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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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피에르는 이미 오래전에 공장에서도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길고도 단조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부자도 빈민도 없고 공장은 노동자의 소유이고 노동은 구속이 아니라 찬양이며 해방된 신체의 건강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믿지 않았다. 괴물 같은 기계를 제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미 땅속으로 몇 미터나 뿌리를 내렸다. 기계는 이미 기억할 수 없이 오래전부터 작동하기 시작해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맨손으로 톱니바퀴를 붙잡겠다고? 기계는 멈추지 않고 손만 뜯겨나갈 것이다.             p.49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프랑스, 공장들은 일주일에 며칠씩만 가동했고, 인력을 줄였다. 피에르 역시 하루 아침에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로 다시 일자리를 찾아 다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무도회에 가기 위해 새구두가 필요하다고 말한 여자 친구 자네트에게 해고당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집세가 밀려 집에서도 쫓겨나고 보니 갈곳이 없었던 피에르는 거리를 배회하다 자네트가 잘 차려입은 남자와 호텔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격분해 주먹을 휘둘렀다가 그대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 굶주림에 지쳐 쓰레기통을 뒤지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다 벤치에서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손짓에 눈을 뜬다. 경찰관인줄 알았던 그는 친숙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친구 르네를 통해 피에르는 드디어 일자리를 찾게 된다. 


시립 정수장 수압관리탑에서 근무하게 된 피에르는 르네가 일하는 세균 연구소에 실험실에 있는 미생물들의 정체에 대해 듣게 된다. 세상에 알려진 모든 전염병이 시험관 안에 있었던 것이다. 르네는 그 기구들을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돌보고 먼지를 닦고 광을 내면서 자신의 부주의한 손가락이 단 한 번 조심성 없이 움직이기만 해도 깨져버릴 물체들의 존재를 느끼고 마음을 쓰게 되었다고, 자신의 생각을 피에르에게 말한다. '굉장하지 않아? 상상해봐,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 시험관에 든 형제들을 전부 뿌리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생각해, 우리 파리에 남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의 말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던 피에르를 자극했고, 결국 그는 파리의 수압관리탑에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다. 다음 날인 7월 14일,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에 파리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자기 손으로 진흙을 이겨서 자기 집을 만들 벽돌을 굽고 건물의 토대를 닦고 땅 위로 한 층 한 층씩 쌓아 올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형은 알아? 새롭고 단단하고 더욱 완벽해진 삶을 건설한다는 것… 나 자신이 그 엄청난 인간 눈사태의 핵심이 되어 날아올라 미래를 향해 간다고 느끼는 것… 그 눈사태는 내 위로 더욱 커져서 눈덩이가 뭉치듯 굵은 덩어리가 돼. 그리고 내가 그 심장인 거야…내 몸이 그 피가 돼서 혈관에서 혈관으로 스며들어...”             p.274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폴란드 작가 브로노 야시엔스키는 이 작품에서 전염병으로 자본주의 도시가 붕괴된 뒤 새로운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건설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대도시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작가가 당시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온 것처럼 매우 파격적인 형태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문학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20여 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발견한 정보라 작가가 기획, 번역을 맡았다. 정보라 작가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브루노 야시엔스키가 어떤 작가인지에 대한 정보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수록했는데, 작품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품은 출간당시 강렬하고 선동적인 내용 때문에 출판사를 찾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파리의 출판계에 인맥이 닿아 잡지 <뤼마니테>에 연재하게 되었고, 결국 이 작품은 야시멘스키가 프랑스에서 추방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우리가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팬데믹을 겪었기 때문에 이 작품 속 상황이 더 와닿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허구의 상황이지만 실제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겪어냈던 기억이 있기에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실직한 공장 노동자가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 과정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헤프닝 같은 사고였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염병이라는 재난으로 인해 사회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파리를 꿈꾸는 공산주의 활동가, 미국 자본가에게 접근해 탈출을 꿈꾸는 유대인 구역의 지도자, 볼셰비키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해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다 권력을 잡게 되는 러시아 고위 장교의 아들, 등 이 작품은 국적과 계급, 정치성향이 다른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각기 다른 야심을 품은 이들이 자치정부를 세우고, 흑사병이 파리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게 된 뒤, 탈출한 일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20세기 어느 혁명가가 뜨겁게 상상했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거의 백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현대 사회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도발적인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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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도감 - 제25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96
최현진 지음, 모루토리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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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가 나비였더라면, 떨어지는 순간에 누나의 어깨뼈에서 날개가 펼쳐졌을 거다. 나비는 날개로 날아갈 수도 있고 소리를 느낄 수도 있다.

