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교회 안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세례식이 한창이다. 아기를 들고 있던 어린 소녀는 생각한다. '얘가 죽어버리면 좋겠어.' 세례식의 엄숙한 음성이 들렸지만, 소녀는 동생을 내려다 보며 '내가 팔을 벌려 이 돌 바닥에 떨어뜨리면 죽을까?' 고민한다. 머뭇거리다 그 짧은 순간은 그저 지나가버리지만 소녀의 내면에선 분노와 고통이 점점 더 사납게 솟구친다. 순수하기 때문에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 소녀의 마음은 결국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애거사 크리스티는 질투와 미움을 격렬한 애정으로 갑작스럽게 바꿔 버린다. 부모의 관심이 한쪽 자식에게 편중되거나,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아이는 동생에게 빼앗긴 자신의 사랑을 되찾아오고 싶어서 괜히 심술을 부리고, 부모에게 떼를 쓰고, 동생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미움이 충동적인 애정으로 바뀌어 버리고 나니,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니 말이다.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명랑한 오빠 찰스는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사랑 받는 아이였다.맏이에 이어 터울 없이 태어난 환영 받지 못하는 둘째인 로라는 언제나 말없이 뚱하고 따분한 소녀였다. 아빠와 엄마는 찰스만 애지중지했지만, 소아마비로 죽고 만다. 오빠가 죽고 없어지자 로라는 이제 부모의 사랑이 자신에게 집중될 거라고 기대해보지만, 그러기는커녕 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실망한 로라는 동생도 오빠처럼 빨리 죽기를 바라며 기도를 하고, 우연처럼 그날 집에 화재가 일어난다. 죄책감에 가까스로 동생을 구한 로라는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을 바꿔버릴 만한 격렬한 감정을 깨닫고 만다. 동생에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로라의 삶은 오로지 동생 셜리를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듯이, 맹목적인 로라의 사랑은 동생 셜리의 삶도, 로라 자신의 삶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만일 네가 불행해진다면 어떻겠어 넌 견딜 수 있니?"

"그런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 왜 생각해보지 않았지? 자신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해야지. 여자에게 이기심이 없는 건 파이 만드는 솜씨가 없는 것만큼이나 재앙이야. 넌 인생에서 뭘 원하지? 스물여덟 살이니 결혼할 때도 됐잖니. 남자 만날 생각은 안 하는 거냐?"

특히나 인상적인 캐릭터는 바로 로라의 유일한 친구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인 존 교수였다. 그는 로라에게도, 셜리에게도 일종의 멘토 같은 역할을 해주는데, 항상 입바른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직설적인 충고를 해준다. 물론 모든 바른 말들은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셜리가 인생에 실패해서 불행해지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로라에게 존은 그게 무슨 대수냐며,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견디는 용기와 마음으로 세상을 헤치고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왜 너 자신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로라를 안타까워 한다. 부모님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자, 열네 살이던 로라는 세 살이던 셜리를 보살 피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동생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이다.

"제가 셜리를 지나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 지나친 소유욕이라고요?"

어쩌면 존을 비롯해서 당사자인 셜리 조차 로라의 사랑이 지나친 집착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이 아니라 그저 소유욕일지도 모르겠다. 스물여덟이 되도록 남자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동생을 지켜주는 부모의 역할만 하며 노심초사하는 로라의 맹목적인 사랑은 셜리가 결혼할 남자를 데려오면서 그 정점을 찍는다. 셜리가 사랑한다는 헨리가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딘가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확신이 들 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좀 더 만나보길 바랬지만, 셜리는 단칼에 언니는 헨리를 질투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해버린다. 내가 언니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싫은 거 아니냐고.

"널 아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난 네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니까."

"그럼 날 아주 많이 사랑하지는 말아줘. 한없이 사랑만 받는 건 원하지 않아!"

결국 로라는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지만, 셜리는 결혼한 지 이 년 만에 헨리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다. 한 직장에 진득하게 붙어 있지도 못하고, 돈도 물 쓰듯 쓰고, 뭐든 꾸준히 하는 법이 없고, 빚지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는 대책 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쌓여가는 청구서와 분별없이 여자 문제를 일으키는 헨리 덕분에 결혼 생활 삼년  반 만에 지쳐버린다. 셜리는 자신이 처음 헨리에게 반했던 이유가 지금은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는다. 첫 만남때 그의 무심함에 끌렸었는데, 지금 그들의 경제상황이 파탄이 나도 그는 여전히 무심하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로라와 끈질기게 이야기하던 그가 지금은 다른 여자를 필사적으로 쫓아다니고 있다. 그저 언제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남을 배려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이유가 상황에 따라 이렇게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열정이 언니 로라의 맹목적인 사랑처럼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사랑의 복잡하고도 어려운 점이 아닐까 싶다.

동생을 질투하고 미워하다 생사의 순간을 통해 강렬한 애착을 느끼게 되는 로라의 외로운 삶도,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 셜리의 불행한 삶도 너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라 이 오래된 소설이 마치 현대물처럼 읽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작품이라 기존 그녀의 추리 소설 분위기와는 참 다르지만, 인간을 읽어내는 예리한 시선만은 변하지 않아 특유의 재미는 여전히 독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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