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요리합니다, 정식집 자츠
하라다 히카 지음, 권남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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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조우 씨가 쟁반을 건네자, 사야카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냉장 케이스로 가서 병맥주와 뽀얀 김이 서린 잔을 가져왔다. 치킨난반을 한 개 먹었다. 여전히 달고, 그리고 시다. 맥주 뚜껑을 따서 잔에 따라 단숨에 꿀꺽꿀꺽 비웠다.

"맛있네요. 밥과 술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조금 평온함조차 느꼈다.

"지금이라면 맛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난,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편도 알아주길 바랐을 뿐인데요. 강요만 했네요."                  p.63~64


사야카는 아침, 점심 도시락, 저녁까지 하루 세 번 요리를 했었다. 2인 가족이었지만 남편 겐타로는 키도 크고 근육질 체형이라 먹는 양이 상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남편이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회사 핑계로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 일이 잦아지더니, 조금씩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 때문에 늦는다는 날의 대부분은 식당 '자츠'에서 술을 마시는 거였다. 사야카는 동네의 허름한 식당에서 가끔 술 한잔 하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혹시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다 남편은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며 집을 나가버렸고, 도저히 납득이 안 갔던 사야카는 그가 다닌다는 가게에 직접 가보기로 한다. '자츠'는 역에서 곧장 이어지는 상점가 한복판에 자리한 낡은 식당이었다. 다가 그 집 음식은 맛도 진하고 달기만 해서 자신의 요리보다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사야카는 수입이 줄기도 했고, 남편이 이혼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고자 '자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는데, 그녀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이 작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정식집 '자츠'를 운영하는 주인 조우와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혼당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사야카,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호로요이의 시간>이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면 말이다. 일본 여성작가 5인이 담금주부터 사케, 칵테일, 위스키까지. 술을 소재로 여성들의 삶을 그려낸 단편집이었다. 하라다 히카는 <식당 ‘자츠’>라는 제목의 단편으로 참여했었는데, 그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이야기 <크로켓>이다. 짧은 단편으로 시작되었던 이야기가 이렇게 본격적인 작품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야카와 남편은 별거 상태였었는데,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가게의 전 주인과 특별한 인연이었던 것 같은 무뚝뚝한 가게 주인 조우의 과거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본인은 '그냥 평범한 요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안다. 아내가 만든 요리는 뭐든 맛있었다. 감자조림도 채소조림도. 감자조림은 니쿠자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도 물론 맛있지만, 그리고 '자츠'에서 먹는 니쿠자가도 정말 좋아하지만, 사토는 감자를 약간 달달한 육수에 조린 것 같다. 때로는 어묵을 넣기도 하고, 실곤약이나 오징어를 넣기도 했다. 대충 만든 것처럼 보여도 언제나 맛있었다. 아, 역시 그게 먹고 싶다. 그러나 이런 요리는 너무 평범해서,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다. 사토와 함께 사라진 요리다.              p.160


<낮술>, <호로요이의 시간>, <우선 이것부터 먹고>, <할머니와 나의 3천 엔>, <도서관의 야식>, <헌책 식당>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하라다 히카의 신작이다. 전 3권으로 출간되었던 <낮술>이라는 작품을 특히나 좋아한다. 지킴이 일을 하는 삼십대 여성이 하루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점심에 맛있는 음식과 거기에 어울리는 술 한 잔을 곁들이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그렸던 작품인데, 음식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었다. 하라다 히카는 소설을 통해서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이 줄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우선 이것부터 먹고>에서는 대학 동창들이 만든 스타트업 회사를 배경으로 사무실에 오게 된 중년의 가사 도우미가 음식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는 이야기를 그렸고, <도서관의 야식>에서는 밤에만 문을 여는 도서관과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야식이라는 설정으로 책 속에 등장하는 요리를 실제로 만들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먹는다는 판타지를 구현시켜주었다. <헌책 식당>에서는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로 알려진 도쿄 진보초에 자리한 작은 서점 ‘다카시마 헌책방’을 배경으로 다양한 손님들의 이야기를 잘 차려진 한상 차림의 음식처럼 맛깔스럽게 그렸었다. 


