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차창 밖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보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요?"

"대충, 그렇습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그것은 그다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수많은 것에 눈을 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이 우리의 눈을 가려줍니다. 이를테면 당신이 차창 밖으로 눈길을 주면 무엇인가가 보일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부지불식간에 '언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 시절 다니던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이 10년 만에 다시 교토로 모인다. 당시에 동료들 여섯 명이 구라마에 진화제를 구경하러 갔었는데, 그날 밤 그 중 한 명이 모습을 감추었다. 홀연히 사라진 하세가와는 그날 이후로도 아무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마치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오하시는 약속 장소 근처 화랑에서 에서 10년 전에 사라진 그녀와 비슷한 모습의 여자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특별한 그림을 보게 된다. 영원히 계속되는 밤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검은 배경에 하얀 농담으로 그린 풍경으로 기시다 미치오라는 동판화가의 작품이었다.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모두 밤이 한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날 모인 다섯 명의 동료 모두 그 야행이라는 그림에 얽힌 특별한 경험들이 하나씩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들이 들려주는 하기괴한 이야기들이 연작 단편 형식으로 이어진다.

나카이는 갑작스럽게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간 오노미치에서 아내와 꼭 닮은 낯선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곳 호텔에 로비에 걸린 야행이라는 동판화를 보며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언덕의 폐가에 사는 아내와 너무 닮은 여자,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의 남편. 게다가 직접 오라고 초대를 했던 아내와는 연락도 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다케다는 회사 동료와 그의 연인, 연인의 여동생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여행 중에 미래를 본다는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는 그들 네 명 중에 두 명에게서 사상이 나왔다며, 지금 당장 도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할머니의 예언은 믿을 만한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기로 하는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산조 명품 거리의 상점가를 통과했다. 학생 시절, 이렇게 조용한 거리를 영어회화 학원 사람들과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밤의 거리를 걷다 보면 학생 시절의 그 밤과 그대로 연결될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나카이 씨는 기쁜 듯 웃었다.

"그래.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묘하군."

"신기하죠."

"10년 전으로 시간 이동을 한 것 같아."

여행과 밤, 기차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무더운 한 여름 밤에 읽어도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오싹하다. 어느 순간 내가 그들과 함께 야행 열차를 타고 그 기묘한 시간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불타는 집 옆에 서 있던 묘령의 여인, 초등학생 무렵의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난 그 시절 친구의 모습, 죽음을 보는 할머니의 예언, 낯선 장소에서 만난 아내처럼 보이는 낯선 여인,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스님과 기묘한 분위기의 여고생...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항상 '야행'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실제 바깥에 펼쳐진 밤의 어둠만큼이나 작품 속의 세계 역시 완전한 어둠이었다. 영원한 밤의 세계, 그 속에 등장하는 묘령의 여인. 끝도 없이 어둠 속을 계속 달려가는 열차.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것 같으면서도 오싹하고,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독특한 작품이었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작품은 <유정천 가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만나는 신작이라 기대가 됐는데, 기존 작품들의 분위기와 다소 달라진, 서늘하고 오싹한 세계를 그리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동판화가의 그림을 표지화한 것 같은데, 표지 이미지도 너무 아름답고 여름 밤에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어딘가 기묘하고, 괴이한 경험담과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 그리고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가 깊은 밤, 당신의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름의 교토라는 매력적인 시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는 잠시 나마 여름 더위를 잊어 버리게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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