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먹먹한 표현인가. 우리는 지나가 버린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 누군가에게 준 상처도, 지나고 하는 후회도, 한번 내뱉어 버린 말도, 어긋나 버린 시간도, 이미 엎질러진 실수도.. 절대 돌이킬 수 없다.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서, 그때의 사카모토 노부코의 얼굴이 뇌리에 달라붙는다.
설마, 그때 한 약속을 지키라는 건가-?
말도 안 돼. 그런 약속을 지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잖아.
나는 편지지와 봉투를 꾸깃꾸깃 구겨 찢어버렸다.
무카이는 레스토랑 겸 바의 공동경영자로 일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사업파트너인 오치아이는 15년 전 무카이가 바텐더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던 손님으로 인연이 되어 현재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로 도착한 편지 한 통으로 그의 평화롭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라고만 적혀 있는 편지는 온통 거짓으로 만들어진 무카이의 과거의 봉인된 기억을 차츰 끄집어 낸다. 어릴 때는 온갖 나쁜 짓을 죄책감도 없이 저질러 온 그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 아내와 딸이 있었으니 말이다. 무카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를 잃을 수 없다며, 지금의 내가 과거의 그런 약속을 지킬 수는 없다고 애써 편지를 모른 척 해보려고 한다. 애초에 지킬 필요 따윈 없는 꺼림칙한 요구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의 과거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과거를 외면하고 싶었던 무카이의 바램과는 달리 편지는 다시 도착하고, 지금 당신이 행복한 것이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며,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당신 주변에도 자신과 똑같은 재앙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경고로 불안감에 휩싸인 그의 일상은 차츰 엉망이 되어 간다. 그는 덮어 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지 찾아 보려 하지만, 이미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버렸고, 약속의 가치는 그가 현재 가진 행복만큼이나 높아져 있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카이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고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를 절벽 끝으로 내몰기만 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깨닫기 전부터, 책장을 넘기면 이제 막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서스펜스는 이야기에 엄청난 긴장감을 부여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마디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가 염려하는 주인공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곧 벌어질 거라는 공포야말로 최고의 페이지 터너가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목숨의 가치라는 게 다른 것 같다.
지금이니 드는 생각이지만, 그 무렵의 나는 내 목숨과 인생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있다.
어린 딸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범인이 체포되었지만 극악무도한 죄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고 결국 십여 년 만에 사회로 복귀한다면, 그들에게 딸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딸이 당한 능욕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잔학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정말 실행에 옮긴다면, 대체 그 범인과 당신이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 작품은 사적인 복수에 대해, 그리고 한 번 죄를 저지른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회파 추리의 강자 야쿠마루 가쿠는 매번 묵직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그려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용서와 복수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술술 읽혀도 되나 싶을 만큼 수월하게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고 말이다. 이번 작품 역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문제를 비롯해서 진정한 용서와 응징에 대해서, 그리고 전과자가 선택할 수 있는 삶에 대해서도 그려내고 있다. 사실 누구인들 과거에 저지른 잘못 한두 가지를 숨기거나 만회하려고 노력해보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 잘못이라는 것이 사소한 것일 수도, 누군가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는 커다란 것일 수도 있을 테니 객관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상관없이, 현재의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 사람인지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항상 그랬든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매우 쉽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들어 준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