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자비의 시간 1~2 세트 - 전2권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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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착하고 준법정신 투철한 이곳 사람들 가운데 모든 피고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공정'이라는 단어에는 좋은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가장 뻔한 의문은 이것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는가? 그의 일반적인 대답은 이렇다. 만일 당신의 아버지나 아들이 끔찍한 범죄로 기소되었다면, 당신은 적극적인 변호사와 만만해 보이는 사람 가운데 누굴 선택하겠습니까?                   -1권, p.76~77


열여섯 드루는 여동생 키이라와 함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래 층에서 엄마가 구타 당하는 소리를 공포에 질린 채 듣고 있었다. 갈 곳이 없었던 그들은 코퍼라는 남자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고, 학대도 빈번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집이 조용해진 뒤 드루는 아래 층으로 내려갔고, 엄마는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꼼짝도 앉고 누워 있었다. 엄마를 죽인 남자는 자신의 방에서 자는 중이었다. 그가 깨어나면 아마도 자신과 여동생 조차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드루는 그의 권총을 움켜쥐고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엄마는 죽지 않았고, 그는 고의적인 의도로 경찰관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1급 살인죄로 사형을 구형받는다. 


사실 너무도 결과가 뻔한 사건이었다. 드루의 의붓 아버지 스튜어트 코퍼는 지역 보안관으로 성실히 일하며 동료나 지역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최근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불법 약물의 위험성에 대해 강의도 했었고, 그의 상사인 오지는 그를 가장 유능하고 의심할 것 없이 가장 용감했던 부하로 기억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침대에서 자는 남자를 총으로 쏜 열여섯 살짜리 아이는 반드시 성인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까지 포함해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였다. 코퍼의 어두운 부분은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편 사건을 맡은 제이크 브리건스는 이 사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체구가 작은 소년이 자신의 범죄 의도를 이해할 능력을 갖췄는지부터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살인 용의자를 변호하는 사람은 누구든 지역사회의 반발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좁은 동네였고, 경찰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생긴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살인범에게 증오의 표정을 보여주고 동정심으로 그를 대하는 불의에 조용히 분노하기 위해 모였고, 제이크는 곧 동네에서 가장 인기 없는 변호사가 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다른 변호사들은 아무도 이런 위협에 노출되지 않는다. 왜 그들만 그래야 할까? 왜 그녀 남편은 돈도 되지 않는 위험한 사건들에 엮여야 하는 걸까? 12년 동안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저축하려 애썼고 미래를 위해 뭔가를 세워보려고 꿈꿨다. 제이크는 변호사로서 능력이 엄청나게 좋았고 어떻게든 유명한 재판 변호사로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보라. 남편은 얻어맞아 휴짓조각처럼 구겨졌다. 변호사 일은 말라붙었고, 빚은 주마다 쌓이고 있었다.              -2권, p.62


