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저희에게 꼭 필요하긴 하지만 이 임무는 이전
임무들하고는 다르다고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건 택배 일이 아닙니다.”
폴리팩스 부인이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승진된 거로군!”
카스테어스가 껄껄
웃었다. “그런데 연봉은 안
오르고 위험도만 오를 것 같습니다. 폴리팩스 부인, 이 위험천만한 러시안룰렛에 아직도 거부감이 없으신지,
아니면 생각이 바뀌셨는지 궁금하군요."
최고령 CIA
비밀 요원 폴리팩스 부인의 활약상을 그린 이 시리즈가 벌써 네 번째 이야기 모험을
떠난다. 멕스코, 터키, 불가리아에
이어 이번에는 스위스이다. 폴리팩스 부인은 거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고난도 요가 자세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이웃인 하츠혼 여사가 속달 우편물이 왔다며
전달해준다. 이름도 모르는
사위가 그녀를 위해 특별한 병원에서의 요양을 준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카스테어스 부장과 보좌관 비숍의 연락으로 그녀의 이번 임무에 대해
전달받고, 그녀는 스위스로
떠나게 된다. 몽브리종은 의료
시설이면서 전 세계 부자들이 휴식과 요양 목적으로 모여드는 호텔 같은 곳이었다. 특별하고도 위험한 물건을 도둑맞았고, 그것이 몽브리종에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곳에 미리
잠복해 있던 요원은 죽은 상태, 어쩌면 이번 임무는 생각보다 위험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폴리팩스 부인은 망설임 없이 새로운 임무에
도전한다.
자연에 둘러싸인 조용한 호텔식 병원에서 휴양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부인의 진짜 목적은
위험한 물건을 찾아내고, 그것을 빼돌린 도둑이 누구인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었다.
폴리팩스 부인은 특유의 친화력과 관찰력으로 그곳에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과 조금씩 친분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한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깡말랐지만 강단 있어 보이고,
검은 얼굴에서 눈만 엄청나게 커 보이는 소년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자신과 친구하지 않겠느냐며
나타난다. 그런데 점점 소년의
행동에서 뭔가 수상쩍은 기색과 이상함을 감지한 폴리팩스 부인은 아이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과연 그녀는 소년을 둘러싼 이상한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베테랑
요원조차 찾아내지 못한 도둑의 실체는 알아낼 수 있을까.
충격적인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고, 냉혈한 살인범에게 쫓기고, 긴박한 납치극과 총격전에 이르기까지 버라이어티한 첩보 드라마 속에서 이번엔
폴리팩스 할머니가 어떤 활약을 보여줄까.
"바로 그거야, 그래.... 통제 없이."
"그렇지만....
그건 무서운걸요!"
코트가 외쳤다.
폴리팩스 부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싸우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워.
그리고 삶을 마치 상차림처럼 딱딱 맞게 배치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애초에 그건 어차피
가능한 일도 아니잖아.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본다는 건 정말이지 퍽 짜릿한 일이야."
처음 우리의 폴리팩스 부인을 만났던 날로 잠깐 돌아가보자. 60대 중반이 된 평범한
할머니, 남편이 먼저 죽은
뒤로 혼자 몸으로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온 어느 날,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
누구에게나 푹.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허황되어 보이는 꿈을 직접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 지역구 의원을 만나고,
이후 버스에 올라 CIA
신청사가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혹시 스파이 필요없냐고. 당연히 담당자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고, 설마 진심이냐고
멍하니 중얼거린다. 독자인 나
역시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스파이라는 게 그렇게 무작정 찾아가서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
라고 말하고 싶었던 그런 기분이랄까. 그런데,
조그만 우연들이 겹치고 마침 그녀가 딱 필요한 임무가 생기고, 폴리팩스 부인은 그녀의 오랜 소원대로 스파이가
되어 멕시코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만큼 유쾌 발랄했다.
그렇게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그녀의 뛰어난 임기웅변과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넘치는 성격에 나도 모르게 동조해서 응원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무대포로
천진난만하게 이 일에 뛰어 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공포에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그 특별함이야말로 세월의 무게만큼 나이를 먹은 '할머니'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순진해서
어수룩해 보이다가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어른이 젊은 사람 앞에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라고 세월만큼의 현명함과 노련함을 보이는 이 특별한
캐릭터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도 명랑 발랄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엉뚱한 그녀라서 전형적인 모습의 스파이와는 한참 동떨어져있지만, 바로 그 부분이 이 시리즈만이 줄 수 있는 기발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순간에서도 명랑 발랄하고, 무한 긍정의 마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어제까지 내 곁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시체가 되어 버리고,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타국에서 어떤 행동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폴리팩스 부인은 말한다.
'어떤 일은 즐겁고 어떤 일은 전혀 즐겁지 않지만, 당연히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없다'고
말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나도 그녀처럼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할머니로 나이를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