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무의미하고 지루해서 회사만 그만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던 때가 있었고, 외부의 상황으로 인한 남자 친구와 위기의 순간에는 그저 평생 그를 볼 수 있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회사를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었고, 사랑하는 그의 곁에서 매일 아침을 시작하지만 내가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던 간절한 바람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최정화의 소설은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서 더 낫거나 덜한 것, 그때 원했던 것과 지금 원하는 것, 그때 충족되지 못했던 것과 지금 충족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는 그녀가 왜 행복한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믿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다섯 음이나 높은 톤으로 말을 하고, 그토록 웃음이 많아지고, 그리고 거짓말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지금 어엿하게 제 앞길을 닦아나가는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었고, 우연히 마주친 남자의 관심을 받을 만한 요조숙녀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그녀를 궁금해했고 그녀는 그들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라, 즐거웠다.

                                                                                            -'홍로' 중에서

 

<구두>의 주인공은 가사 도우미 면접을 보러 온 여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낀다. 산 지 적어도 오 년은 지나 보이는 낡은 구두를 신고 온 여자는 마치 주인공의 집과 남편과 아이를 자신의 집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머뭇거림이나 위축된 모습이 아니라 새집에 첫발을 디디는 이의 설렘 같은 게 묻어 있는 여자의 흡족한 미소가 주인공을 불안하게 만든다. <팜비치>에서 오 년째 승진에서 쓴 물을 마시고 있는 남편이 피서지에서 겪는 일련의 일들은 그와 아이, 아내 사이에 뭔가 소통의 벽 같은 것을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서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에 탐닉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아내는 여러 상황에 따라 그 폭을 넓혀 가지만 충족되지 못하고 여전히 악몽을 꾼다. 끝도 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평온한 현재를 위협하는 온갖 두려움의 요소들에 시달리는 그녀의 모습에는 현대인의 불안 심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틀니>의 아내에게 남편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월등했고 존경스런 존재였다. 남편은 오 년 전 교통 사고로 여러 차례 대수술을 한 뒤 구조상 임플란트가 불가능해 틀니를 끼우게 되었는데,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만 틀니를 빼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그녀는 집에서는 틀니를 빼고 있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틀니를 뺀 그의 해괴망측한 모습을 보게 되자,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심하다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니 점점 그를 무시하게 된다.

<홍로>에서 계약으로 아내 역할을 하고 있는 여자를 동창 모임에 데려가야 하는 남자는 그들의 관계가 친구들에게 드러날 까봐 노심초사한다. 말이 없고 순종적이고, 살짝 주눅이 든 태도에 마치 태어날 때부터 오십 대였을 것 같은 표정의 그녀가 삼십 년 전에 사고사한 아내에 비해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찜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던 그녀에게 그가 무심코 거짓말을 보태자 그것에 호응하기 위해 시작한 말이 그녀를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평상시 그녀의 목소리보다 다섯 음 정도 톤이 높아지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하이톤의 웃음소리로 한껏 들떠 있게 된 것이다. 이랬으면 좋겠다 싶었던 바램이 거짓말로 현실이 되자, 마치 자신이 진짜 그 세계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 것이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시골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며 작품을 쓰는 소설가와 그녀가 묵고 있는 집의 주인 여자와의 기묘한 우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가와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그녀의 원고를 읽어주고 모니터링 해주다 점점 자신의 말에 좌지우지 되는 선생님의 모습에 우쭐해진 집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앞에서 흔들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묘한 장난기가 발동하게 되고, 스스로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선생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그녀의 집착과 피해의식이 어쩌면 '내성적인 살인'으로 까지 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 과정은 너무 차분하고 담담해서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인생이란 언제나 원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인형 뽑기 기계다. 시은으 제한되어 있고, 집게는 헐거우며, 인형은 모두 하나같이 조악하다.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쥐고 있다. 가장 작고 가벼운 인형이 뽑힐 확률이 가장 높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동전을 넣지 않을 이유가 무어란 말이냐. 타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대머리' 중에서

 

선망과 열등의식이 만들어낸 집착에 휩싸인 여자,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로 믿어 버리게 되는 여자, 잘 안다고 믿었던 자신의 딸이 불가해한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진 남자, 남편의 망가진 모습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게 시작하는 아내, 신경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은 여자 등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열등감이나 죄책감, 혹은 피해의식 때문에 다른 이들을 조금씩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극중 어떤 인물도 온전하게 '믿을 수' 없다. 모든 상황이 그럴 듯하지만, 사실 그 어느 것도 진실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불투명한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균열과 파동을 예민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는 우리의 평범할 수도 있는 일상을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때는 그 혹은 그녀만 곁에 있다면 세상에 다 내 것이 될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해서는 안될 말들이 오가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변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들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사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리가 과거에 원했던 것과 현재 바라는 것이 항상 같을 수는 없고, 당시에 충족되지 못했던 것과 지금 충족되지 못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더 낫거나 덜한 것을 구분하기란 이렇게 어렵기만 하다. 그러니 내가 조금 어긋나고 조금 비뚤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거나 달라질 거라고 믿는 건 정말 순진한 일이다. 냉정하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예리하지만 섬세한 시선으로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