이 작품은 ‘법정 소설의 대가’ 존 그리샴의 신작이다. <타임 투 킬>과 <속죄 나무>에서 활약했던 변호사 제이크 브리건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타임 투 킬>이 1989년, <속죄 나무>가 2013년에 출간되었으니, 굉장히 긴 시간 동안 드문드문 출간된 시리즈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작품을 많이 쓰는 작가라 시리즈도 많고, 스탠드 얼론 작품도 많으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모두 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타임 투 킬>은 인종문제가 얽힌 살인사건을 다루었고, <속죄 나무>에서는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을 중심으로 차별로 얼룩진 미국 역사의 단면을 보여줬다. 이번 작품 <자비의 시간>에서는 가정 폭력을 둘러싼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존 그리샴은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정의로운 변호사 제이크 브리건스를 통해서 작가는 부조리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굳게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가정 폭력은 집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나 동료들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존 그리샴은 제이크와 드루의 법정 투쟁을 통해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가정 폭력의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여러번 코퍼의 폭력으로 인해 경찰이 출동했었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 없이 끝났고, 일부 동료들도 그의 도박 전력과 잦은 폭력 행사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해왔다. 그가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보안관보 가운데 한 명이라는 이유로,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고, 성실하게 일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여러 대에 걸쳐 이곳에 살았던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소년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 비록 어린 소년이 기댈 곳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엄마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더라도, 그래서 곧 자신들의 차례라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법의 이름으로 열여섯 살 소년에게 무조건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사회정의를 지키는 것일까? 소년은 의붓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인가, 아니면 끔찍한 폭력의 피해자일까? 책을 읽는 우리 모두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다. 이 작품은 매슈 매코너헤이 주연의 HBO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영상화 될 버전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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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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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모든 동물이 조상 세계의 기술 문서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자연선택이 가장 세세한 부분들까지 깊이 유전자 풀을 조각하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라는 숨겨진 가정에 토대를 둔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선택의 힘을 말해 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위장의 완벽함이다. 동물이 자신의 (조상의) 환경이나 그 환경에 있는 어떤 대상을 세세한 수준까지 완벽하게 닮은 모습을 띠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점은 한 동물이 유연관계가 없는 다른 동물을 세세한 부분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양쪽이 같은 생활 방식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p.125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 이은 리처드 도킨스의 최신작이다. 그는 ‘사자의 유전서(genetic book of the dead)’라는 흥미로운 개념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당신은 하나의 책, 미완성 문학 작품, 기술적 역사의 보관소다'라는 첫 문장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데, 사자의 유전서는 유전자 풀 전체를 조각한 환경을 기술한 문서이자, 다른 여느 개체보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어느 조상 개체의 세계를 기술한 문서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과 유전체가 오래 전에 살았던 조상들을 에워싸고 있던 세계들에 관한 종합 기록물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사자의 유전서는 동시에 미래 예측서이기도 하다. 동물의 유전체는 조상들의 자연선택을 거쳐 유전자를 통해 물려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을 읽을 때 사실상 과거 환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각종 동물과 식물, 균류, 세균, 그리고 고세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유전자 중심의 시각에서 좀 더 나아가 과거의 연대기이자 자연선택에 의해 쓰이고 편집되는 한 권의 책으로서 진화를 바라본다. 모든 동물이 조상 세계의 기술 문서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도판들을 풀컬러로 수록해 시각적인 이해를 도와주고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야나 렌조바의 화려한 일러스트들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확실히 전작들에 비해 읽기 수월한 책이었다. 사실 <이기적 유전자>도, <확장된 표현형>도 전문적인 개념들이 많아서 읽는 게 쉽지는 않았었으니 말이다. 자연선택과 진화론, 진화생물학이라는 장르에 관심이 있었지만 선뜻 시작하기가 어려웠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잘 풀어쓴 책인데다, 담고 있는 내용 자체도 풍부해서 아마 홀린듯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테니 말이다. 




그럴 것이다. 자연선택이 종들을 놓고 고르는 것이라면. 그러나 널리 퍼진 오해와 정반대로, 자연선택은 그렇지 않다. 자연선택이 고르는 것은 유전자다. 유전자가 개체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고른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차이가 빚어진다. 사려 깊은 계획 경제가 다윈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출현하려면, 성비를 제어하는 유전자들의 자연선택을 거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유전자가 수컷이 생산하는 X 정자 대 Y 정자의 수를 편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어떤 수컷 태아를 선택적으로 유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태어난 수컷 새끼들을 굶겨 죽이고 선호하는 소수만을 키우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332


뻐꾸기는 알에서 나오자마자 잔인한 행동을 한다. 새끼 뻐꾸기는 양부모의 주의를 독차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소중한 먹이를 놓고 경쟁할 상대들을 지체없이 제거해야 한다. 갓 부화한 새끼는 등에 작은 홈이 나 있는데, 둥지에 자신 외의 알이나 새끼를 그 홈에 끼운 뒤 꿈틀거리면서 위로 밀어 올려서 둥지 밖으로 내버린다. 물론 새끼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안다는 징후가 없으며, 죄책감이나 후회를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시계태엽 장치처럼 작동하는 행동이다. 조상 세대에서 이루어진 자연선택이 이러한 유전자를 만들어 냈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도록 한 것이다. 새가 지적 인지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깃털 달린 작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대단히 흥미롭다. 또한 뻐꾸기는 다른 종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서 자기 새끼를 키우게 하는 탁란 기생생물이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화의 유전자 관점에서 보자면, 뻐꾸기는 정말 괘씸하지만 영리한 새임에는 분명하다. 


