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세계
리즈 무어 지음, 공경희 옮김 / 소소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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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을 때,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몰입 가상현실 속에서 휴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일상을 대체할 수 있는 진짜보다 더 짜릿한 가상현실이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모두 가상현실이라면 말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데이비드와 책상 앞에 앉은 광경을 그렸다. 벤다이어그램 처럼 머리를 맞댄 두 사람 - 에이더의 머리는 어릴 적 소소한 일로, 데이비드의 머리는 우주의 신비가 꽉 차 있고, 둘 사이는 겹치는 부분이 점점 커졌다. 이런 순간이면 딸에게 아버지는 제우스였고, 자신은 그의 머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튀어나온 아테나였다. 품위와 지혜를 겸비한 여신. 상상 속에서 그들은 연구소나 집에 있었고, 둘뿐이었다. 언제나 둘이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뭐든 에이더 앞에 놓인 문제를 풀고 있었다.

열두 살 에이더에게 가족은 아빠 데이비드 한 명뿐이었다.  컴퓨터공학 연구소 소장인 데이비드는 대리모를 고용해 자식을 갖기로 했고, 딸이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귀지 않았다. 그는 에이더에게 홈스쿨링을 통해 교육을 시켰고, 매일같이 딸과 함께 연구소에 가서 학습을 시켰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에이더에게 또래의 친구는 한 명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연구소 동료들이 그녀에겐 친구이자 제2의 부모와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쾌활하고 호기심 많은 아버지가 수심에 차서 시무룩해진 걸 에이더가 눈치챈다. 한눈을 팔거나 정신이 멍한 듯 보이는 순간도 많았고, 이따금 말도 없이 산책하러 나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데이비드가 신입 대학원생들을 환영하는 파티를 주최해 해마다 문제를 냈던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잊어 버린 순간, 방안 전체에 스멀스멀 공포감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의 오랜 동료 리스턴이 좌중을 둘러보며 적당히 무마했지만, 그 순간은 에이더의 기억 속에 영원히 봉인된다. 1년 이상 억눌렀던 의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데이비드는 에이더에게 플로피 디스크 한 장을 건넨다. '에이더' 디스크에 담긴 퍼즐에 대해서 그는 그 어떤 단서도 주지 않았다. 한참 걸릴 테니 천천히 풀어보라고, 단 이것 때문에 다른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고. 이것은 이 작품 속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가는 동안, 에이더에게 커다란 숙제가 된다. 하나뿐인 가족인 딸에게조차 밝힐 수 없었던 아버지의 비밀, 알츠하이머로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그것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커다란 퍼즐을 하나씩 완성시켜간다. 또래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기에, 어른들과 어울리는 게 훨씬 익숙한, 영리하고 조숙한 열두 살 소녀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시간들, 그들 만의 유대와 소통의 기억들이 조금씩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과정은 안쓰럽고, 먹먹하다. 결국 데이비드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법정 후견인으로 그의 오랜 동료인 리스턴이 정해져 그녀의 집에서 리스턴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 에이더. 그리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되어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 외롭고, 소외된 느낌을 이겨내며 에이더는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네가 화난 걸 알 수 있어. 내 정신머리가 붙어 있을 때, 아직 정신이 상당히 온전할 때 말해두고 싶구나. 너를 딸로 갖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이다, 에이더. 넌 상상도 못할 거야. 현재......"

딸이 대꾸하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막으면서 말을 이었다.

"현재 말이지, 사실 의학 연구와 기술 분야에서 엄청난 혁신들이 일어나고 있고........."

데이비드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메모가 있으면 좋겠다는 듯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야기는 1980년대와 2000년대가 교차되어 진행되는데,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과거의 시대적 배경이 매우 흥미진진하다. 벽걸이형 전화, 128K 매킨토시가 존재하던, 인터넷도, 인공지능도 없던 시대에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인공지능의 초기 단계, 출발점을 낱낱이 보게 된다. 데이비드가 주관하고 있었던 연구소의 주된 관심사는 자연언어처리였는데, 그들은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해석하고 생산하게 되는 프로그램으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초기에 개발했던 엘릭서라는 프로그램은 인간의 대화를 모방해, 지속적으로 독학하고, 대화를 할 때마다 더 많은 지식을 얻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에이더 역시 컴퓨터를 받자마자 엘릭서와 길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엘릭서가 친구이자,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결국 수십 년에 걸쳐 아버지의 숨겨진 과거와 비밀에 다가갈 수 있는 순간까지 엘릭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과 컴퓨터가 공존하는 시대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 리즈 무어는 과학과 암호학, 인공지능의 역사에 이르는 방대한 정보들을 배경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작인 <무게>에서 자기 안에만 갇혀 있는 캐릭터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라는 삭막한 세계를 다루면서 그 속의 인간에 대해, 그 마음속 심리에 대해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가상 현실 속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던 아버지가, 딸에게 보여지는 현재의 모습과 보여줄 수 없었던 과거의 그것을 떠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기억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딸을 위해 그 비밀을 퍼즐로 만들게 된다. 딸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어서, 아버지가 감추어둔 비밀을 찾아 그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하게 된 진실은, 놀라운 충격과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과학 소설로 시작해 가족 드라마로 연결되다, 미스터리로 달려가더니, 엄청난 반전을 안겨주고, 가슴 뭉클한 눈물과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의 시작부터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미래 소설이기도 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성의 내면을 그려내는 심리 소설이기도 하며, 아버지와 딸로 상징되는 가족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진리를 이렇게나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작품이 또 있을까. 감정들을 차곡차곡 쌓아 댐을 만들고, 어느 순간 수문을 열어 와르르 무너지게 한 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서 잔잔해진 수면 위를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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