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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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으로 향하는 인파에 섞여 홀로 터벅터벅 걷는다. 사실 '터벅터벅' 보다는 '터덜터덜.' 서글픈 영화에 전염되어 나도 서글픈 기분이 넘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인생을 보내게 될까.

인생이란 뭘까.

10대 무렵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아, 이런 밤에는 어쩐지 불안하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는 오랜 만이다. 이 책은 마흔과 오십 사이에 서 있는 작가 자신의 일상에서 포착한 어린 아이 같은 순간을 담고 있다. 누구나 내면에 그런 아이 같은 모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공감 백퍼센트를 불러 오는 마스다 미리의 이번 작품 역시 기대가 되었다. 마스다 미리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란 존재들은 모두 그 모습 그대로 그 시간대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어린 시절 빵집으로 달려가던 길의 작은 웅덩이가 무서워 걷던 모습, 중학교 입학식 날 교복을 입고는 어색해 했던 모습.. 그 아이들 각자가 자신과 닮은 얼굴로 어른인 내 안에서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이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 대학 시절의 나, 첫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남편과 만나 사랑에 빠졌던 내 모습을 거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현재의 나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떠올려 보면 비슷하면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내가 가장 어른의 생각과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속의 내가 가지고 있던 모습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을 읽다 보면, 내 안의 그 '아이들'에게 자꾸만 말을 건네고 싶어 진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어른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녀는 마흔의 한가운데에서 어른의 전성기를 보내며 '어른들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페루 요리를 먹고, 친구들과 함께한 어른들의 소풍에 대해서도, 애프터눈 세트를 처음 먹으러 간 날 홍차를 무려 다섯 잔씩이나 마셨던 일과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간 일 등등... 정말로 소소하고, 평범하고, 우리 주위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런 글들이다.

 

 

"일 년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어."

연말이면 어른들이 그 말을 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무척이나 이상했다. 어린 나는 일 년이 엄청나게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리고 나도 "세월이 너무 빨라."라는 말로 서로의 쓸쓸한 기분을 조용히 공유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라고 가장 처음 느꼈던 순간은 바로 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꼭 한약처럼 시커멓고, 쓴 냄새가 나는 그걸 엄마가 매일 같이 마시는 게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너도 어른이 되면 이 맛을 알게 될 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쓴 커피가 더 이상 쓰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제 내가 어른이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마스다 미리는 어릴 때 어른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열심히 할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무슨 얘기냐고 끼어들면 "애들은 몰라도 돼."라며 절대 알려주지 않았던 그 비밀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그래서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어렸을 대의 자신을 만나러 간다면 가르쳐주고 싶다고.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 터라 큭큭 대며 웃고 말았다. 마스다 미리의 글들은, 그녀의 생각들은 어쩜 이리 공감되는 대목들이 많을까 신기해하면서 말이다.

 

아이 없는 싱글 여성의 삶을 멋지게 살고 있는 그녀라 그런지, 나이에 비해 일상의 모습과 생각들이 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놀랄 때가 종종 있다. 그녀의 소녀 같은 마음과 행동들이 참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느낌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옅어진다고나 할까.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읽는 것일테고 말이다. 나도 언젠가 마흔이 되고, 오십이 가까운 나이가 될 텐데.. 그 시기가 되었을 때 그녀처럼 즐겁고 씩씩하게, 긍정적으로 일상을 보내고 생각하며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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