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은 거의 언제나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나 역시 언제나 책을 통해서 마치 거울처럼 나의 삶을 반추해보곤 한다. 십 년 전 어느 날, 처음 만난 상대에게 특별한 매혹을 느꼈고, 나와 너무 다른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닮은 그녀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리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혹자는 나와 그녀를 보며 둘이 사귀냐고 농담을 했을 정도로 우리 사이는 견고했고, 일주일 내내 만나고, 헤어져서는 또 밤새 통화해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그날 나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면? 누가 누군가와 갑작스레 가까워지는 데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만약 그녀가 나를 완전히 부숴 버릴려고 일부러 접근해서 일부러 나와 닮아갔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실제 현실은 어땠을까. 십 년이 넘은 지금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서서히 멀어졌고, 그렇게 연락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기묘하게 오가고 있는 델핀 드 비강의 신작은 나에게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어 주었다.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를 가끔 떠올린다.

하지만 진실이란 건 없어. 진실은 존재하지 않아. 내 신작은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것에 다가가기 위한 서툰,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시도였을 뿐이야. 빛을 꺾는 프리즘을 통해, 고통과 후회와 거부의 프리즘을 통해, 그리고 사랑의 프리즘을 통해 이야기를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야. 너도 잘 알잖아, 우리가 생략하거나 늘이거나 압축하거나 구멍을 메우는 순간, 우린 이미 픽션 속에 있다는 걸. 나는 진실을 찾았어.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근거들, 관점들, 이야기들과 대면했어.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글쓰기는 소설이야. 이야기는 환상이야. 실재하지 않는 거라고. 다만 어떤 책에도 대놓고 그렇게 적는 게 용납되지 않을 뿐이지.

영화든 드라마든, 혹은 소설이든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는 진실 혹은 거짓. 허구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선가 진짜로 일어난 일이기를, 그것이 실제 체험이기를, 그래서 등장인물과 일체가 되어 감정이입 할 수 있기를 자신도 모르게 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언제나 '진짜'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해도, 그것이 극의 형태를 띠게 되면 그건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 따라서 그것은 결국 픽션 안에 있다는 것이다. 델핀 드 비강은 이 작품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작품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 판단은 당신이 직접 해야 한다.

이야기는 작가와 이름과 직업이 같은 주인공 델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녀는 신작이 출간되고 몇 달 후부터 글 쓰는 일을 중단했다. 글을 쓰는 동작 자체가 겁이 나고 자신 없어졌고, 컴퓨터의 워드 파일을 열기만 해도 두려움이 밀려드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자신을 지독히도 무력하게 만든 유일한 요인이 바로 자신 앞에 나타난 여자 L 때문이라고, 그녀와 함께한 그 두 해 덕분에 하마터면 영원히 글을 쓰지 못할 뻔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L이 그녀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서, 그녀의 마음을 얼마나 차지하게 되고, 그녀의 생활을 장악하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그녀의 말을 듣게 될수록 점점 더 소설 속 화자인 델핀이 현실 속 델핀 드 비강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평범한 우정처럼 보였던 델핀과 L의 관계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기까지 그 흐름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이거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되고 말이다.

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아, 델핀. 하지만 네 인물들에겐 영혼이 없어. 이제 그런 건 안 통해. 독자는 그런 데 관심 없어. 넌 더 함축적인 것, 더 개인적인 것, 너한테서 나온 어떤 것, 네 이야기에서 나온 어떤 것을 찾아내야 해. 네 인물들은 인생과 관계가 있어야 해. 종이 밖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그게 바로 독자들이 요구하는 거야, 인물들이 존재하고 숨을 쉬는 것. 정말로 실재하는 것. 그러니까 너는 구성이나 기교나 기만 속에 있어서는 안 돼. 안 그러면 네 인물들은 한 번 쓰고 버리는 휴지 조각이야. 그런 건 바로 잊히지. 현실과 관련성이 없다면 픽션의 인물한테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L은 남편이 오래 전에 죽었고 혼자 살고 있으며, 대필 작가 일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대부분의 친구들과 덜 독점적이고 다른 관계들로 구성된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델핀은, 어느 순간 L과 흔히들 열일곱 살 즈음에 체험하는 타인과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그런 관계를 맺게 된다. L은 델핀을 놀라게 하고, 유쾌하게 만들고,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녀를 주눅 들게 했다. 독특하게 웃고, 독특하게 말하고, 독특하게 걸었던 L이 델핀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으나, 델핀은 그녀에게 진정으로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여자들이라면 더욱 공감할 만한 부분이 많을 것이고 말이다. 소녀들은 그냥 같이 다니는 친구들 말고,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친구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들어주고 이해해줄 수 있고, 내가 뭘 하든 판단하려 들지 않고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 말이다. 이런 관계는 대부분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어느 정도 금이 가기 시작하고, 한참 연애 중일 때 서먹서먹 해졌다가, 이별하고 나서 우정이 더욱 굳건해지곤 한다. 물론 성인이 되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에서 여러 관계를 맺으면서 그 독점적인 관계에 조금씩 여유를 두게 되면서 점차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극중 델핀과 L이 가까워지고, 서로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너무도 그럴 듯 해 보였고,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는 공감과 이해로 더욱 극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의도된 거였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쪽에 의해 일방적으로 계획되었던 관계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스티븐 킹의 <미저리> 만큼이나 숨막히는 스릴러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우리는 아주 침착하고,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낸 현대적인 <미저리>를 만나게 된다

"어쩌면 당신은 소설을 쓰려고 그 여자를 만들어낸 건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헛일이란 것을. 내가 있지도 않은 적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마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동성끼리도 (성적인 부분을 배제하고서) 첫눈에 매혹을 느끼거나 호감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하나의 만남(사랑이건 우정이건)이란 언제나 서로 알아보고 사로잡히는 두 개의 광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매혹되는 것은 바로 그런 방식이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감정적으로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생에 단 몇 번만 찾아오는 극단적인 경험.

슬럼프에 빠진 고독한 작가와 그런 작가에게 집착하는 한 여자라는 테마만으로도 이 작품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스릴러이지만, 그 속에 픽션과 논픽션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립하는 목소리 덕분에 더욱 매혹적인 작품으로 느껴진다. 독자들은 누구나, 타인의 삶을, 혹은 그 이상의 것을 훔쳐보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작가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현실 그 자체이든, 아니면 그들이 그것을 가공하는 방식이든 말이다. 모든 글쓰기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혹은 현실과 관련성이 없다면 그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다. ,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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