"우리한테는 서로가 있어."

나는 누나가 했던 말을 소리 내어 보았다. 시계탑을 돌아 내 목소리가 돌아왔다.

우리가 나비였더라면. 내가 나비처럼 귀가 아닌 날개로 누나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면.              p.36


열한 살 산이는 오늘 처음으로 학교에 혼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열한 살이면 학교는 혼자서 갈 수 있는 나이이지만, 산이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산이의 왼쪽 귀는 소리를 잘 못 듣기 때문이다. 일곱 살 때 수영장에서 수심이 깊은 곳에 들어갔다온 뒤로 왼쪽 귀가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해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일측성 소아 난청'이라고 말했다. 두 살 많은 메아리 누나는 왼쪽 청력이 약한 산이를 위해 늘 동생의 왼편에 서 주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산이 혼자 학교에 가야했다. 누나와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걸어서 학교에 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횡단보도가 어려웠다. 초록불이 들어와도 우회전하는 차가 불쑥 등장하기 때문이다. 보청기를 껴도 소리가 완벽하게 잘 들리는 건 아니라서, 왼쪽에서 차가 오는 걸 모를 때도 많았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와 워터파크에 갔던 초등학교 6학년 양이 26미터 높이의 워터슬라이드가 붕괴되면서 추락해 숨졌습니다."


메아리 누나는 얼마 전 여름방학 때 친구와 워터파크에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는 함께 갔다가 혼자만 살아남은 누나의 친구 두나 누나에게도, 아이 혼자 워터파크에 보냈다는 비난을 받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엄마에게도, 그리고 그날 아침 자신을 빼놓고 혼자만 놀러가는 누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다가 싸우게 되었던 산이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은 누나가 아끼던 카우보이모자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산이는 누나의 모자를 쓰고, 누나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대신 하기로 한다. 길고양이에게 우유를 주고,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마니또에게 선물을 전해주고, 워터파크에 함께 갔었던 두나 누나를 만나 학교에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누나의 모습들을 하나씩 알게 된다. 산이는 이 작은 모험을 통해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누나의 죽음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1 더하기 1은 2이고, 지구의 절반은 물이라는 사실처럼, 우리 때문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한다. 순식간에 물로 가득 찼던 내 왼쪽 귀처럼 마음도 잠기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누나가 죽는 순간을 그만 봤으면 좋겠다.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마음껏 누나를 생각할 수 있게. 누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눈이 빠지도록 울어 보고 싶다. 누나에게 사과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p.122


이 작품은 제25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다. 최근에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스파클>을 쓴 최현진 작가의 신작이기도 하다. <스파클>이 사고로 오른쪽 각막을 이식받은 청소년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 <나비도감>에서는 왼쪽 청각을 상실한 어린이가 결핍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야기 중간 중간 산이가 작성하는 나비도감이 등장하는데, 나비라는 존재는 이 작품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처음 나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산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떠난 아빠가 남기고 간 책 <세계나비도감>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아빠의 흔적이었으니 말이다. 도감에는 사실만 적혀 있었고, 적혀 있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에 산이는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 워터슬라이드를 타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아빠는 살아 있지만 자신에겐 아빠가 없다는 사실, 그래서 아빠는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고, 누나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비는 귀가 없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날개 끝으로 소리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쩌면 산이가 나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나비도감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이러한 부분이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산이 누나의 죽음은 워터파크에서의 사고사였기에, 그 영상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되고, 소비된다는 점이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타인의 슬픔마저 소비하는 세상 속에서, 산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나의 죽음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함께 슬퍼하는 방법과 제대로 애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상실 이후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겪어 나가야 할지를 눈부시게 보여준다. 슬픔의 중력을 거슬러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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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언덕의 마법사
오키타 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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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의 온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지, 얼마나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쿠로는 미노루와의 나날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어째서 옆에 있어주는 것일까.

"언어는 확실히 중요하지. 하지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인 건 아니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스이가 말했다.