이번 작품 <마음을 요리합니다, 정식집 자츠>의 메인 요리들은 크로켓, 돈카츠, 가라아게, 햄카츠, 카레, 그리고 주먹밥이다. 각각의 음식들이 각 장의 제목이 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소소하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자라온 환경도, 나이도, 성격도 다른 조우와 사야카, 그리고 자츠에 방문하는 손님의 시점으로 번갈아 가며 이야기가 진행되어,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하라다 히카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라다 히카가 페이지 위에 재현해내는 음식들은 그 맛과 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보여주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묘사만으로 당장이라도 먹고 마시고 싶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하라다 히카만의 특별한 점이다.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는 소박하지만 맛있는 한 끼 식사와 어떤 스트레스도 다 날려 줄 것처럼 시원한 한 잔이 있다면 오늘을 버텨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줄 것이다. 자, 이 책과 함께 사라진 삶의 온기를 천천히 데우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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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편지
설라리 젠틸 지음, 최주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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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글은 의미를 가지잖아요. 그러니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의미를 부여하는 건 독자에게 달린 거 아닌가요?"

"글쎄요......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의미를 찾아가죠. 발견은 독자의 몫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작가가 보여주는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 작가의 도덕성은 작가가 제시하는 길을 독자가 신뢰할 수 있는지에 영향을 끼친다고 봐요."


미스터리 소설가 위니프레드는 보스턴공공도서관에서 글을 써보기로 한다. 문제는 도서관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하염없이 열람실 천장을 쳐다보게 된다는 것. 뭐라도 쓰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다. 양팔 어깨부터 손목까지 문신이 가득한 젊은 여자는 프로이트를 읽고 있었고, 하버드 로스쿨 셔츠를 입고 있는 젊은 남자는 턱 한가운데가 갈라져 옛날 만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같았다. 그의 왼쪽에 있는 잘생긴 남자는 노트북으로 일을 하며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프로이트 걸, 만화 주인공 턱, 잘생긴 남, 세 명으로 어떤 관계를 만들어 볼까 생각하던 중에 어디선가 날카롭고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덕분에 네 사람은 서로 말을 나누게 되고, 그걸 계기로 친구가 된다.  


알고 보니 프로이트 걸 마리골드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하버드 대학생이었고, 만화 주인공 턱 윗은 부모가 변호사인 법대생, 잘생긴 남 케인은 책을 출간한 적이 있는 작가였다. 그날 그 사건은 보스턴공공도서관에서 청소부가 젊은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으로 뉴스에 보도가 된다. 누군가 죽는 순간을 귀로 듣고 함께 목격했다는 사실로 네 사람은 아주 특별한 관계가 되는데,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는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날 살해당한 여성에 대해, 사건의 범인에 대해 추측하면서 점차 친밀한 사이가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작가인 프레디와 케인이 가까워진다. 하지만 케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는데, 겨우 한 달 만에 친구에서 연인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사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건 당시 한자리에 있던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어떻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지를 추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이 이야기는 점차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이리 저리 관계가 얽히면서 복잡해진다.




내면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소설의 형태로 공개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신의 한 수예요. 인정해요. 잘 보이는 곳에 숨는 것이랄까요. 하지만 말이 되죠. 살인자는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싶지는 않지만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들키지 않고 교묘히 빠져나간데 대해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거든요. 자기 행위를 소설에 자세하게 집어넣는다면 완벽할 거예요... 그때 내가 범죄 현장 사진을 몇 장 보냈었어요. 이번 이메일에는 또 다른 사건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했어요.              p.303


