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졘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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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안핑은 신신라이를 잡지는 못했지만, 독수리가 토끼를 낚아채는 것을, 뱀이 두더지를 집어삼키는 것을, 작은 새가 벌레를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을, 개미가 소나무 껍질을 갉아먹는 것을, 벌이 들꽃의 심방에 침입해 탐욕스럽게 꽃가루를 빨아먹는 것을 목격했다. 만물 사이에도 학살과 능욕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아름다운 명분을 지닌 채 이루어지고 있었다.

 

룽잔진의 가축들은 도축업자 신치짜를 보면 지금 자신들이 쬐는 햇볕이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었다. 신치짜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칼이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참마도가 그의 아내를 죽게 하고, 그의 양아들을 살인자로 만든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신치짜의 양자인 신신라이에게 강간을 당하고는 삶이 많이 바뀌게 되는 난쟁이 안쉐얼은 수명을 점치며 비석을 새기는 일을 했다. 안쉐얼은 사법경찰 안핑의 외동딸이었는데, 신치짜가 가축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이라면 안쉐얼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녀가 비석에 누구의 이름을 새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는 사례가 여러 차례 있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안쉐얼이 신신라이에 의해 몸이 망가진 뒤로 더는 하늘과 관련이 없다고 여기며, 그녀가 인간 세상으로 추락한 징조를 찾기 시작한다. 하룻밤 사이에 신에서 마귀의 대열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세상에 해가 뜨지 않았으면 말세도 없었겠지요. 인간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경찰 안핑은 그 직업 때문에 사람들의 두려움을 샀다. 사람을 죽이는 그의 손이 닿은 물건에 원혼이 들러붙어 있기라도 한 듯, 그의 손이 닿는 것을 모두들 꺼려했던 것이다. 그의 아내 조차 그의 직업을 알게 되고는, 아이를 낳자 마자 이혼을 요구하고 떠나 버렸을 정도이다. 유일하게 그의 손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가 있었으니, 반신불수가 된 남편을 20년째 수발을 들고 있는 장례식장 염습사 리쑤전이었다. 그녀 역시 직업 때문에 사람들이 꺼려 하는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로 그 손을 통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 자신들의 손과 관련된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준다. 사형장과 장례식장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란 으스스하고 피비린내 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곳에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는 많았다. 이들 외에도 장애인 친구를 돌보며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탕메이를 비롯해서 각각의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만 무려 40명에 이르는, 정말 중국의 대륙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서리에게도 열렬히 낭만적인 일면이 있었다. 나뭇잎 살결에 스며든 서리는 그것과 입 맞추어 가을의 형형색색 잎들이 꽃처럼 활짝 피게 했다. 서리에 금빛으로 물든 소나무 침엽은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금바늘을 떨어뜨렸다. 서리에 촛불처럼 새빨갛게 물든 하트 모양의 백양나무는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새빨간 하트 잎을 떨어뜨렸다... 이 시기에 룽산 산꼭대기에 서서 뭇 산들에 눈을 돌려 온통 물든 숲들을 바라보면 산속 모든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꽃나무가 되었다고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물론 등장인물이 많은 작품은 이 소설 외에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수많은 인물들에게 각각의 이야기를 부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전체 이야기 17장에 남긴 개별 에피소드들은 그 자체 만으로도 각각 따로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밀도가 높다. 그렇다고 단편처럼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고, 모두 다른 주인공으로 쓰여 있지만 그 인물들의 관계가 얽히고 설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씨줄과 날줄처럼 긴밀하고도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이 거대한 중국 현대 사회 속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그려낸다. 그래서인지 470페이지 정도의 그렇게 두껍다고는 할 수 없는 분량을 읽어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이야기가 지루하다거나,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내용 전개가 빠르고, 다양한 매력의 인물들이 쉴 틈 없이 등장해 눈길을 사로 잡지만,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와 밀도가 느껴져 후루룩 그냥 읽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츠쯔첸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작가 후기에 밝히고 있다. 그렇게 탄생한 인물들이기에 이렇게 생생하게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2년 가까이 공들여 쓴 작품이기에 어떤 단어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고, 불필요한 묘사나 늘어지는 대목 없이 완성된 작품이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삶이란 하늘의 시편이 아니라 범속한 사람들의 즐거움과 눈물이다

 

이 작품 속 이야기는 모두 중국 현대사의 굴곡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다. 도시화와 환경 파괴, 사형 집행 방식의 변화와 장례제 개혁, 불임 수술, 사법기관의 가혹 행위, 불법 장기 매매, 영웅 만들기와 선전 선동, 매관매직, 참전 병사 대우 등과 관련한 역사 청산 문제뿐만 아니라, 죄악과 양심, 도덕과 인간 존엄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구조와 시적인 문장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다. 츠쯔젠은높고 높은 산과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들, 이러한 경관은 나의 문학적 이상에 딱 들어맞는다. 그것은 바로 소인물에게도 높이 솟음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그리고, 그들의 선함과 악함, 분노와 격정을 보여주면서 비로소 '문학적 허구의 삶'이 아니라 '진짜 피가 돌고 땀이 흐르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을 만난 것 같아,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 동안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작품은 꼭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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