 영어를 배우고, 제2외국어로 일본어, 프랑스어 등을 배워 왔지만, 정작 해외에 나가거나 외국인과 마주하게 되면 얼음처럼 굳어서 한 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장 생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 외국어 공부를 매일 꾸준히 하기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특히나 일본어는 한때 학원을 열심히 다니며 했었기 때문에 언제나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나서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고 말이다. 손을 놓은 지 오래 되어서 히라가나부터 다시 봐야 하는 수준이 되어 버렸는데, 마침 시선을 확 사로잡는 일본어 기초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 귀여운 일본어 입문서'라는 설명만큼이나 사랑스럽다. 왜냐하면 헬로키티랑 함께 일본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2024년 탄생 50주년을 맞은 산리오의 대표 캐릭터 헬로키티와의 콜라보로 탄생한 이 책은 페이지 곳곳에서 헬로키티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을 한가득 맛볼 수 있다. 게다가 헬로키티 책꾸 스티커가 포함되어 있어 나만의 책으로 마음껏 꾸며볼 수도 있다. 헬로키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예쁘고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와 함께 시작하는 일본어 공부라니, 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았다. 




20일 구성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일본어를 처음 시작하는 입문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각각의 장에 QR코드를 스캔하면 저자 동영상 강의를 보거나 mp3 파일을 들을 수 있다. 히라가나와 가타가나, 그리고 발음을 익힌 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다. 하루 분량은 4장씩인데, 그날 배울 두 문장을 차근차근 설명해준 뒤, 조금 더 확장해서 표현을 알려 주고, 배운 내용을 문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했다. 문장을 소리내어 말하고, 직접 써볼 수 있는 페이지도 별도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함께 수다 타임'에서는 일본어 표현과 문화 등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누구라도 '혼자서' 기초를 탄탄하게 쌓을 수 있게끔 구성되어 있는 책이라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싶었던 초급자들에게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헬로키티와 함께 하루에 딱 두 문장만 배우면 되도록 심플하게 구성해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쉽게 구성되어 있지만 혼자서 공부하기는 어렵다면, 저자인 레이쌤의 핵심 강의가 무료로 제공되니 강의를 활용하면서 학습해도 좋을 것이다. 




영어든 일본어든 그리 쉽게 시작해지지가 않는 것이 사실인데, 어렵게 시작한다고 해도 꾸준히 지속하기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특히나 일본어는 한국어와 기본 어순이 같아서 쉽게 느껴지지만, 한자를 외워야 하는 게 만만치가 않아서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쉽고 재미있게, 시작해볼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귀여운 헬로키티가 가득해 책만 펼쳐도 기분 좋게 공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일본어를 처음 시작하는 학습자의 눈높이에 딱 맞춰서 만들어진 책이라 초보자들에게 특히 추천해주고 싶다. 


일본 여행을 가거나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일본어 단어들이 귀에 꽂히곤 하면, 다시 한번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자주 먹게 된다. 이 책과 함께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 숲의 말을 듣는 법
김용규 지음 / 디플롯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숲의 말을 듣는 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품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함께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절박함을 가늠하고,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만히 헤아리며 마주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도 이분법적인 사고와 인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열, 선악, 미추, 피아, 성패 등. 그렇게 사물과 생명, 그리고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바라 보려는 시선이 만연합니다. 단면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이 고질적인 습관을 거둘 때에 비로소 숲의 그윽한 말이 들려오 기 시작합니다.               p.43


숲의 철학자로 불리는 저자는 충북 괴산에 ‘여우숲’이라는 공간을 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과 인문학 공부 모임을 갖고,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으로 100회 이상 대중 강연과 집필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10년 넘게 산림교육전문가(숲해설가, 유아숲지도사 등) 양성기관에 출강하며 자연과 사람을 연결해왔다. 이 책은 숲을 거울 삼아 인간 실존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인간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탐구해가는 '숲으로 인문학하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숲에서 주로 먹거리를 보고, 어떤 이들은 숲을 돈을 벌기 위한 공간으로 바라보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등산이나 캠핑 등의 취미활동을 하거나 휴양하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저자는 숲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씨앗을 바라본다. 


가을에 발아하는 냉이는 왜 굳이 서릿발을 견디고 북풍한설과 동토의 시절을 모두 견딜까. 차라리 완연한 봄날을 골라 온기 가득하고 포슬포슬해진 땅에서 발아하는 것이 사는 데 훨씬 수월했을텐데 말이다. 우리가 봄나물로 먹는 냉이는 쏟아지는 눈보라와 혹독한 추위까지 다 견뎌낸 풀들인 것이다. 냉이뿐만 아니라 서리가 내릴 즈음 꽃을 피우는 산국, 속을 비우고 어린줄기마저 녹색으로 칠하는 오동나무 등 자연은 저마다의 삶의 조건들을 불평불만없이 껴안는다. 도망치지도, 미루지도 않고, 주어진 것들을 견뎌내는 것이다. 숲에는 이렇게 풀도, 나무도, 그리고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적인 질서가 가득하다. 저자는 숲을 거닐기 시작하면서 숲을 만나는 일이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일이자, 자신과 타자를 사랑할 힘을 되찾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는 20년 넘게 숲을 탐구하며 알게 된 모든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숲이 결코 홀로 살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숲은 미생물로부터 동물, 식물까지 다양한 생물이 서로 얽히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 공동체입니다. 특히 숲의 형성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식물은 바닥의 아주 작은 풀이나 양치식물로부터 거대한 높이로 자라는 교목에 이르기까지, 서로 생과 극의 관계로 이리저리 얽히면서 수직의 공간 구조를 형성합니다. 그 생명의 탑을 수직으로 살펴보면 이른 봄꽃들의 사연을 읽어낼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p.164


