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2025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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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Die Liebe verwirrt nicht alles, sondern vermischt es.” 도이치는 눈앞에 있는 괴테의 명언을 독일어로 직역해 시험 삼아 소리 내어 읽어봤다. 그러자 갑자기 그 문장이 괴테스럽지 않게 느껴져서 놀랐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괴테가 한 말이라면, 18, 19세기 독일어를 언젠가 누군가가 영어로 번역했고 또 그것을 현대의 일본인이 독일어로 바꾼 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번에는 일본어로 옮겨봤다. 그러자 조금은 괴테스러워졌다.             p.44


도이치는 결혼 25주년 기념일에 딸과 아내와 함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축하를 하기로 한다. 도이치는 레드 와인을, 딸은 소다 칵테일, 운전을 맡은 아내는 논알코올 식전주를 선택했다. 딸이 마련한 축하 자리라 더 기분좋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시간이었다. 도이치는 일본의 괴테 연구 일인자로 불리는 학자다. 꾸준히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등 실적을 쌓아 정교수가 되었고, 일본독일문학회의 회장도 맡고 있다. 삶에서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영문학을 전공하는 딸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식후에는 세 사람이 각자 고른 디저트를 먹으며 곁들여 홍차도 마셨는데, 얼그레이 티백 봉투 꼬리표 부분에 명언이 인쇄되어 있는 걸 발견한다. 딸이 고른 건 <실낙원>의 문구, 아내가 고른 건 <플라톤>의 문구였는데, 자신이 고른 건 우연찮게도 <괴테>의 문구였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그런데 분명 괴테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평생 괴테를 연구해온 자신조차 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는 거다. 괴테 연구자답게 그는 문구의 원문을 찾아 문맥 속에서 정확히 뜻하는 바를 알아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낯선 문장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주장해 온 이론을 완벽하게 요약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명언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한 도이치의 탐색은 어느새 인용과 진실, 언어와 믿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적 모험으로 변해간다. 우선 144권에 달하는 방대한 바이마르판 전집을 바탕으로 괴테가 쓴 약 9만 3천 개의 단어 전체를 색인화하는 프로젝트인 '괴테 사전'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해봤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괴테 전집을 다시 찾아 읽고, 만나는 학계 사람들마다 붙들고 물어 보아도 여전히 정확한 출처를 찾기란 어려웠다. 과연 이 문구는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말은 거짓인가, 아니면 새로운 진실인가? 그야말로 하나의 문장이 삶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이치의 명언 찾기 여정은 마침내 가족들까지 함께 독일로 데려다 놓고, 그곳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찾아 헤매던 답에 도달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도이치, 괴테의 그 말 말이지, 자네는 그걸 찾을 수 있을게야. 그 말이 진짜라면."

도이치는 미나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할수록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짜'라는 건 무슨 뜻일까? '진짜 괴테의 말'인가? 아니면...... 도이치는 일단 독일어판 괴테 전집을 펼치고 명언을 찾아봤다. 그러자 전에 없던 의문이 떠올랐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건 '진짜'인가? 사랑은 모든 것을 각각의 모습 그대로 이을 수 있나?                  p.157


이 작품은 스즈키 유이의 첫 장편소설이다. 일본의 신인작가에게 수상하는 아쿠타가와상을 작년에 수상했는데, 굉장히 어린 나이인 23세이어서 더 화제가 되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 연간 1,000권의 책을 읽는 독서광이라고 한다. 고전문학을 폭넓게 탐독해 온 이력을 바탕으로 30일 만에 쓴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실제로 저자의 부모님 결혼기념일 식사 중 홍차 티백에 적힌 명언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했다고 한다. 01년생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 21세기 새로운 고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니 너무 궁금했다.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할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통찰과 지식이 담긴 소설이다'는 심사평을 받았는데,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살짝 의심도 들었고 말이다. 