유전자의 불멸성에 대해 다루는 장도 재미있었는데, <이기적 유전자>를 대신할 수 있었던 제목들 중에 '불멸의 유전자'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인과적 유전자', '협력하는 유전자', 그리고 '약간 이기적인 염색체의 큰 조각과 더욱더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조각'까지 모두 내용에 들어맞는 제목 후보들이었다. 이 책은 전작들에서 설명했던 진화의 유전자 관점과 확장된 표현형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도킨스의 책들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 독자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시선을 사로잡는 첫 문장에 이어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다. '당신은 득실거리고 뒤섞이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바이러스들이 빚어낸 위대한 협력의 화신이다.' 무슨 뜻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직접 읽어 보시라. 자,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진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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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 - 식물에서 발견한 새로운 지능의 미래
파코 칼보 지음, 하인해 옮김 / 휴머니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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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테라를 포함한 식물은 '뇌'에 견줄 수 있는 무언가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러 복잡한 일을 해낸다. 지금 우리는 가시적인 뇌나 최소한 잘 발달한 뉴런의 집합이 없다면 당연히 지능이 없다고 여기는 몹시 좁은 시야에 갇혀있다. 과거에는 생명의 나무에서 특정 형태의 뇌가 자리한 하나의 가지로부터 지능이 진화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다리마다 뇌가 있어 지능이 매우 뛰어난 문어 같은 유기체들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이러한 그림은 더는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식물을 포함한 다른 유기체에 지능이 있을 가능성과 지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p.34~35


타마린드라는 식물을 키운 적이 있다. 잔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옆으로 퍼지면서 자라는 이 식물은 독특한 점이 있다. 긴 타원형으로 가지가 마주보며 모여 달리는 잎이 낮에는 활짝 펴진 상태로 있다가, 밤이 되면 잎을 반으로 접는다는 거다. 마치 낮에는 활동하다, 밤이 되면 잠을 자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식충 식물인 파리지옥도 키워 본 적이 있다. 곤충을 잡아 먹는 이 식물은 유인하는 냄새를 뿌려 곤충들이 다가오면 잎을 닫아서 잡는 걸로 유명하다. 실제로 가시처럼 생긴 잎의 털을 몇 개만 건드려도 바로 잎을 오무리는데 너무 신기했다. 사실 식물을 워낙 좋아하고, 많이 키우다 보니 매일 매일 안부를 묻듯이 관찰하는 것이 습관이다. 발달하는 과정이 정말 드라마틱한 식물도 있고, 별다른 변화없이 갑작스럽게 성장하는 식물도 있어서 매번 신기했었다. 


