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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산보
플로랑 샤부에 지음, 최유정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일본에 관한 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쿄 여행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여행안내서도 아니고 모험 기행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판된 여행안내서처럼 잘못된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모험 주인공의 지루한 개인사가 안 나오는 것도 아니다. 우선 내가 도쿄에 간 첫 번째 이유는 여자 친구 클레르 때문이었고, 2006년 6월부터 12월까지, 정확히는 클레르의 인턴십 기간 동안 도쿄에 머물렀다.
플로랑 샤부에는 파리에 사는 만화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그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온 도쿄에서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녀 그림지도를 만들고, 사물을 살펴보고, 일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쿄 북부의 마칭야에 방 2개짜리 다다미방을 계약했는데, 매일 아침 미니 키보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짜증나는 상황을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상상해본 그림으로 풀어내는 유쾌함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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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삼 년 전 일본에서 갔던 우동집이 떠오른다. 어쩌면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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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풍경, 너무도 아기자기하고, 세밀하게 그려진 이곳들을 보고 있자면 요즘 유행하는 컬러링 북을 하나 사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색깔을 칠하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일상의 시름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플로랑 샤부에의 일러스트는 공간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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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랑 집에서 나오는데 한국인 아줌마 여러 명이 몰려와서는 근처에 교회가 문을 열었으니 들렀다 가라고, 신도가 아니어도 오면 공짜 한국 도시락을 잔뜩 먹을 수 있다며 친절하게 우리를 초대했다.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광신도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되나 직접 경험해보기로 했다. 가스펠이라 부르기 민망한 콘서트를 감상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락 대신 신약성경을 손에 들고 집에 왔다. 맛있겠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한 묘사 속에는 큭큭 거리게 만드는 유쾌함이 숨어 있다. 소토보리의 강을 묘사한 이 그림 속 '소설적 상상력'을 주시하라. 낚시하는 풍경을 그리면서 이런 걸 그려 넣다니 그의 유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도 그의 그림 속에서는 마치 시트콤 한편 처럼 재미있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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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비즈니스 지역 빌딩 대리석에서 만난 길을 잃은 사마귀, 도쿄 정부청사 건물 앞에 있는 거대한 무당벌레,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텅 빈 거리의 뷰티살롱, 오다이바 해변에서 만난 잘생긴(?) 타히티 청년, 그러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게 된 경험까지.. 그의 일상은 말 그대로 다이나믹하다. 특히 경찰서에서의 상황을 묘사하는 그림은 정말 만화 컷이라도 보는 듯하게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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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이 바라본 일본의 풍경이 어떠한지, 내가 경험해봤던 도쿄와는 어떻게 다른지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일러스트 스케치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진인 것처럼, 혹은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그려진 사물 하나하나는 일본에 갔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여행소개 책자나 여행 에세이는 많이 읽어왔지만, 이런 독특한 여행 풍경 스케치는 처음이라 책장은 쓱쓱 쉽게 넘어가는데,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색연필 그림과 깨알 같은 손 글씨로 그려낸 도쿄의 풍경은 정말 여행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일본도 좋고, 다른 나라도 좋고, 어디든 떠나서 나만의 여행지도를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