‘The Woman in the Library’라는 원제부터 호기심 가득했던 책이다. 특히나 국내 버전에서는 책 표지에 찍힌 피묻은 지문, 띠지 뒷면에 첨부된 사진 등 책의 물성도 소설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색다른 디자인의 작품이라 읽기 전부터 매우 기대가 되었다. 책의 날개가 편지봉투처럼 전체를 감싸고 있어, 스티커의 봉인을 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점도 몰입감을 더해준다. 이야기는 유명한 소설가 해나가 집필 중인 <도서관 비명 살인 사건>이라는 소설과 각 장의 원고를 읽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하는 작가의 오랜 팬 리오의 편지로 교차 진행된다. 액자 구성으로 보스턴공공도서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 속 이야기가 주요 서사로 진행되는데, 작가가 쓰는 대로 매 장을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리오의 편지가 매우 디테일하게 작품을 분석해 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호주에서 집필 중인 작가가 쓴 작품이기에 보스턴에 거주하는 리오가 미국식 표현과 뉘앙스, 실제 장소의 분위기, 캐릭터의 배경과 작가의 의도에 대해 하나씩 짚어 내는 것이 그만큼 세심할 수밖에 없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리오의 편지 내용이 점차 수위를 넘기 시작한다. 실제 벌어진 범죄 현장의 사진을 보낸다거나, 시체를 둘 적절한 장소를 알려준다거나, 소설 속 범인과 공범의 존재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점점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편지는 점점 어둠을 잠식해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리오는 단순히 작가의 열성팬인 것인지, 그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극중 도서관 비명 살인 사건의 범인은 네 사람 중 누구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활자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할까? 그에 대한 대답을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겉으로 보여지는 물리적 경험을 통해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이 놀라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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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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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는 이미 오래전에 공장에서도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길고도 단조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부자도 빈민도 없고 공장은 노동자의 소유이고 노동은 구속이 아니라 찬양이며 해방된 신체의 건강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믿지 않았다. 괴물 같은 기계를 제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미 땅속으로 몇 미터나 뿌리를 내렸다. 기계는 이미 기억할 수 없이 오래전부터 작동하기 시작해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맨손으로 톱니바퀴를 붙잡겠다고? 기계는 멈추지 않고 손만 뜯겨나갈 것이다.             p.49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프랑스, 공장들은 일주일에 며칠씩만 가동했고, 인력을 줄였다. 피에르 역시 하루 아침에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로 다시 일자리를 찾아 다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무도회에 가기 위해 새구두가 필요하다고 말한 여자 친구 자네트에게 해고당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집세가 밀려 집에서도 쫓겨나고 보니 갈곳이 없었던 피에르는 거리를 배회하다 자네트가 잘 차려입은 남자와 호텔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격분해 주먹을 휘둘렀다가 그대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 굶주림에 지쳐 쓰레기통을 뒤지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다 벤치에서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손짓에 눈을 뜬다. 경찰관인줄 알았던 그는 친숙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친구 르네를 통해 피에르는 드디어 일자리를 찾게 된다. 


시립 정수장 수압관리탑에서 근무하게 된 피에르는 르네가 일하는 세균 연구소에 실험실에 있는 미생물들의 정체에 대해 듣게 된다. 세상에 알려진 모든 전염병이 시험관 안에 있었던 것이다. 르네는 그 기구들을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돌보고 먼지를 닦고 광을 내면서 자신의 부주의한 손가락이 단 한 번 조심성 없이 움직이기만 해도 깨져버릴 물체들의 존재를 느끼고 마음을 쓰게 되었다고, 자신의 생각을 피에르에게 말한다. '굉장하지 않아? 상상해봐,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 시험관에 든 형제들을 전부 뿌리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생각해, 우리 파리에 남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의 말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던 피에르를 자극했고, 결국 그는 파리의 수압관리탑에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다. 다음 날인 7월 14일,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에 파리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자기 손으로 진흙을 이겨서 자기 집을 만들 벽돌을 굽고 건물의 토대를 닦고 땅 위로 한 층 한 층씩 쌓아 올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형은 알아? 새롭고 단단하고 더욱 완벽해진 삶을 건설한다는 것… 나 자신이 그 엄청난 인간 눈사태의 핵심이 되어 날아올라 미래를 향해 간다고 느끼는 것… 그 눈사태는 내 위로 더욱 커져서 눈덩이가 뭉치듯 굵은 덩어리가 돼. 그리고 내가 그 심장인 거야…내 몸이 그 피가 돼서 혈관에서 혈관으로 스며들어...”             p.274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폴란드 작가 브로노 야시엔스키는 이 작품에서 전염병으로 자본주의 도시가 붕괴된 뒤 새로운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건설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대도시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작가가 당시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온 것처럼 매우 파격적인 형태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문학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20여 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발견한 정보라 작가가 기획, 번역을 맡았다. 정보라 작가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브루노 야시엔스키가 어떤 작가인지에 대한 정보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수록했는데, 작품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품은 출간당시 강렬하고 선동적인 내용 때문에 출판사를 찾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파리의 출판계에 인맥이 닿아 잡지 <뤼마니테>에 연재하게 되었고, 결국 이 작품은 야시멘스키가 프랑스에서 추방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우리가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팬데믹을 겪었기 때문에 이 작품 속 상황이 더 와닿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허구의 상황이지만 실제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겪어냈던 기억이 있기에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실직한 공장 노동자가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 과정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헤프닝 같은 사고였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염병이라는 재난으로 인해 사회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파리를 꿈꾸는 공산주의 활동가, 미국 자본가에게 접근해 탈출을 꿈꾸는 유대인 구역의 지도자, 볼셰비키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해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다 권력을 잡게 되는 러시아 고위 장교의 아들, 등 이 작품은 국적과 계급, 정치성향이 다른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각기 다른 야심을 품은 이들이 자치정부를 세우고, 흑사병이 파리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게 된 뒤, 탈출한 일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20세기 어느 혁명가가 뜨겁게 상상했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거의 백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현대 사회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도발적인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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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도감 - 제25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96
최현진 지음, 모루토리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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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비였더라면, 떨어지는 순간에 누나의 어깨뼈에서 날개가 펼쳐졌을 거다. 나비는 날개로 날아갈 수도 있고 소리를 느낄 수도 있다.