미노루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 '여름 바람의 행복' 중에서, p.121


저명한 화가인 미노루는 종달새 마을에서 삼십 년 가까이 살아왔다. 아내와 단 둘이 살다가 8년 전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지금은 고양이 쿠로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자녀가 없고 양친도 오래전에 돌아가셨기에 쿠로는 아내 외에 처음으로 생긴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칠십대인 미노루는 반년 전에 육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았기에 미노루는 가정부 하나에에게 종달새 언덕의 마녀에게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삽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곳에 살면서 한 번도 마법상점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가야할 일이 생긴 것이다. 마녀는 동물과 대화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고양이 쿠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노루는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고 아내에게 제대로 묻지 못했던 말을 쿠로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한 시간, 넌 행복했냐고 말이다. 과연 마녀는 미노루의 소원을 들어줄까.


소설가인 하루코는 지금까지 단행본 일곱 권과 문고본 열다섯 권을 출판했다. 화제가 된 작품이 없어 결코 잘나간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계속해올 수 있던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근근이 이어온 작가 생활도 이제는 정말 끝나버릴지 모른다. 소설을 출판한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좀처럼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라 제로 상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 이야기가, 부스러기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초조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종달새 언덕의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루코는 그곳에 찾아 보기로 한다. 재미있는 소설 아이디어가 샘솟는 마법을 부탁하기 위해서.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한 번 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마법상점에서 마녀는 하루코의 이야기를 듣더니 말한다. 마법으로 소원을 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면, 행복하겠느냐고. 과연 마녀는 하루코의 소원을 들어줄까. 하루코는 마법을 통해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될까. 




"마음은 무엇보다도 강해. 하지만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지. 말은 때때로 마법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켜."

빛이 강해진다. 스이의 빨간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고, 머리카락은 중력을 거스르며 붕 떠오른다.

도키오는 숨을 멈춘 채 기적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스이는 도키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지 멈춰 설지는 본인이 정해야겠지."

오르골을 휘덮은 빛이 사라졌다.                - '겨울이  끝나면' 중에서, p.254


종달새 마을의 종달새 언덕에는 마녀의 상점이 있다. 벽에 담쟁이덩굴이 덮여 있고, 키가 큰 빨간 꽃이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작은 목조 주택이다. '종달새 언덕 마법상점'에는 한 걸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바깥과 다른 공기가 몸을 감싼다. 마치 마치 이곳만 계절 바깥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곳에는 인형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 진녹색 로브를 입고, 붉고 긴 머리카락에 불에 타는 듯한 빨간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는 그대로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열다섯 남짓의 소녀 모습을 한 그녀가 바로 마녀 '스이'다.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 오는 그곳에 간다. 하지만 그중 정말 마법으로 소원을 이루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가도,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서 생명 연장을 애원해도 마녀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절대로 마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마녀의 마법상점을 찾아가는 이들이 있다. 사고로 얻게 된 화상 흉터를 지우고 싶은 중학생, 홀로 남겨질 고양이가 걱정인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원로 화가, 글이 써지지 않아 괴로운 팔년차 소설가, 애인을 잃고 힘들어하는 형을 걱정하는 남동생 등 각기 다른 사연을 들고 마녀를 찾아간 그들은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오키타 엔은 마음을 간질이는 섬세한 이야기를 주로 써왔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마법을 써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거절하는 마녀를 등장시켜 색다른 재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네 가지 이야기는 사계절의 풍경과 함께 보여지는데, 담백하면서도 사려 깊게 사람들의 상처와 고민을 풀어내며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힐링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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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방 둘이서 2
서윤후.최다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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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 마음이 힘들어 몸에게 이상한 것을 먹이는 날이 있지만, 이젠 그런 마음에 놓여도 안 좋은 상태 속에 오래도록 나를 내버려두진 않는다. 밥을 잘 차려서 먹는 행위에 기꺼이 쏟을 여력이 마땅치 않았던, 밥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았던 시절을 건너서, 밥도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알게 된 지금에 도착했다. 지금 살고 있는 시간, 지금 하고 있는 경험이 꼭 나에게 생산적인 의미로 각인되지 않아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뮌헨의 내 방에서처럼 매일 밥을 잘 챙겨 먹는 생활만으로 충분한 삶이라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다정, p.96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열린책들의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의 두 번째 책이다.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시인 이훤의 <고상하고 천박하게>에 이어 두 번째 책 <우리 같은 방>은 시인 서윤후와 한문학자 최다정이 함께 글을 썼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로서, 글을 쓰는 동료 작가로서, 그리고 자신만의 방을 가진 이웃으로서 <방>에 관한 이야기를 사계절이 넘는 시간 동안 공들여 써냈다. 두 사람의 결이 매우 비슷해 구분하지 않고 읽다 보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데, 다행히도 페이지 하단에 다정, 윤후라고 각각 표기가 되어 있다. 두 사람이 쓴 글을 교차하여 읽어도 좋고, 한문학자의 운치 있는 수필로, 시인의 담백한 에세이로 따로 읽어도 좋다. 