작가가 짧은 기간에 쓴 작품인 만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읽었다. 일반적인 소설처럼 스토리 위주로 진행되는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집중해서 읽을 정도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문학적 장치와 인용으로 가득한 부분 또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이 학자이기 때문에 수많은 학술적이거나, 문학적인 인용들로 가득하다. 괴테부터 몽테르, 볼테르, 뉴턴, 니체, 보르헤스, 말라르메까지 그들이 했었던 말들 혹은 했다고 오해되는 말들까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인문학 지식들을 수많은 명언들로 풀어내는데, 그 과정이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게 읽힌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중심 서사를 한 가족의 이야기로 가져가면서 주인공이 명언의 진위를 찾아 가는 과정을 그들의 삶 속에 고스란히 풀어냈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왜 일본 언론은 그를 움베르토 에코, 칼비노, 보르헤스에 견주며 “일본 문학의 샛별”이라고 평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만큼 고전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토대로 쓰인 작품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2000년대생으로는 최초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문학계를 뒤흔든 젊은 작가의 놀라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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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제인의 모험
호프 자런 지음, 허진 옮김 / 김영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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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삶은 산 사람의 몫이다. 나는 살아 있었고, 수전과 조애나도 살아 있었다. 그 사실에 대해 나는 끝없이 감사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세상 전체가 멈춰야 할 것만 같다. 내 세상이 멈췄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계속 흐르고 사실은 나도 그렇다. 커피를 끓이고, 빈 깡통을 선반에 다시 올려두고, 텃밭을 쪼아대는 까마귀를 보고 쫓아낸다. 허리를 굽혀 호박이 얼마나 자랐나 들여다보고, 사고 싶었던 소 한 마리를 떠올리며 잠깐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p.202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게 마련이다. 주인공의 서사를 위해 그외 다른 인물들의 서사는 축소되거나 생략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길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물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고 드라마가 있다는 것을. 누구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잠깐 등장했던, 주인공 헉이 좋아했던 메리 제인이라는 소녀가 이야기의 전면에 나섰다. 누구나 책에 담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고전의 재해석이다. 


사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메리 제인은 겨우 28쪽에만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소설 속에서 헉은 메리를 두고 '그녀는 내가 지금껏 본 어떤 여자보다 용감했다. 정말 용기로 가득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호프 자런은 이 책을 너무 좋아해서 여러 번 다시 꺼내 읽곤 했는데, 읽을 때마다 메리 제인이라는 인물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고 한다. 쉽게 속아 넘어가는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 사이에 간극이 너무 컸고, 순종적인 태도와 헉같이 대담한 소년이 그런 그녀에게 푹 빠진다는 설정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여자애,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라는 속삭임이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때부터 박물관과 도서관, 유람선과 카누를 따라 진짜 '빨강 머리 아이'를 찾아 나서는 10년에 걸친 긴 여정이 시작된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 <제인 에어> 속 캐릭터를 주역으로 완전히 다른 작품을 써낸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으며, 고전이 끝내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들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메리 제인의 모험>을 쓰게 된 계기가 된다. 그렇게 해서 '메리 제인'의 진짜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피터 폰드 아저씨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살아온 이야기 말이다. 자라고, 몸집이 커지고, 나이가 들고. 그러자 내가 집을 떠난 이후로 만난 모든 사람, 내 삶에 겨우 하루이틀 들어왔던 사람들까지도 전부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애를 써도 당신에게 말해줄 수 없는 이야기. 책 한 권을 채울 정도의 이야기. 이 깨달음이 오래 남았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 내 삶은 달라졌다.            p.446