식물을 관찰하다 보면 환경에 적응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이 정말 영리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서 '식물지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너무 궁금했다. 뇌도, 신경도 없는 식물에게 '지능이라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 너무도 기발했다. 이 책은 신경과학, 식물생리학, 심리학,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식물이 보여주는 고차원적 정보처리 능력을 조명한다. 저자인 파코 칼보는 인지과학자이자 생물철학자로 스페인 무르시아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가르치고 학제간 연구의 최전선에서 식물지능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식물지능에 대한 가장 최신의 연구 성과를 풀어서 설명한다. 그는 강연장에서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던 미모사 실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신경초'라고도 불리는 미모사는 잎을 건드리면 '수줍어'하듯이 줄기 쪽으로 움츠러드는 식물이다. 내가 키웠던 타마린드처럼 말이다. 그는 마치 동물을 마취시는 것과 동일하게 마취제를 통해 식물이 '잠이 드는'것을 보여주어 탄성과 박수를 받는다. 마취제에 취한 미모사가 건드려도 꿈쩍도 않고 반응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모든 식물은 약물의 영향을 받으면 잎을 움직이거나, 줄기를 구부리거나, 광합성을 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행동을 멈춘다고 한다. 약 15억 년 전 계통이 갈라진 동물과 식물이 이처럼 비슷하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각 식물의 경험은 식물의 고유한 물질성과 주변 기회들의 긴밀한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 각 개체는 자신만의 움벨트를 만든다. 하나의 식물이 겪는 경험은 다른 식물의 경험과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쌍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식물은 같은 환경에 놓이더라도 개체마다 다르게 행동한다. 우리는 이제 막 이 같은 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개념들을 종합하면 식물 역시 우리가 성격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성격이라는 표현을 인간이 아닌 유기체에 적용하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개체간 차이의 저변을 이해하는 데 더 나은 대안이 없다.               p.244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물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물의 녹색 배경 정도로만 여긴다. 하지만 미모사가 잎을 접거나 파리지옥이 덫을 닫는 동작 역시 우리가 동물 활동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표현인 행동, 운동, "측정 가능한 반응"으로 정의한다면 어떨까. 사실 식물은 낮 동안 해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최대한 많은 빛을 흡수하고, 밤이 되면 해가 없는데도 일출이 일어날 곳으로 잎의 방향을 튼다. 또한 스스로 멜라토닌 물질을 생성하고 24시간 주기로 내부 리듬에 따라 세밀하게 통제한다. 이러한 식물의 행동은 놀라울 만큼 똑똑해 보인다. 그러니까 식물은 '뇌'에 견줄 수 있는 무언가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러 복잡한 일을 해낸다는 말이다. 그러니 뇌나 뉴런의 집합이 없다면 당연히 지능도 없다고 여기는 것은 몹시 좁은 시야에 갇힌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식물지능 연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학습과 기억의 능력이었다. 식물은 주변 환경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저장한 다음 미래의 행동 방향을 정하는 데 활용한다. 실제로 미모사를 통해 실험한 결과 자극의 빈도가 높아질수록 반응이 무뎌지고, 결국에는 반응이 더는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는 '습관화'로 불리는 무척 단순한 학습 방식이다. 빛과 자극에 대한 미모사의 실험 결과 미모사의 습관화는 무려 28일 동안 지속되었고, 이는 장기 기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후로도 동물에게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고차원적인 학습 능력이 식물에도 가능한지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완두콩과 옥수수의 잎이 어디로 자라는지에 대한 실험과 어린잎이 빛에 대한 과거 노출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는 사실 등 굉장히 인상적인 실험 결과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식물에 학습 능력이 있다는 생각에 대한 저항은 거세다고 한다. 동물은 학습하고 식물은 적응 방식을 진화시킨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통념과 우리의 고정관념에 대해 가뿐하게 반기를 든다.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탄탄한 실험 결과를 토대로 제시하는 가능성이기에, 앞으로 식물지능에 대한 연구에 대해 더 기대하는 바가 크다. 식물에서 발견한 지능의 또 다른 차원이 궁금하다면, 식물 연구의 최전선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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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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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스테르는 여자의 말에 격노한 나머지 그 기묘한 햇빛을 보지 못했지만 뭔가 변했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다시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경청을 당연시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그저 누군가의 아내나 누이나 어머니로 치부할 때가 아닙니다. 아스테르가 말한다.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마지막 말은 악사들이 멋들어진 마센코의 현에 활을 그으며 찬가 혹은 후렴처럼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p.177


'보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말은 아마도 기록된 역사에서 가장 잘 보여지는 아이러니일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굵직한 사건과 영웅들과 주요 인물들이지만, 실상 그 서사를 채우는 것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이니 말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남자들 옆에서 함께 싸운 에티오피아 여자들, 지금까지도 빛바랜 서류 속에서 엇나간 선으로만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전쟁 이야기는 늘 남자들의 이야기였지만,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남자들만의 이야기였던 적은 없다'고 말하며, '그곳에는 늘 여자들이 있었다'고 이 작품이 시작된 계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수년에 걸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쓰인 이 작품은 역사의 격동기를 뚫고 지나온 여성의 삶을 생생하게 소환한다.


