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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 - 박상 본격 뮤직 에쎄-이 ㅣ 슬로북 Slow Book 2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9월
평점 :
내게 음악이 없는 삶은 지루하다. 너무 평면적이라 그럴 것이다. 길은 길이고 운전은 그냥 이동이고 카페는 목을 축이는 데고 로또 판매점은 걸리지 않을 종이 쪼가리를 파는 곳이며 시사는 에너지를 보충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런 게 평면이다. 그러나 음악이 거기 끼어들면 입체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현상들의 의미가 확장된다.
길은 시가 되고 운전은 이벤트가 되고 카페는 이야기와 향기가 되고 로또 판매점은 꿈을 파는 상점이 되며 식사는 쾌락이 된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세상과 내가 단절되는 게 아니라 음악적 감각이 더해지며 아름답게 쩍 벌어지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보내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도피처가 하나씩은 다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니 뭐, 이런 게 하나쯤 있어야 사람이 살지. 싶은 그런 것들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연애일테고, 누군가에게는 친구, 또 누군가에게는 술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쇼핑이고, 여행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 만나게 된 작가 박상에게는 바로 그것이 음악과 여행인 것 같다. 제목부터 어쩐지 키치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책은 본격 뮤직 에세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자가 다닌 나라를 보고 있자면 웬만한 여행 에세이 못지 않게 엄청나다. 저자는 자신을 무명작가라 소개 하고 있으며, 그의 여행기를 통해 알게 되는 그의 상황 역시 그다지 풍족해 보이지는 않는데도 대체 어떻게 이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것일까.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베트남, 홍콩, 일본, 영국, 이스탄불 등등..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닌 그는 그 모든 순간을 음악과 함께 한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잔잔하고 어딘지 감상에 젖게 만드는 그런 에세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독특한 유머와 생활 밀착형 언어들은 그가 여느 작가와는 다른 색깔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매 페이지마다 보여주고 있다. 그는 밴드 ‘말도 안 돼’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록 정신’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을 집필하는 등 문학과 음악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행보를 걸어온 작가답게 평범함을 거부하는 문장으로 시종일관 자신의 '썰'을 풀어낸다. 그렇게나 숱한 여행지를 다녀왔고, 그곳에서 생긴 다양한 에피소드를 풀어내면서도, 이 책에는 그 흔한 여행 사진 한 장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흥미진진한 여행 에세이라니, 게다가 그가 가진 음악에 대한 식견의 폭과 깊이는 놀라울 정도이다. 그러니 이 책에는 매 페이지마다 쿵짝쿵짝 리듬감 넘치는 음악이 흐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굉장히 독특한 독서 체험을 선사하는 에세이집이라고나 할까.
더 잦은 봄비를 기원하며 <비와 당신>을 자꾸 듣는다. 이건 뭐, 우선 마음의 공해가 깨끗이 씻기는 느낌이다.
이 곡의 노랫말처럼 바보같이 눈물이 자꾸 나도 좋으니 봄비가 많이 오면 좋겠다. 울고 나면 기분도 말끔해지지 않던가. 우리가 다 잘못했으니 하늘도 울어서 기분 풀고, 다시 말끔한 파란색 보여주시길.
이따위 봄, 음악으로 견디는 수밖에. 음악 에세이라고 만날 음악으로 견디라고 결론 내는데 아아, 공기청정기 살 돈 없지 않은가, 음악뿐이지 않은가(나만 없나.....)
그 어떤 순간에도 유머 감각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는 당차게 여행하다 말고 대차게 가을을 타서, 감상에 빠진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소음 때문에 한 해 동안 이사를 세 번이나 한적도 있을 정도로 예민한 청각을 가졌지만, 의외로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케세라세라 식의 인생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너무 외로워서 부산에 여행 갔다가 충동적으로 현해탄을 건너고 만 사연부터 10년전 이탈리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간성이 개떡 같았다는 것, 아침에 눈뜨자마자 음악을 듣는 건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라 침대에서 기어 나올 빌미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 등..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주제와 관점을 종횡 무진하면서 읽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다. 대학 때 자신이 문학 천재인 줄 알고 바보 같은 행동만 골라하고 다녔는데도 신기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그녀와의 아련한 추억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어학연수를 빙자한 외화벌이 알바 중에 혼자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던 사연 등 한때 누구나 겪었을 법한 그의 에피소드들에는 항상 그 당시의 음악이 함께 한다. 그에게 음악이란 언제나 무언가를 견디게 해주었던 그것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처럼 생의 매 굴곡마다 음악으로 위로를 받으며 살아 왔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삶이 허무할 때, 지치고 힘들 때, 이별로 슬퍼할 때,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을 때, 남자친구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등등... 중요한 매 시기마다 항상 음악이 함께 했었다. 나도 어떤 음악에 한번 꽂히면 질릴 때까지 들어 째끼는 스타일인데,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긴장과 욕심이 사라진 상태로 들어야 음악을 제대로 탐닉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저 단순하게 그 시기엔 그 음악을 아무리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들을 때마다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는 영화 '라라랜드'의 OST를 주구장창 듣고 다녔는데, 요즘은 다른 영화의 음악, 최근에 보았던 뮤지컬 넘버로 차츰 옮겨 가는 중이다. 아무리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이어폰만 꽂으면 그 순간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그리고 일상에서 가난하고 찌질 하게 살더라도 여행만큼은 가고 싶을 때, 원하는 나라로 거리낌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여행 애호가들에게도 이 책은 동지 같은 존재가 되어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