엄마와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열네 살 메리 제인은 어느 날 도착한 한 통의 편지를 통해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실크 원피스 세벌이랑 찰스 디킨스 책을 짐으로 챙기고, 난생 처음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멀리 가서도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감해진 기분도 들었지만,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아 무섭기도 했다. 그렇게 배를 타고 긴 여정을 시작하며, 메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집을 떠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 아무리 애써도 상상조차 되지 않는 것들을 직접 경험하는 어린 소녀의 드라마틱한 여정은 우리를 19세기 중반으로 데려간다. 세상의 좋은 면을 보려고 하는 선한 마음과 옳은 일을 하려는 의지,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 마인드가 페이지마다 햇살처럼 반짝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랩걸>이라는 아름다운 과학책을 썼던 호프 자런의 첫 번째 소설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주인공 헉이 좋아했던 메리 제인이라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준다. 최근에 읽었던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에서는 역시 같은 원작에서 흑인 노예 '짐'의 시선으로 새로운 서사를 보여줬었는데,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이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너무 궁금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중반, 미국 중심부를 관통하며 흐르는 미시시피강의 상류이다.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행을 떠나는 열네 살 소녀의 성장기는 과학자다운 역사 연구와 현장 답사로 더욱 생생하게 펼쳐진다. 고전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항상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과학자’로서, ‘여성’으로서, ‘여성과학자’로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걸어온 호프 자런이기에 소설로서도 그 의지를 제대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 대부분은 실제 19세기의 장소와 사건, 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미시시피강의 상류를 따라 메리와 함께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행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었다. 자,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터질 듯한 희망으로 가득한, 이 눈부신 모험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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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나의 표현력을 위한 필사 노트 - 뭉툭한 생각을 정교하게 다듬어주는 표현력 되찾기 하루 한 장 필사 노트
유선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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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필사 열풍을 이끌었던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의 후속작이 나왔다. 전작이 '어휘'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표현'에 중점을 둔 문장들로 꾸렸다. 책 자체도 예쁘고, 필사하기에 좋게 쫙쫙 잘 펴지는 양장본인데다, 구성이 매우 뛰어난 책이었다. 이 책은 단순히 좋은 문구들만 모아서 베껴 쓰는 개념이 아니라, 필사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단계별로 제시되어 더 좋다. 표현과 친해지는 첫 번째 단계를 시작으로 표현력을 기르는 비결인 짜임새와 비유에 대해 배워보고, 마지막으로 표현력이 주는 힘을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을 필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따금 빤히 아는 낱말인데 소리 내어 말하거나 손으로 쓸 때 새삼 낯설게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는데 막상 말이나 글로 사용하려니 어색하다면 듣고 보기는 했어도 입이나 손과 같이 몸을 써 사용한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이 책과 함께 문장을 눈으로 읽고, 그 문장으로 입으로 소리 내 다시 읽어 보자. 종이에 옮겨 쓸 때는, 쓰고 있는 글자를 동시에 나지막이 소리 내면서 필사하면 더 좋다. 어감을 익히는 데 말소리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트리나 폴러스 <꽃들에게 희망을>,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프리드리히 니체 <나의 행복, 윌리엄 셰익스피어 <폭풍우>, 이제니 <사과와 감>,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김현 <말들의 풍경>,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은희경 <아내의 상자>, 헨리크 입센 <유령>, 정세랑 <덧니가 보고 싶어>, 대실 해밋 <몰타의 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더글라스 케네디 <빅 픽쳐> 등 저자가 고심해서 고른 문장들은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만들어졌다.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고, 천천히 필사를 하며 마음에도 담는 시간이었다. 



유선경 작가는 30년 넘게 매일 글을 쓰고 있으며, 1993년부터 라디오 방송에서 글을 썼고, 일주일에 5권 이상 책을 읽는 다독가이기도 하다. 또한 중학생 때 처음 필사하기를 시작했고, 열아홉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노트에 옮겨 써서 그 분량만 10포인트로 1,500매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노하우와 데이터를 담은 것이기에 여타의 필사책들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단순히 좋은 문장을 옮겨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표현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책의 왼편엔 저자가 직접 고른 문장들이 있고, 오른편엔 필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그 아래에 저자가 쓴 메모가 있다. 메모에는 해당 표현에 대한 추가 설명과 작품에 대한 배경, 필사를 더 와닿게 하는 방법 등 표현력을 기를 수 있는 저자의 상냥한 가이드가 담겨 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창작이 되려면 사유가 필요하다고 조목조목 짚어주고, 필사하기 전에 꼭 소리 내어 읽으라고 당부하며 글의 짜임새와 운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본질을 '호모 엑스핑고(Homo expingo, 표현하는 인간)’라고 명명했다. 인류가 이토록 번성한 비결은 고립이 아닌 협력에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한 도구는 이심전심이 아니라 언어라는 표현이었다고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타자의 생각이나 느낌을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알리고 싶어 한다. 이해해야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력과 표현력을 늘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책 읽기와 필사이다. 저자는 각 장 사이사이 '호모 엑스핑고로서 표현하기'라는 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두었다. 필사 노트를 차례로 따라가는 동안, 스스로의 글을 써볼 수 있도록 다양한 미션을 준다. 직유나 은유 등의 비유법을 써서 이루고 싶은 소망 등을 표현해보기, 당신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잇다'의 순간을 떠올리고 그 존재를 표현해보기 등등 뭉툭한 생각을 정교하게 다음어주는 표현력을 배우고 실천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읽기가 경험이라면 필사는 체험이다. 이 책에 수록된 동서고금의 작가들이 내놓은 문장들을 매일 필사해보며 표현력을 길러 보자. 저자가 제안하는 필사 방법은 이렇다. 먼저 문장을 눈으로 읽고, 그 다음 입으로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보고, 그 다음에 옮겨 쓴다. 쓰고 있는 글자를 동시에 나지막이 소리 내면서 필사하면 더 좋다. 차근차근 이 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필사하기 딱 좋은 계절, 읽고 쓰는 시간을 통해 어휘력 너머, 표현의 깊이를 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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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시작한 불은 책으로 꺼야 한다 - 박지훈 독서 에세이
박지훈 지음 / 생각의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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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매주 쏟아지는 온갖 장르의 신간을 아주 빨리, 출판사들이 동봉한 살뜰한 보도자료와 함께, 심지어 공짜로 받아보는 이는 많지 않다. 사무실에 쌓이는 신간들을 통해 나는 매번 저자들이 벌인 고군분투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 크고 작은 흠집이 있더라도, 그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모든 책엔 하나같이 저자의 노고와 진심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자맥질하다가 최후에 터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같았다.               p.66