"우리한테는 서로가 있어."

나는 누나가 했던 말을 소리 내어 보았다. 시계탑을 돌아 내 목소리가 돌아왔다.

우리가 나비였더라면. 내가 나비처럼 귀가 아닌 날개로 누나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면.              p.36


열한 살 산이는 오늘 처음으로 학교에 혼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열한 살이면 학교는 혼자서 갈 수 있는 나이이지만, 산이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산이의 왼쪽 귀는 소리를 잘 못 듣기 때문이다. 일곱 살 때 수영장에서 수심이 깊은 곳에 들어갔다온 뒤로 왼쪽 귀가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해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일측성 소아 난청'이라고 말했다. 두 살 많은 메아리 누나는 왼쪽 청력이 약한 산이를 위해 늘 동생의 왼편에 서 주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산이 혼자 학교에 가야했다. 누나와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걸어서 학교에 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횡단보도가 어려웠다. 초록불이 들어와도 우회전하는 차가 불쑥 등장하기 때문이다. 보청기를 껴도 소리가 완벽하게 잘 들리는 건 아니라서, 왼쪽에서 차가 오는 걸 모를 때도 많았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와 워터파크에 갔던 초등학교 6학년 양이 26미터 높이의 워터슬라이드가 붕괴되면서 추락해 숨졌습니다."


메아리 누나는 얼마 전 여름방학 때 친구와 워터파크에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는 함께 갔다가 혼자만 살아남은 누나의 친구 두나 누나에게도, 아이 혼자 워터파크에 보냈다는 비난을 받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엄마에게도, 그리고 그날 아침 자신을 빼놓고 혼자만 놀러가는 누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다가 싸우게 되었던 산이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은 누나가 아끼던 카우보이모자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산이는 누나의 모자를 쓰고, 누나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대신 하기로 한다. 길고양이에게 우유를 주고,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마니또에게 선물을 전해주고, 워터파크에 함께 갔었던 두나 누나를 만나 학교에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누나의 모습들을 하나씩 알게 된다. 산이는 이 작은 모험을 통해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누나의 죽음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1 더하기 1은 2이고, 지구의 절반은 물이라는 사실처럼, 우리 때문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한다. 순식간에 물로 가득 찼던 내 왼쪽 귀처럼 마음도 잠기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누나가 죽는 순간을 그만 봤으면 좋겠다.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마음껏 누나를 생각할 수 있게. 누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눈이 빠지도록 울어 보고 싶다. 누나에게 사과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p.122


이 작품은 제25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다. 최근에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스파클>을 쓴 최현진 작가의 신작이기도 하다. <스파클>이 사고로 오른쪽 각막을 이식받은 청소년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 <나비도감>에서는 왼쪽 청각을 상실한 어린이가 결핍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야기 중간 중간 산이가 작성하는 나비도감이 등장하는데, 나비라는 존재는 이 작품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처음 나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산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떠난 아빠가 남기고 간 책 <세계나비도감>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아빠의 흔적이었으니 말이다. 도감에는 사실만 적혀 있었고, 적혀 있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에 산이는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 워터슬라이드를 타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아빠는 살아 있지만 자신에겐 아빠가 없다는 사실, 그래서 아빠는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고, 누나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비는 귀가 없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날개 끝으로 소리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쩌면 산이가 나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나비도감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이러한 부분이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산이 누나의 죽음은 워터파크에서의 사고사였기에, 그 영상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되고, 소비된다는 점이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타인의 슬픔마저 소비하는 세상 속에서, 산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나의 죽음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함께 슬퍼하는 방법과 제대로 애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상실 이후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겪어 나가야 할지를 눈부시게 보여준다. 슬픔의 중력을 거슬러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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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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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의 온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지, 얼마나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쿠로는 미노루와의 나날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어째서 옆에 있어주는 것일까.

