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ㅣ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초록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초록은 무섭고, 섬뜩하고, 압도적이다. "초록에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자문한다. 그러나 초록은 무의미에 가깝다. 그것은 우리의 오성을 마비시키고 어지럽힌다. 또한 눈과 마음을 아프게 하고, 영혼을 옥죄고 당혹스럽게 한다. 색, 색! 다른 어떤 색도 초록 같지 않다. 다른 어떤 색도 그렇게 눈부시지 않다. 초록, 초록! 어디로 눈을 돌리건 초록빛이다. 착상과 생각, 마음의 충동도 초록과 은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초록의 성질로 바뀐다. p.53
거장들의 품격 있는 문장과 사유를 소개하는 열림원의 '열다' 시리즈, 그 네번째 책이다. 헤르만 헤세의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빈센트 반 고흐의 <싱싱한 밀 이삭처럼>, 버지니아 울프의 <모두의 행복>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로베르트 발저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이다. 에세이, 시, 소설,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의 글과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엮은 것이 이 시리즈인데, 이번 책은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 시, 단편 중 ‘숲’을 테마로 삼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새롭게 엮은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라는 책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이자 실제 삶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바로 '쓰기'와 '걷기'였다. 그는 산책길에서 발견한 하찮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의 산책은 곧 그의 글이 되었고, 그는 걷기를 통해서 어디서나 살았고, 어디에서도 살지 않았다. 그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 무더운 날에도 숲으로 뒤덮인 가파른 산을 오른다. 꼭대기에 올라 시야가 확 트이면서 하얗게 반짝거리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이 멋진 풍경은 아무리봐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늘한 초록빛 전나무 숲의 한가운데에 있는 벤치로 가서, 거기 놓여 있던 전나무 가지와 작은 손수건, 그리고 작은 인형 모자를 발견한다. 아이들의 존재는 얼마나 아름답고 선하고, 영원한지... 그는 부디 사람들이 세상의 선함과 아름다움, 행복, 위대함,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둘러 길을 내려온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단단히 고정되거나 굳건한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더 우아하고 아름답고 고상할 수 있음을 관찰할 좋은 기회다. 방금 나무와 어린나무 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이유는 누구나 곧장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 그것들이 단단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바람에 얼마나 굴복하느냐에 따라 흔들림이 생겨난다. 만일 그것들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나뭇잎은 살랑대지 않을 테고, 그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소리는 나뭇잎의 살랑거림에 좌우되고, 살랑거림은 흔들림에, 흔들림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물체에 좌우된다. p.123
계절적으로 숲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당연히 여름이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발저는 전능한 여름 숲의 초록을 잊지 못한다고 썼다. 여름 숲은 단 하나의 짙고 생기발랄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든 것이 초록이고, 사방이 초록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스럽고 다정한 것이 평생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며 친밀한 초록색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연을 멀리서 관찰하지 않고, 직접 만지고, 느끼고, 경험한다. 그의 문장으로 만나는 숲을 통해 그토록 단단하고, 크고, 넓고, 힘이 세고, 씩씩하고, 화려한 숲을 독자로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바람과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 상쾌한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발저의 진심어린 마음이 페이지 곳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상깊은 글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야간 산행'을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사실 숲은 밤이 되면 낮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달빛으로 비춰지는 환함이란 그다지 넓지 않아서, 숲이 내품은 어둠은 깊고 시커먼 동굴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말이다. 발저 역시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다고, 모든 것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시커먼 숲을 지나며 나무뿌리와 돌에 발이 차이고, 머리는 나무에 자주 부딪혔지만, 야간 산행을 아름답다고, 만물에 무언가 신성한 것이 내려 앉아 있다고 느끼는 걸 보며 그의 숲을 대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숲에 관한 이야기만 이어지는데도, 그 내용이 얼마나 다채롭고 풍부한지 지루할 틈없이 읽었다. 발저가 이끄는 대로 숲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