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첩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리버스는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들었지만 신호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내려놓았다가 귀에 대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방금 전 남자가 부서뜨릴 듯 내려놓았을 때 고장이 나버린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시간은 벌써 8 30분이 다 되어 있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옥스퍼드 테라스까지는 15분 이상 걸릴 것이다. 그는 오늘 일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궁금했다.

"술이 간절해 보이는 표정이군." 리버스가 자리로 돌아오자 딕 토런스가 말했다.

"그거 알아, ?" 리버스가 말했다. "내 인생이 블랙코미디 그 자체야."

"그래도 비극보다야 낫잖아, 안 그래?"

리버스는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매듭과 십자가>에서 경찰 15년차인 존 리버스는 파탄으로 끝난 결혼 생활으로 엄청난 자기연민에 휩싸여 있었다. <숨바꼭질>에서 경사였던 그는 경위로 진급했고, 연인이었던 질 템플러 경위와 헤어진다. 브라이언 홈스라는 파트너가 첫 등장했었고 그는 리버스의 집에 와 사방에 널린 책들을 보며 리버스가 책벌레였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이빨자국>에서는 어떤 사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에게는 할 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읽어야 할 책도, 기록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 붙인다. <스트립잭>에서는 하원의원의 스캔들과 더불어 책 절도 사건을 수사하게 되는데, 희귀서적 절도 사건을 책벌레인 리버스가 맡게 된 덕분에 더욱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리버스는 연인인 페이션스 에이트킨의 집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아파트를 대학생들에게 세를 준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 작품 <검은 수첩>에서 페이션스와의 언쟁 끝에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마약 거래 혐의로 기소되어 3년을 복역한 그의 동생 마이클이 갑자기 아파트로 찾아와 골방을 내어주게 되고, 그들 형제는 어색하고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다. 어느 날 리버스의 동료 홈스가 괴한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의식을 잃게 되고 사건을 쫓는 그에게 경고라도 하는 듯이, 동생 마이클이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어 죽을 뻔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리버스는 홈스가 늘 가지고 다니던 검은 수첩에서 수년 전 화재로 사라진 센트럴 호텔에 관한 단서를 발견하게 되고,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악명 높은 조직의 보스 캐퍼티가 있을 거라 의심하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는 선과 악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잔인함이나 욕정 같은 나쁜 생각이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교화된 사상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고 그런 상태로 하루 종일 고문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면........결국에는 사회에서 행해진 행위로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전혀 헤아릴 필요가 없다. 리버스도 끊임없이 샘솟는 암울한 핏빛 상상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행동으로 그 상상을 넘어설 수만 있다면 기분은 무척 좋아질 것이다. 옳은 일을 한 셈이니까.

참 다양한 시리즈에서 활약하는 형사 캐릭터들을 만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존 리버스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집에 언제나 책이 사방에 널려 있고, 서점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며, 책을 수집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언젠가 일주일 휴가를 받게 되면 몰아서 읽으려고 아껴둔 책들만 침대 옆에 쉰 권도 넘게 수북히 쌓여 있다.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고, 도스토옙스키에 심취해있는 형사 캐릭터를 그 어디서 만나볼 수 있겠냔 말이다.

특히나 이번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이 중요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이언 랜킨은 시리즈가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들자 몇 가지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검은 수첩>이 그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리버스가 활동하는 장소에 실재하는 거리 이름을 붙여 현실성을 더하고, 기존에 등장한 캐릭터뿐만 아니라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앞으로 이어지는 시리즈 내내 리버스와 대척점에 서 있게 될 악당 캐퍼티는 이전 <이빨 자국>에서 인상적인 카메오로 등장했다 이번 작품에서 제대로 된 캐릭터로 자리매김한다. 이언 랜킨은 어떤 면에서 악당 캐퍼티가 형사 리버스와 아주 흡사하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빨리 늙어가고 있고, 변화하는 주변 환경을 못마땅해하는 것도 똑같다며, 그들이 꼭 카인과 아벨, 동전의 양면, 혹은 지킬과 하이드같다고 말이다. 물론 리버스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또 이번 작품에 처음 등장하는 캐릭터 쇼반 클락 경장 역시 굉장히 매력적이다. 기존에 리버스에게는 이미 조수가 있었지만, 홈스는 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던 탓에 이번 작품에서 그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캐릭터로 그녀가 등장하게 된다. 상관을 존경하지만 그가 규칙을 무시할 때는 대놓고 화를 낼 줄도 아는 당돌한 부하 형사야말로 존 리버스와 완벽한 케미를 자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말이다. 역자 후기를 보니 이 작품에서 정확히 22년 후 출간된 존 리버스 컬렉션 스무 번째 작품 <황야의 얌전한 개들>에서는 경위가 된 쇼반 클락의 요청으로 이미 은퇴한 리버스가 킬러의 표적이 된 숙명의 라이벌 빅 제르 캐퍼티를 보호하게 된다고 하니, 벌써 부터 기대가 된다. 물론 그 전에 시리즈 여섯 번째부터 열아홉번째 작품을 모두 거쳐야 만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시리즈는 영국에서 매년 팔려나가는 범죄 소설 중 무려 1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의 모든 작품은 출간되고 3개월 만에 50만 부 이상 팔려나가며, 3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타탄 누아르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국민작가이자 유럽 범죄 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이언 랜킨의 작품들을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면, 이번 <검은 수첩>으로 시작해보시길 바란다. 시크하고 냉소적이지만, 인간적인 존 리버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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