누구에게나 집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공간이다.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있고, 나의 취향과 필요에 의해 꾸려진 나만의 방은 그 속에서도 가장 익숙하고 공간이다. 책상과 의자, 화분, 책과 각종 잡동사니들로 가득해 낯익은 공간인 방에서 우리는 울고, 웃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감정을 쌓고, 생각을 한다. 최다정 작가는 이사를 자주 하며 거쳐온 보금자리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지금까지 머물렀던 각양각색의 방들이 모두 나름의 문장으로 각인되어 삶의 서사에 일부분 기여했다고 말한다. 서윤후 시인은 좋은 집이나 좋은 음식이 아니라 먹고 사는 일 사이사이로 아무렇게나 붙여 높은 스티커, 존재만으로 충분한 인형 등 의 잡동사니들이 삶을 결정해왔다고 말한다. 각자의 방에서 쓰인 방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듯 닮았고, 솔직하고 꾸밈없는 공감과 다정한 온기로 소박한 기쁨과 이상한 위안을 안겨준다.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좋아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세공하여 더 많은 풍경을 간직하는 일이다. 반대로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부연한 마음 자체를 안개처럼 느끼며 사는 일일지도.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여름을 기다려 온 마음을 여러 풍경에서 화답받을 때가 좋다. 바닷가의 출렁임 속에서 의연한 튜브, 시원한 라무네 병에 맺힌 물방울... 늦게 찾아오는 저녁의 어둠과 공원의 풀 냄새, 가로등을 곁에 두고 치는 심야의 배드민턴, 곱게 간 얼음 위로 팥을 얹은 빙수, 매미 울음소리에 찢어지는 지평선과 녹음으로 무성해진 수풀......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이 여름의 기억은, 내가 여름을 변호하기 위해서 자주 하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다.                 - 윤후, p.190~191


각자의 방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와 서로의 방문 앞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컨셉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서로의 독자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에서 각자의 언어로 삶을 정리하고, 가끔은 거실에서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쌓은 감정, 읽고 쓴 책, 지어 먹은 밥 들이 모여 지금과 같은 모양의 나에게로 도착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살았던 방과 통과했던 시간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원룸이고, 누군가에게는 전세집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가로 그 형태는 다르겠지만, 한동안 '내 집'이라고 불렀던 장소의 의미는 같지 않을까. 그래서 오래 전에 살던 동네를 가기라도 하면, 자연스럽게 그 시절로 입장하게 되는 듯한 기분이 드니 말이다. 


책상의 자리로는 창문 곁이 제격이고,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의자는 방 한편에 두길 추천한다는 최다정 작가는 만약 자신이 다른 주소의 방에 살았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됐을 거라고 말한다. 방문을 굳게 닫으면서 시작된 것들이 자신을 길러 왔었는데, 고양이를 키우고 난 이후로 방문을 한 번도 닫아 본 적이 없다는 서윤후 시인은 방에서 고요를 수비하며 붙잡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잡동사니 속에 한 번도 호명되지 못하고 잊힌 물건들을 가끔 꺼내어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고 인기척하는 것이 예의라는 시인과 과거 어느 한 시기의 나를 돌이켜 보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그때 살던 방의 창문 장면부터 떠오른다는 한문학자의 글은 각기 다른 부분에서 공감할 대목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읽는 내내 밑줄 치고 플래그를 붙이느라 더 천천히 읽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함께 쓰는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는 라인업이 이미 10권까지 나와 있다. 첫번째, 두번째 책이 좋았으니 그 나머지는 또 얼마나 좋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올해는 매달 이 시리즈를 챙겨보는 재미를 놓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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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격차 - 읽지 않는 아이는 어떻게 읽지 못하는 어른이 되는가
김지원.민정홍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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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좀 억울할 것 같다. 여전히 재미있는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나 게임기가 없던 시절, 수업 시간에 숨죽여 무협지나 로맨스 소설을 읽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그때의 책들은 정말 재미있었다. 선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교과서보다 압도적으로 재미있지 않았나? 달라진 건 '우리'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무척 재밌지만 안타깝게도 그 재미는 인간의 집중력을 노린다. 어느새 짧아진 우리의 집중력이 책의 재미를 미처 느끼기 전에 흩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라지는 집중력의 문제는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문제에 가깝다.             p.119~120