버드나무는 풍부한 물의 조건을 잃으면 시들어 죽게 되고, 소나무는 다른 식물이 더 높게 자라서 자신을 덮어버리면 서서히 죽음을 맞게 된다. 키가 작은 냉이 역시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키가 큰 풀들이 자신을 뒤덮으면 삶을 이어가기 어렵다. 이들에게는 빛이 커다란 숙제인 셈이다. 반면 암석 지대를 서식지로 삼고 살아가는 식물에는 토양이나 수분이, 바닷가에 사는 식물에는 염분과 거센 바람 따위의 숙제가 놓여 있다. 모든 생명이 저마다 극복해야 할 숙제를 안고 태어나고, 그것을 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삶도 이러한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삶에 숙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숙제가 없기를 바라서일 것이라고 말이다. 민들레는 척박한 땅에서도 온갖 숙제를 풀어내고 기어코 꽃을 피워 자신을 증명한다.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를 극복해 나가면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숲이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 못지않게 치열한 생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무도 풀도, 이끼도 지의류도, 참새도 까치도... 모두 저마다 스스로의 삶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품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내고,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절박함을 가늠하고,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만히 헤아리며 마주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마음속 깊이 와 닿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부드러운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포슬포슬한 흙을 밟고 천천히 숲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숲의 말을 듣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과 함께 숲 산책을 시작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아버지는 언어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도서관에서 눈알이 빠지도록 고되게 일해서 피곤했다. 아버지는 침묵에 싸여 집으로 돌아온다. 잔뜩 쌓인 책, 서늘하고 들큼하고 퀴퀴한 공기, 통로에 하나씩 달린 조명으로는 밀어낼 수 없는, 어깨 위를 맴도는 어둠에서 온 침묵이 아버지에게 배어든 것 같다. 버드는 아버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엄마 얘기를 묻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되돌릴 수 없는 일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p.23


검열과 침묵이 일상이 된 근미래의 뉴욕, 미국 전통문화 보존법 ‘PACT’을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배척된다. 이는 미국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으로 미국답지 않은 생각과 미국에 이롭지 않은 이념, 미국적이지 않은 얼굴은 모두 탄압의 대상이 된다. ‘PACT'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집에서 쫓겨나 재배치되었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PACT'가 상황을 평화롭고 안전하게 만든다고, 그에 반하는 것은 비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배우고, 믿으며 살아왔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열두 살 소년 버드는 어느 날 편지를 한 통 받는다. 발신인 주소도 없이, 오직 그림으로만 채워진 종이 한 장이었지만 버드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신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사라져 버린 어머니라는 걸 알아본다. 버드는 편지 속 그림을 보며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PACT'는 십 년도 전에 만들어진 법으로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고, 기록적인 속도로 선포되었다. 이후로 파괴적 시위는 과거가 되었었는데, 지난 몇 달 동안 곳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위나 행진, 폭동처럼 교실에서 배운 파괴 행위는 아니었지만, 뭔가 새롭고 이상한 행동이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기묘한 행동, 신고할 필요도 없는 해괴한 짓들이 이어졌던 것이다. 누가 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부 ‘PACT'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버드는 의문의 편지를 받고 얼마 뒤, 거리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을 돌려달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그 문구는 아시아계 출신 무명 시인이었던 어머니가 쓴 구절 중 하나였다. 어머니도 어디선가 시위를 조직하고, ‘PACT'에 맞서 싸우기 위해 뭔가 하고 있는 것일까. 버드는 편지를 단서 삼아 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는 어머니를 홀로 찾아 나서기로 한다. 버드는 과연 어머니를 찾아내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탁자에 펼쳐둔 노트를 내려다본다. 줄지어 적힌 다른 사람들의 온갖 이야기. 그들의 기억과 후회, 실패와 사랑,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냥 삶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한다. 기쁨과 저울질하지 않고 단순히 그 위에 덮어씌우는, 끝없이 이어지는 죄의 목록. 두 가지 목록이 서로 섞이고 합쳐지면서 모든 작은 순간이 사람을, 관계를, 인생을 모자이크처럼 이루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버드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엄마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 그녀도 그저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               p.380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설레스트 잉의 신작이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대단히 영리하고,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문장, 탄탄하게 짜임새 있는 구조, 페이지를 바삐 넘기게 만드는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까지 묵직한 울림을 남겨 주었다. 인물들의 대사, 사소한 행동,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서 뒤에 이어질 사건의 단서가 되고, 복선이 되었다. 마치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전개되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그래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혹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랜 만에 만나는 이번 작품 역시 매우 궁금했다. 


이번 작품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디스토피아로 인종, 공동체, 화합의 문제를 깊숙이 탐구한다. 셀레스트 잉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학생이었고, 비교적 평범하게 보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조금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렇게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인, 경계인으로서의 감각을 간직해왔고, 팬데믹이라는 위기가 덮쳤을 때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팬데믹 이후 더욱 선명해진 아시아계 차별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이 작품은 시대를 관통하며 깊은 울림을 남겨 준다. “젠더에서 인종으로, 《시녀 이야기》의 충격을 다시 쓰다”는 평가처럼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미국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추방하라'는 오직 미국인만을 위한 미국, 이라는 설정은 바로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통찰과 시대성을 담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나날이 견고해지는 분리의 장벽 앞에서 소설은 언어와 이야기만이 되살릴 수 있는 힘과 기억이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디스토피아라는 장르적 외피를 통해 오늘날 사회 곳곳에 스며든 폭력과 고립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 아름답고,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