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 음식의 특징은 정확한 계량이 아니라 대충 손짐작으로 넣는 재료들과 분명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얼마 안
있으면 뚝딱뚝딱 마술처럼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아닐까 싶다. 우리 엄마도 이제 손자에겐 할머니가
되었는데, 어릴 때 가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는 너무 맛있어 방법을 물어보면 대부분
적당히, 한 움큼, 살짝 등등 이해할 수 없는 계량 법을
알려 주곤 했다. 그게 뭐야. 했는데 지금 내가 엄마의
입장이 되고 보니 매일매일 음식을 만들면서 쌓이는 노하우라는 것이 정확한 레시피와 계량 법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렇게 매일같이, 평생을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해온
할머니들의 음식이 맛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내공이란 그 누구도 쉽게 따라 하거나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일 테니 말이다.
특히나 유럽의 음식문화와 재료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탈리아 할머니들의
집밥이었다. 언젠가 여행 프로그램에서 현지 이탈리아 할머니들의 소박한 밥상을 본 적이 있는데, 화려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음 음식이었지만, 이상하게 따뜻하고
푸근하고, 맛있어 보였다. 그러니 유명 셰프인
저자가 1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12명의
할머니들에게 그들의 요리를 맛보고 그들의 삶과 지혜를 배우는 이 여정은 나에게 꿈같은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라 미아시아는 코모 호숫가의 가난한 사람들이 즐겨 먹던 케이크로, 변변찮은
재료로 만들어내는 맛난 요리다. 조반나의 얘기로는 라 미아시아는 레시피랄 게 전혀 없고, 그저 알뜰한 주부가 묵은 빵과 농익은 과일, 신선한 우유로 난로의
벌건 잉걸불에 구워내는 즉석 디저트다. 이 케이크는 만들 때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한다. 묵은 빵이 부드럽고 달콤한 라 미아시아로 멋지게 변신하는데,
크리미하고 촉촉하면서 위쪽은 살짝 바삭 하다. 오후에 차와 함께 먹기도 하고, 따끈한 아침식사로 내기에도 손색이 없다.
저자가 셰프이기 때문에 요리 과정과 재료에 대한 묘사 또한 매우 정확하고,
또한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더해져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이탈리안 슬로푸드 레시피북'이 탄생했다.
12명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81가지 레시피는 재료와 계량 법, 만드는 순서 외에도 저자만의 맛깔스런 설명이 덧붙여져서 완성된 요리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요리에 대한 설명만으로 침이 꿀꺽 넘어가게 만들어준다. 레시피
자체보다 그들만의 팁이 더욱 재미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뭉근히 조린 밀라노 키트롤인
인볼티니에 대한 설명 중에 이 요리를 마마 마리아 할머니가 즐겨 만드는 이유가 바로 '하루 전날
만들어두었다가 먹을 때 다시 데우면 되기 때문에 부엌이 깨끗하고 식사 시간이 덜 부산하다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녀는 일요일에 딸과 손주들이 식사를 하러 오면 폴렌타와 함께 인볼티니를
만들어준다는데, 레시피 자체보다 그녀가 즐겨 만드는 그 이유가 확 와 닿아서 나도 손님 접대용으로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손님 접대를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 주부라면 아마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하루 전날 만들어서 다음날 데워도 맛있는 음식이 있고,
미리 재료만 준비해서 꼭 당일 날 조리해야만 하는 음식이 있으니 말이다. 다리아 할머니의
페스토 소스와 함께 내는 야채 스프 처럼. 왜냐하면 이 야채수프는 조리한 당일에 먹어야 제 맛이기
때문이다. 조리한 다음 날 식탁에 낼 경우에는 다시 데울 때 반드시 근대와 그 줄기를 추가로 넣어야
한단다. 싱싱한 근대를 넣어 데우면 수프 색이 멋지게 살아나기 때문이라나.
그리고 저자가 '몸과 마음을 두루 치유할 수 있는 집'이라 표현한 우샤 할머니의 집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녀의 제빵 기법도
재미있었고, 요가를 통해서 구축한 그녀의 인생관도 멋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디저트' '견과의 믿기지 않는 풍미'
한 번의 솜씨 발휘로 달콤한 마법의 손가락을 가졌음을 보여준다'는 식의 표현만으로 그녀의
빵들에 대한 기대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견과류를 올린 파삭한 달걀
케이크, 세 종류의 사과 케이크, 아주 얇은 아몬드 조각
케이크, 어느새 농익은 길쭉한 자두로 꽉 채워 구운 자두 타르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이즐넛 롤까지. 저자와 우슈는 천천히,
체계적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요리를 만들어갔다고 한다. 우샤의 요리
접근법은 '절제와 탐닉의 만남'이라고 했는데, 그녀가 빵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요리 방법에 대해 마법 같다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세상 어떤 것도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아요. 인생은 항상 꿈일 뿐. 인생은 단단히 굳어 있지 않은 무한한 빈
공간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죠.'
이 책이 단순한 레시피 모음집을 넘어서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다. 요리를
통한 여행의 여정과 오랜 세월을 겪어온 그녀들의 삶에 대한 통찰들은 웬만한 에세이북 못지 않게 뭉클하고,
따뜻하고, 감동적이었으니 말이다.
요리를 하면서, 또는 요리뿐 아니라 인생의 어떤 일이든 그 대상을 존중하고
품위를 지키면서 순간순간 정성을 다하면, 그 재료가 틀림없이 맛깔 나고 깨달음을 주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깨닫게 되었다. 이 진리가 확실하고 명확하게 적용되는
대상은 음식이지만(맛과 감각은 위대한 매개체이므로), 내
몸의 건강과 건전한 인간관계에도 통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표현하는 우샤의 주된 수단은 요가와
명상이었고, 내 경우는 요리였다. 우리는 버터와 설탕을
요리하며 만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인생을 배웠다.
직접 밭에서 가꾼 채소, 집에서 기른 가축,
바다에서 잡아온 싱싱한 해산물을 사용한 이탈리아 집밥들은 마치 영혼을 채워주는 것 같은 음식들이었다.
애초에 슬로 푸드라는 것 자체가 식문화 운동의 하나로 시작했다고 들었다. 음식을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음식 문화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세계 각국의 음식들을 발굴하고 알리는 데 목적을 두고 시작된 이것은 이탈리아인이
처음으로 각 나라의 전통 음식을 지키자는 취지로 발의했다고 한다. 정성껏 키운 재료들로 시간과 정성을
다해 만드는 음식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삶에 대해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다. 바쁜 현대인들이 패스트푸드에 길들여 건강을 해치는 것을 걱정하는 우리네 엄마들, 할머니들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것일 테고 말이다.
한 그릇의 요리가 삶을 바꿀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요리란 쓰는 식재료와 먹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들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소통의 한 방법이기도 하니 말이다. 카를루차 할머니가 요리를 할 때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이라고 가르쳐준 것처럼. 누구를 위한 음식인지. 음식을 먹을 사람들이 행복한지 혹은 위안이 필요한지. 비를 맞아
뼛속까지 한기가 든 상태인지, 아니면 덥고 땀이 났는지 고려해야 궁극적으로 음식을 요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 내 친구와 가족에게 최고의 맛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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