독서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종종 모두가 열광하는 작품이 내겐 아무런 감동을 남기지 못하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작품이 내게는 심금을 울리는 특별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책이란 작품성이 뛰어나고, 문학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위대한 고전만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각자의 취향이 다르기에 우리는 타인의 독서 습관에 대해 궁금해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내가 읽었던 책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독서 에세이가 끊이지 않고 계속 출간되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매주 수백 권의 책을 마주하던 일간지 출판 담당 기자의 독서 에세이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사회부, 문화부, 종교부에서 일했는데, 그 중에서도 문화부에서 출판 분야를 담당했던 몇 년을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이 책은 서평과 에세이의 경계에 있다'는 곽아람 작가의 추천평처럼, 국문학을 전공했고, 책을 읽는 일이 직업이었던 저자의 글이라 그런지 잘 읽히지만 짜임새 있고 깊이가 있는 독서 에세이였다. 문학부터 사회과학, 경제경영, 철학, 역사,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 서른 네 권에 대한 저자의 서평을 만날 수 있었다. 수전 올리언의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 김연수의 <7번국도>, 호프 자런의 <랩 걸> 등 이미 읽었던 책들이 나올 때는 반가웠고, 프란스 드 발의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아누 파르타넨의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미치오 카쿠의 <인류의 미래> 등 몰랐던 책들은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고 메모해 두었다. 




“좋은 책은 무엇인가” 묻는다면, 많은 답변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을 흔들거나, 생각을 자극하거나, 통찰을 제공하는 작품이 좋은 책이라고. 좋은 질문이 담기거나 좋은 답이 실린 책, 혹은 그 둘을 모두 가진 것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좋은 질문은 무엇이고 좋은 답은 어떤 것일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질문이 훌륭할수록 답을 찾기 어려울 때가 많다. 답이 없더라도 생각할 무언가를 무더기로 던져주는 것도 때론 좋은 책의 조건이 되는 셈이다. 독자는 이런 책을 보면 독서 이후 찾아오는 온갖 질문들을 사유의 광맥으로 삼게 된다.               p.157


저자는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을 회사를 휴직하고 미국에 머물던 일년 여의 시간 동안 쓴 것이라고 한다. 어떤 주제를 떠올린 뒤, 그에 걸맞은 책을 찾아 읽고, 나름의 감상이나 논평을 곁들인 글들을 쓰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주로 작업을 한 탓에 한국어로 된 종이책을 욕심껏 구해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고 하지만, 한국에서였다면 늘 시간은 부족하고, 본업이 아닌 일에 마음을 쏟아 붓기가 어려웠을 테니 이만큼의 원고도 쓰기 어려웠을 거라고.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럴 것이다. 직업이 아닌 취미로 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하기란 현실적으로 결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게 쓰인 글이었고, 책과 삶이 고스란히 겹쳐져 있는 글이라 더욱 공감하며 읽었다.


