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레이첼은 매일 아침 8 4분 완행 열차를 탄다. 그녀가 타는 노선은 중간쯤에 신호가 고장 난 곳이 있어 거의 매일 기차가 그곳에 멈춰 서는데, 가끔은 몇 초지만 어떤 때는 몇 분이나 멈춰 서곤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기찻길 옆에 있는 빅토리아 왕조풍의 2층짜리 연립주택인 15호를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검은 머리에 체격이 좋고 강인해 보이는 남자와 짧게 자른 금발에 피부가 하얀 여자가 살고 있는 곳으로, 그들은 자주 집 밖으로 나와 커피를 마시곤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제이슨과 제스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마치 그들과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이라도 되는 듯 여긴다.

8 4분 기차 안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하다. 런던으로 가서 새로운 일주일을 시작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런던에 있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그저 푹 꺼진 폭신한 벨루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빛의 온기와 앞뒤로 흔들리는 객차의 움직임, 기차 바퀴가 선로 위를 굴러가는 안락한 리듬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다.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이 안에서 기찻길 옆의 집들을 구경하는 편이 더 낫다.

뭐 그럴 수 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출근 길에 자주 만나는 사람이나, 늘 보이던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즐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주인공 레이첼이 평범한 직장녀가 아니라, 몇 달 전 실직해 출근하는 시늉만 하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거다. 게다가 5년 전에 이혼한 남편과 그의 부인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스토킹녀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어제 자신이 뭘 했는지 툭하면 기억이 끊기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마셔대는 알코올중독자 그녀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믿고, 그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독자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메건은 몇 집 건너에 사는 가족의 아이를 돌봐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일이 너무나도 끔찍하게 하기 싫다. 결국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심리치료를 시작하지만, 곧 담당 의사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들고 만다. 애나는 다들 불안정한 아내를 둔 유부남과 얽히는 건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톰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기와 지금도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남편, 모든 게 완벽하다. , 여전히 자신들을 쫓아다니고, 자신의 남편에게 연락을 해대는 남편의 전부인 레이첼만 없다면 말이다.

나 혼자만 불행한 것 같았다. 난 외로워졌고, 그래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다가 양이 점점 늘었다. 그러고 나서는 더 외로워졌다. 술 취한 사람 근처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난 사람을 잃고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고 사람을 잃었다. 내 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리 잘나가지는 못했다. 설마 잘나갔다 한들, 여자로서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여자가 가치를 인정받는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외모와 엄마로서의 역할. 미인도 아니고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난 그럼 뭘까? 쓸모 없는 인간.

레이첼은 여느 때처럼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15호를 바라보는데 마침 나와 있던 제스가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제이슨을 배신한 제스를 보며 전남편 톰의 불륜을 알게 되었던 때를 떠올린다. 그들은 제이슨과 제스가 살고 있는 15로에서 몇 집 건너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 집에 지금은 톰이 불륜 상대였던 애나와 재혼해서 아기와 함께 살고 있지만 말이다. 다음날 레이첼은 술을 마시다가 무작정 제이슨을 보기 위해 기차에 탄다. 이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인 그녀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는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뜨지만 검은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걸 느낀다. 머리카락은 피에 엉겨 붙어 있고, 마스카라는 광대뼈 위로 번져 있으며 아랫입술에는 베인 상처와 다리에는 멍 자국이 있으며, 속이 메스꺼운 상태이다. 톰이 남긴 메세지에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우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도대체 자신이 간밤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세 명의 여자, 레이첼, 메건, 애나를 중심으로 차곡차곡 쌓여간다. 재미있는 건 인물들 각각의 날짜와 시간대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것. 레이첼의 현재 이야기가 진행되다, 일년 전 메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의 시간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럴수록 미스터의 해답에 가까워진다. 누굴 믿어야 할 지 의문스러운 화자들에다, 시점과 시간이 왔다갔다하면서 긴장감을 부여한다. 한번 이야기의 끝을 놓치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간 전부터 영화 판권이 계약되고, 아마존에서 엄청난 수의 독자 리뷰가 달리고, 영국과 미국에서 무려 500만부가 팔렸다는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독자들과 제대로 밀당을 하는 작품이다. 마치 폭주하는 기차처럼, 멈추지 않는 이야기의 향연이 아주 매력적이니 말이다. 이 책을 읽은 뒤부터는, 기차를 타게 되었을 때 아마도 예전과는 다른 느낌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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