1935년, 부모를 잃은 히루트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군 총사령관인 키다네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한다. 키다네의 아내 아스테르는 사사건건 히루트의 행동에 트집을 잡는데, 어느 날 목걸이가 사라졌다고 히루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품인 소층을 빼앗기게 된다. 아버지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물건이었기에, 소중히 보관하며 만지작거리다 잠들기도 했던 낡은 소총이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고, 어떻게든 무기를 모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키다네는 황제께서도 누구나 무기를 기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총을 가져간다. 그 일로 인해 히루트는 작은 물건들을 계속해서 훔치고, 그것들을 마구간 옆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둔다. 결국 아스테르에게 발각되어 혼쭐이 나기 전까지 그 일은 계속된다. 히스테리컬한 성격으로 등장하는 아스테와 일방적으로 당하는 히루트의 관계는 이후 전쟁이 시작된 뒤 적군의 포로로 만나게 되면서 달라진다. 히루트와 아스테르를 비롯한 마을 여자들이 밤낮으로 훈련에 매진해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머리를 때리고, 그는 제대로 보기 이해 눈을 깜박인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현실이다.

쏘지 마! 사격 중지!

이게 뭐지? 에토레는 군모가 획 젖혀질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든다. 저 여잔 누구지?

혼자 달리고 있는 병사는 이목구비가 섬세한 군복 차림의 소녀다. 홀로 풀밭 위에서 기병들 사이를 날듯이 달리는 매혹적이고 초현실적인 아비시니아인.                    p.471


1935년 10월 2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시작한다. 당시 무솔리니는 아프리카 확장을 통해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이탈리아군의 화학 무기 사용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이 전쟁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남동생을 대신해 전쟁에 나간 증조모의 실화에 착안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소녀 히루트뿐만 아니라 총사령관의 아내와 첩자로 활동하는 매춘부, 자유를 꿈꾸는 요리사 등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작품의 제목인 '그림자 왕'은 에티오피아 황제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패색이 짚어지자, 황제를 닮은 병사를 대신 그림자 왕으로 내세우는 계획을 뜻한다. 계획을 세운 것이 히루트였고, 그림자 왕의 호위병이 되어 활약한다.


불타는 도시와 불붙은 산, 폐허가 된 집과 허물어지는 교회, 누렇게 마른 들판과 끓어오르는 강물, 독으로 오염된 땅과 쓰러진 나무, 펑펑 터지는 폭탄과 질식하는 사람들, 갈가리 찢긴 사지.. 이토록 참혹하고 끔찍한 전쟁의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부모를 잃고 에티오피아군 총사령관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어린 소녀가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고, 죽음의 공포와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어엿한 전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우리를 역사 속 한 장면으로 데려간다. 1974년 현재와 1935년 과거가 교차되는 구성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수척하고 굶주린 얼굴의 어린 소년, 두려움에 일그러진 젊은 여자 등 사진으로만 보았던 전쟁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나 이 작품이 돋보이는 지점은 서사 그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고대 그리스 연극을 연상시키는 구성과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가 독보적인 매력을 발휘한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현실의 개연성과 픽션의 재미를 모두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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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택시에서 우주가 말을 걸었다
찰스 S. 코켈 지음, 이충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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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건 다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런던에서 승객을 태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소행성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전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옳은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한낮에 뻔뻔하게도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의 말이 맞다. 우리는 우주를 생각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다. 쇼핑이나 집안 청소 등 그밖에도 해야 할 일이 많고, 그리고 직장에서 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시간을 내 우주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p.83~84