출판 담당 기자는 매주 나오는 신간 가운데 '금주의 책'이겠거니 싶은 작품들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하는 일을 한다. 출판면 마감은 매주 수요일이었고, 전주 수요일부터 차주 화요일까지 들어오는 신간은 200권 안팎이었다. 2개의 지면에 비중 있게 소개할 수 있는 책은 많아야 서너 권에 불과했기에, 주마간산 수준으로 책들을 훑어본 뒤 최종작들을 선정해 읽고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취미이던 독서로 돈까지 벌게 됐으니 건성으로 볼 순 없었지만,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홍수처럼 쏟아지던 활자 속에서 허우적대다 간신히 마감한 뒤 돌아보면 또다시 책상엔 눈사태가 난 것처럼 한가득 신간이 쌓여 있곤 했다니.... 애서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꿈의 직장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 속에서 나름의 현실적인 고충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출판 기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너무 재미있었고, 책에 대한 감상 또한 잘 정제된 문장으로 쓰여 있어 공감하며 읽었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세상에는 좋은 책이 너무 많고, 그 책들을 다 읽기엔 시간이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또 다음에 읽을 책을 골라본다. 책에 대한 책을 읽고 나면, 찾아서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이 늘어나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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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하다 앤솔러지 3
김남숙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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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뭇잎들이 바람을 맞아 흔들거렸다. 수천 개의 잎이 흔들거리는 속에서 새벽하늘에 뜬 별들이 잠깐 보였다가 잎에 가려졌다가 했다... 식물들을 제외한다면 나는 죽은 남자와 단둘이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과연 식물들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왜 생기지 않는 걸까? 궁금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보다는 내 몸 위로 자기 몸만 한 무늬의 그늘을 드리우는 잎사귀들, 곤히 잠들어 있는 식물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 '김채원, '별 세 개가 떨어지다' 중에서, p.67


석 달 정도 가족들과 연락이 없었던 할아버지가 걱정이 된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홀로 가꾸고 있는 종묘원을 방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종묘원은 반원형의 이글루 모양으로 온실 같은 곳이라기보다는 작은 야생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곳을 정성껏 가꾸며 혼자서 재미있는 걸 하고 있었고, 안심이 된 두 사람은 할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군가의 '발'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무도, 식물도 모두 조용한 그곳에서 묻힌 채 발견된 죽은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산희는 이제 막 이사를 마친 참이다. 집 안은 포장 테이프를 뜯지 않은 상자들, 책장에 엉망으로 꽂힌 책들과 옷이 담긴 커다란 비닐봉지등으로 가득했다. 정리를 조금 하다가 지금 이 집에서 뭐가 더 필요한지 목록을 챙겨 본다. 인터넷 연결도 아직 안 했고, 화장실 휴지와 암막 커튼 등이 필요했다. 급한대로 필요한 물건을 사러 익숙한 마트에서 장을 보고 다시 낯선 집으로 돌아온다. 더 늦기 전에 청소기라도 돌려야 할 것 같았는데, 도무지 청소기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전에 살던 집에 두고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다음날 퇴근하면서 들러 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 집에 새로 온 세입자는 자신과 똑 닮아 있었다.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산희는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신과 똑 닮아 있는 상대와 마주하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산희와 똑같이 생긴 그는 대체 누구일까. 




산희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지만 꾹 참고 커피를 마시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산희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산희는 자신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그잔을 든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까지도 산희의 그것과 똑 닮아 있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경찰이 자신을 지목할지도 모르겠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지문까지 똑같은 거 아니야?

「저 진짜 모르세요? 우리가 너무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요.」

         - 한유주, '이사하는 사이' 중에서, p.174~175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그 세 번째 책 <보다>에는 김남숙, 김채원, 민병훈, 양선형, 한유주 작가가 참여했다. 다섯 편의 이야기 중에 김채원 작가의 <별 세 개가 떨어지다>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따뜻하고 코지한 분위기도 좋았고, 은근슬쩍 벌어지는 미스터리도 흥미로웠다. 그 외에도 오키나와 모토부에서 있었던 일을 그린 <모토부에서>, 하얀 손님을 자신의 트럭에 태우게 된 한 운송 기사의 이야기인 <하얀 손님>, 홋카이도의 왓카나이 소야곶의 수평선 너머를 상상해보는 <왓카나이>, 이사를 나온 뒤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 똑 닮은 사람과 마주하게 되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이사하는 사이>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며 살아 간다. 같은 상황을 함께 겪더라도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각자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속 인물들은 글이 써지지 않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그 이면을 상상하고,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해 도착한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너무 닮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하게 되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우리가 바라보고, 지켜보고, 살펴보는 것에 관한 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각자 작가들의 개성으로 가득하다. 잘 안 읽히는 작품도 있었고, 좋았던 작품도 있었는데 그렇게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앤솔러지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된 표지가 아름다운 이 시리즈는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까지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시리즈 네 번째 책인 <듣다>가 벌써 나왔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작가들이 참여해 기대하는 중이다. 빨리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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