읽긴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나, 예전보다 책도 잘 읽히지 않고 이해력이나 집중력 같은 것들이 현저히 떨어진 것 같아 고민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켜켜이 쌓인 보고서 뭉치와 씨름하고 꼬리에 꼬리를 문 이메일을 훑어 내려가도 읽고 있는 글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머릿속에 잡히지 않는다면, 열심히 밑줄을 긋고 책장 모서리를 접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우리는 왜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글을 다르게 이해하는 걸까. 문해력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인 요즘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책맹이 증가하고 문해력 저하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인류의 읽기 능력 자체가 위협 받는 시대인 것이다. 스마트폰, TV, SNS 등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고, 다양한 매채렐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데이터의 양은 점점 더 늘어만 간다. 디티럴로 읽기가 일상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긴 글을 읽을 때 산만해지고, 집중력은 줄어들고, 읽기 능력은 떨어져가고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 문해력 열풍을 불러온 EBS ‘문해력 시리즈’ 〈당신의 문해력〉 〈책맹인류〉 등 을 연출해온 두 PD가 7년여 간의 취재,와 실험, 국내외 주요 연구와 교육 정책 등을 토대로 쓴 것이다. 왜 문해력 격차가 만들어지고 심화되는지, 왜 누구는 잘 읽고 누구는 읽지 못하는지, 우리가 놓치고 있던 문해력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의 문해력>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된 이후 ‘문해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고, 덕분에 문해력 학원과 교재가 넘쳐나지만, 여전히 읽고 쓰기 어려워하는 아이들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어른들이 늘어 나고 있는 요즘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읽지 않는 아이는 읽지 못하는 성인이 된다. 문제는 읽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여전히 문자로 되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때문에 읽지 못하는 아이를 최대한 빨리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이는 우리 사회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왜 우리는 읽지 않을까?', '왜 문해력이 떨어졌을까?'에 대한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든 즐겁게 읽고 이해하고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분석이나 비판, 토론과 소통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격차는 반드시 줄여나가야 하는 시대적 과제라는 점이고, 문해력은 격차 그 자체이자 우리 사회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p.285~286


아무도 제대로 읽고 쓰지 않는 시대,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차라리 안 읽고 안 쓰는 무리수를 둔다. 문해력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라고 한다. 한글이 워낙 배우기 쉽기 때문에 한국에서 문맹은 거의 사라졌다고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글자를 읽는 행위를 '당연히' 할 수 있는 거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읽기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 세계적인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인 매리언 울프도 자신의 책에서 독서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십만 년에 이르는 현생인류의 기나긴 역사에서 독서가 시작된 시기는 불과 몇천 년 전에 불과하고, 읽기란 인간이 후천적으로 익힐 수 있는 기술에 가깝다는 거다. 그러니 읽기란 원래 힘든 것이고, 생존과 직결된 읽기 능력을 배우고 발전시켜서 완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크로스의 300P CLUB을 통해 2주간 읽기와 문해력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문해력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그리고 문해력 격차를 이기는 구체적 대안까지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재미없어 하고, 어른들도 두꺼운 책을 쉽게 설명해주는 요약 영상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읽는 것은 귀로 듣거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과정을 거친다. 뇌의 활동이 다르고, 기억력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력에도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리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더라도 '읽기'라는 행위가 인간에게 주는 장점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한번 떨어진 문해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격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빨리, 많이 읽기를 재촉하는 문화와 질문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문해력 격차를 강화하는 요인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해력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6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문해력에 고민이 많았다면 동기, 보상, 레벨, 상호작용, 디지털 문해력, 사회적 독서 등의 키워드를 직접 실천해보며 한걸음씩 문해력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지금 읽기와 문해력이 위기에 빠진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책이 누구나 읽고 이해하고 소통하는 사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되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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