"언어는 확실히 중요하지. 하지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인 건 아니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스이가 말했다.

미노루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 '여름 바람의 행복' 중에서, p.121


저명한 화가인 미노루는 종달새 마을에서 삼십 년 가까이 살아왔다. 아내와 단 둘이 살다가 8년 전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지금은 고양이 쿠로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자녀가 없고 양친도 오래전에 돌아가셨기에 쿠로는 아내 외에 처음으로 생긴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칠십대인 미노루는 반년 전에 육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았기에 미노루는 가정부 하나에에게 종달새 언덕의 마녀에게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삽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곳에 살면서 한 번도 마법상점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가야할 일이 생긴 것이다. 마녀는 동물과 대화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고양이 쿠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노루는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고 아내에게 제대로 묻지 못했던 말을 쿠로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한 시간, 넌 행복했냐고 말이다. 과연 마녀는 미노루의 소원을 들어줄까.


소설가인 하루코는 지금까지 단행본 일곱 권과 문고본 열다섯 권을 출판했다. 화제가 된 작품이 없어 결코 잘나간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계속해올 수 있던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근근이 이어온 작가 생활도 이제는 정말 끝나버릴지 모른다. 소설을 출판한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좀처럼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라 제로 상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 이야기가, 부스러기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초조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종달새 언덕의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루코는 그곳에 찾아 보기로 한다. 재미있는 소설 아이디어가 샘솟는 마법을 부탁하기 위해서.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한 번 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마법상점에서 마녀는 하루코의 이야기를 듣더니 말한다. 마법으로 소원을 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면, 행복하겠느냐고. 과연 마녀는 하루코의 소원을 들어줄까. 하루코는 마법을 통해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될까. 




"마음은 무엇보다도 강해. 하지만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지. 말은 때때로 마법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켜."

빛이 강해진다. 스이의 빨간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고, 머리카락은 중력을 거스르며 붕 떠오른다.

도키오는 숨을 멈춘 채 기적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스이는 도키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지 멈춰 설지는 본인이 정해야겠지."

오르골을 휘덮은 빛이 사라졌다.                - '겨울이  끝나면' 중에서, p.254


종달새 마을의 종달새 언덕에는 마녀의 상점이 있다. 벽에 담쟁이덩굴이 덮여 있고, 키가 큰 빨간 꽃이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작은 목조 주택이다. '종달새 언덕 마법상점'에는 한 걸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바깥과 다른 공기가 몸을 감싼다. 마치 마치 이곳만 계절 바깥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곳에는 인형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 진녹색 로브를 입고, 붉고 긴 머리카락에 불에 타는 듯한 빨간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는 그대로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열다섯 남짓의 소녀 모습을 한 그녀가 바로 마녀 '스이'다.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 오는 그곳에 간다. 하지만 그중 정말 마법으로 소원을 이루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가도,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서 생명 연장을 애원해도 마녀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절대로 마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마녀의 마법상점을 찾아가는 이들이 있다. 사고로 얻게 된 화상 흉터를 지우고 싶은 중학생, 홀로 남겨질 고양이가 걱정인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원로 화가, 글이 써지지 않아 괴로운 팔년차 소설가, 애인을 잃고 힘들어하는 형을 걱정하는 남동생 등 각기 다른 사연을 들고 마녀를 찾아간 그들은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오키타 엔은 마음을 간질이는 섬세한 이야기를 주로 써왔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마법을 써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거절하는 마녀를 등장시켜 색다른 재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네 가지 이야기는 사계절의 풍경과 함께 보여지는데, 담백하면서도 사려 깊게 사람들의 상처와 고민을 풀어내며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힐링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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