때로는 심오한 질문이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바로 이 책처럼 말이다. 우주 생물학자인 저자는 어느 날 런던의 킹스크로스 기차역에서 다우닝가 10번지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는 영국의 우주 비행사 팀 피크를 위해 총리가 주최한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그곳으로 향하던 중 호기심 많은 택시 기사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외계인 택시 기사도 있나요?" 이 질문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 훨씬 더 흥미로운 질문이 숨어 있었다. 외계인 택시 기사가 존재하려면, 우선 어느 행성에서 생명이 출현해야 하고, 그 생명체가 지능이 있어야 하고, 경제와 택시를 발명해야 하며... 등등 그 택시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세계에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과 우리 사회의 본질에 대한 비밀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책은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공항에서 우주 비행 센터로 가는 길에서, 강연을 위해 대학교로 가는 길에서, 행성 탐사차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광산으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졌다. 일상의 장소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로 진행되기 때문에 누구나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저 밖의 우주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존재할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물론 지구 외의 장소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최신의 과학 데이터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무심코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저자는 우주가 처음 생겨났던 순간부터 시작해 생명 출현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 35억 년 역사를 그렇게 단 몇 페이지만으로 임팩트있게 설명해주니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연 우리가 우주에서 택시 기사가 있는 유일한 세계에 살고 있을 가능성과 우리 은하와 다른 은하들 곳곳에 촉수가 달린 채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택시 기사들이 승객을 태우고 외계 도시들을 달리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장들이 그렇다 소소하게 시작해서 깊이 있게 파고들다가 생각할 거리들을 툭 던져준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사고의 시작 아니겠는가.




사실, 우주 애호가인 나는 가끔 지구인이 펼치는 의식 행위를 기묘하게 바라볼 때가 있다. 우주 한쪽 구석의 이곳에 작은 암석 덩어리가 있는데, 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그중 일부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잔을 들어 올리고, 칠면조를 입속에 집어넣고, 나무 밑에 선물을 숨겨 두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그동안 이들이 서 있는 암석 덩어리는 우리은하의 다소 외딴 장소에 위치한 평범한 별 주위를 돈다. 나는 천문학적 생각으로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한지까지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p.216


이 책은 복잡하고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솔직하고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우주와 생명,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우주에 대한 지극히 사소하고 농담 같은 질문들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도 유머러스한 답변이 이어지는데, 어느 순간 과학적 사유가 펼쳐지는 것이다. 지구 밖에서 지적 문명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주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지구에서 겪는 고민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그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만약 화성에서 온 외계 미생물을 발견한다면 소독해서 박멸해야 할까, 만약 우주에서 우리만 유일한 생명체라면, 우리는 더 특별한 존재가 될까 등등 흥미로운 호기심에 대한 가장 지적인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인간이 처음 달에 도착하고, 화성 탐사에 민간 기업들이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정말 공상 과학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달 여행이 일상적인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실 달보다는 화성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덜 어려울 것이다. 화성에는 적어도 대기가 있고, 여러 면에서 달보다 환경이 덜 혹독하니 말이다. 하지만 화성은 훨씬 먼 곳에 있다. 달 여행은 주말 휴일을 좀 연장해서 다녀올 수 있지만, 화성 여행은 1년 이상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일반인들에게도 우주여행이 가능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만 해왔던, 꿈같던 상상의 단계가 조금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가까운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단계로 옮겨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택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우연히 마주친 상대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이동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대화라는 설정도 독특한 현장감을 부여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마치 택시에 함께 타고 달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정말 기발한 구성으로 쓰인 과학책인데, 놀랍도록 통찰력있고, 박식한 책이기도 하다. 우주를 다루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호기심 넘치고, 현실적이며, 명쾌한 책이 아닐까 싶다. 과학을 좋아하지만 어려운 책은 부담스럽다면, 우주 생물학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접근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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